“아빠, 엄마가 방에 있는 것 같아.”
*다시, 반수인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난 이레 엄마에게 되물었다. 당최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저도 이 얘기를 유니 아빠에게 해도 되나 정말 많이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말해 드려야 할 것 같아서...”
그녀는 유니가 들을까 봐 조심하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확실해요. 제가 과일가게 주인 아저씨에게서 들었어요. 지혜 씨가 매번 썩기 일보직전의 아보카도를 사 간다는 걸요. 단한번도 의심하지 않으셨어요? 그집 부엌에 가니 냄새도 나던데, 엄청 심하게.”
그 짧은 시간에 무수한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가장 먼저 의구심이 들었던 건 지혜가 내게 왜 그런 걸까, 하는 것이었다. 남들이 부러워 할만큼 금슬 좋은 부부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서로 존중하는 사이라고는 생각했다. 더구나 둘 사이엔 유니가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걸 좀 보세요.”
그녀는 카운터 아래에서 스케치북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몇 장을 넘기더니 내 앞에 조심히 내밀었다.
“저번에 우리 집에 놀러왔을 때 유니가 그린 그림이에요.”
유니의 그림이라는 그것은 마치 <어린 왕자>의 삽화 같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커다랗게 그린 집 안에 어린 왕자가 있었고, 그 옆으로 여우가 장미꽃을 들고 서 있었다. 어린 왕자에 이런 장면이 있었던가, 하고 궁금증이 일던 그때,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이레가 그림이 왜 그러냐고 놀렸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유니가 화가 났는지 이건 자기 가족을 그린 거라며 스케치북을 던져버리곤 집으로 돌아갔다네요.”
거기까지 듣고나니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유니가 잠자기 전에 책을 읽어줬던 날.
“여우는 나... 장미꽃은 유니... 그렇다면 이 어린 왕자는...!”
“어떻게 하셨어요? 저도 이레가 말해줘서 안 건데.”
그렇다면 유니는 왜 엄마를 어린 왕자라고 했을까. 마치 내가 몰랐던 미지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내가 사는 세계와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진, 그런 곳에 빠진 것처럼 명료한 해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그 아보카도 샌드위친 이제 드시지 마세요. 아니, 도대체 그걸 몇 년이나 먹은 거예요? 지혜 씨도 참 무서운 사람이네.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증오는 아니다. 그랬다면 지혜는 단번에 죽이는 방법을 택했을 거다. 번거롭게 죽지도 않을 것을 위해 아침마다 십오 년을 애썼을 리 없다. 그렇다면 뭘까, 언제부터였을까. 신혼 때부터 아보카도 샌드위치를 먹었으니 어쩌면 결혼 전부터 계획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젠 어쩌실 거예요? 그래도 다행인 것은 유니만큼은 우리 가게 음식을 먹었다는 거죠. 의도치는 않았지만 정말 잘한 일인 것 같아요. 지혜 씨에게 유니 도시락은 우리 가게에서 해 주겠다고 제안했던 거. 안 그랬음 유니도 유니 아빠처럼... 아이고, 이 입이 또 방정이지. 그런 뜻이 아니라...”
“괜찮아요. 그동안 유니 음식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도 마음이 영 편칠 않네요. 나도 얼마나 놀랐던지. 몇날 며칠을 고민했다니까요. 그래도 지혜 씨가 이 바닥에선 유명인이고 해서 절대 그럴 거라고 생각도 못 했어요. 아, 참. 그 비즈왁스로 만들었다던 초!”
그녀는 무엇이 막 생각났는지 손바닥까지 두어번 치며 말을 이었다.
“그거 우리 이레도 유니 아빠랑 똑같이 비염 있다고 하니까 지혜 씨가 챙겨 줬는데 그것도 좀 이상해요. 우리집에서 켰을 땐 아무 냄새도 안 났는데 이레 말로는 유니네 집에 켜 둔 건 달콤한 냄새가 났다는 거예요. 그래서 꿀 냄새 같은 거였냐고 물었더니 그런 거 아니라고, 뭔 케이크 냄새 같은 거라고 하던데...”
그 초라면 매일 아침 지혜가 거실에 켜 두는 것이다. 비염 때문에 냄새를 맡을 수 없으니 난 느낄 수 없었겠지만 유니라면 알지 않았을까.
“내가 그래서... 온라인에서 비즈왁스로 만든 초를 새로 사서 켜 봤어요. 지혜 씨가 만든 것과 똑같은 모양으로. 그랬더니 그것도 달콤한 냄새는 커녕 우리 집에 있는 것처럼 냄새가 잘 안 나더라고요. 그 말은 지혜 씨가 집에서 쓰는 건 모양만 같을 뿐, 일반 향초라는 거죠. 그리고 그 향초를 쓰는 이유는 분명 뭔가 지독한 냄새를 덮기 위해서였겠죠. 그 독한 냄새는...”
“썩은 내였겠군요.”
난 카운터에 두 손을 짚고 고개를 푹 숙였다. 현기증이 돌았다.
오늘 강의 시작 한 시간 전에 이레 엄마의 전화를 받았다. 유니를 데리고 얼른 자기 가게로 와 달라는 부탁의 전화였다.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왠지 모를 다급함이 느껴져 엄마 집에서 유니를 데리고 이레네 가게로 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알게된 이 엄청난 사실을 내 앞에서 모두 토해내고 있었다.
“일단 집에 다녀와야겠어요.”
“왜요?”
“정확한 답을 얻어야죠.”
그녀는 근심어린 표정으로 나와 유니가 탄 차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문앞에 서 있었다. 백미러로 유니를 봤다. 그리고 우리는 수 초간 서로의 눈을 바라봤다. 분명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이었다. 하지만 난 말을 아끼고 계속 차를 몰았다.
유니와 내가 집안으로 들어섰지만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대담하게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아보카도를 찾아야 했다. 그런데 냉장고와 식료품 창고를 아무리 뒤져봐도 그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벌써 눈치채고 치워버린 걸까. 그때 유니가 싱크대 아래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유니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지금 무엇을 찾고 있는지, 그리고 왜 찾고 있는지.
드디어 싱크대 아래에서 아보카도를 담은 꽃무늬 재활용 가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 신선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혜가 각종 세제와 청소도구 사이에 식재료인 아보카도를 두었다는 것도 가히 충격적인데 그 주위를 맴도는 파리떼를 보니 구역질이 났다. 그리고 억지로 부여잡고 있던, 그녀에 대한 모든 감정이 무너져 내렸다. 곁에 서 있던 유니가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을 했다.
“도대체... 도대체 무엇이 널 이렇게 만든거니, 지혜야.”
고질병처럼 앓던 복통이, 지혜가 그렇게 애쓰는데도 전혀 차도를 보이지 않던 비염이, 으깬 아보카도의 거뭇한 색깔이... 그 모든 것의 원인이 이제 하나의 점으로 모아져 내 뒷통수를 세게 내려쳤다. 그렇게 정신이 아득해지고 있는데 유니가 내 어깨를 흔들며 다급하게 속삭였다.
“아빠, 엄마가 방에 있는 것 같아.”
난 유니에게 등 뒤에 있으라고 손짓을 하곤 지혜가 있는 방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