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로토프 칵테일

섞인 건 안 좋아해서

by Boradbury

높은 빌딩이 여러 개의 눈을 반짝였다가 감는 시간이다. 잠에 들었다기보다는 정지 버튼을 눌러 단순히 시간을 멈췄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다. 멈춘 시간은 습한 공기를 타고 늘어진 불빛 위에 내려앉는다. 잠시 시간을 잊는다. 시간이 빙글빙글 돌아 사라진다.

선이 깔끔하게 떨어지는 옷을 입은 사람들. 그래, 마른 종이의 날 선 느낌을 입었지만 이쯤 되면 셔츠의 제일 윗단추를 풀고 키 높은 의자에 비스듬히 앉는 사람들. 난 그들에게 묻어온 각기 다른 시간을 읽으려 한다. 시간을 뺏는 건 아니다. 단지 관찰 예능 프로그램처럼 누군가의 시간을 훔쳐보고 싶을 뿐이다.

요즘 내 최대 관심사는 단연 그녀의 시간이다. 목까지 올라오는 하얀 블라우스는 수녀 같은 이미지를 주지만 그 위에 달린 단추 두 개가 세련되게 반짝인다. 비대칭적으로 잘린 단발머리 한쪽은 귀에 꽂아 진주 귀걸이를 더 강조한다. 주문할 때를 빼면 입을 잘 떼지도 않는다. 중년의 나이가 읽히지 않는 피부는 목이나 손에서 겨우 그 세월을 가늠할 정도다.

보드카 스트레이트로 석 잔. 그녀의 주량이다. 물론 석 잔을 함께 시키는 건 아니고, 간격을 두고 마시며 그 사이를 시간으로 채운다. 생각인지 결단인지 고민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이 스트레이트 잔 사이를 넘나든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마지막 잔을 단번에 들이켠 후에 그녀는 또다시 늘어진 불빛 속으로 사라진다.

직업상 말을 많이 하는 편이지만 그녀에겐 쉽게 말을 붙일 수 없었다. 왜 항상 혼자 오나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는 거죠? 혹, 고민이 있으신가요? 다양한 질문을 입언저리에 붙이고도 선뜻 내뱉을 순 없었다. 아마도 그녀의 깡마른 몸과 쑥 들어간 눈이 본능에 가까운 공포심을 만드는 걸지도 몰랐다.

선수를 치기로 했다. 그녀 앞에 보드카 스트레이트 잔이 아닌 웰컴주 칵테일을 들이밀었다. 레몬 향이 향긋하고 달콤해서 여자 손님들이 좋아하는 칵테일이었다. 그러나 쑥 들어가서 더 커 보이는 그녀의 눈은 날 노려보듯 하더니 결국 칵테일 잔을 다시 내 쪽으로 밀었다.

“섞인 건 안 좋아해서.”

“아, 칵테일을 별로 안 좋아한다는 말씀이시라면…”

“아뇨, 그냥 섞인 건 뭐든 안 좋아한단 뜻입니다.”

그녀의 말끝은 매우 단호하게 잘렸기 때문에 난 다시 스트레이트 잔을 꺼냈다. 투명한 잔에 담긴 더 투명한 액체가 있는 듯 없는 듯 찰랑거렸다.

“사람은 다 섞여 살기 마련인데 왜 섞이는 걸 싫어하는 건가요?”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질문,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답하지 않아도 될 질문이었다. 등이 곧게 뻗었다.

“남녀평등, 종교, 정치 얘긴 안 하는 게 여기 불문율이라고 들었는데.”

그녀가 내 질문의 의도를 금세 알아차리고 빈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 눈에선 날카로운 결기마저 느껴졌다.

“그런 얘길 드리는 게 아니라, 그저 칵테일은 여러 맛과 향이 어우러져 색다른 묘미를 느낄 수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싶었습니다만.”

내가 그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다시 귀에 단정히 꽂아 넣으며 말했다.

“당신은 사람들이 온전히 섞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아뇨. 사람은 어떠한 이해관계가 있을 때만 섞이는 척하는 겁니다. 그래서 섞이지 않은 건 순수한 겁니다.”

난 두 번째 잔을 그녀 앞에 내밀었다. 그리고 한껏 치오른 감정에 풀무질하듯 보드카는 도수를 높여갔다.

“오실 때마다 뭔가 고민에 빠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언젠가 한 번 묻고 싶었죠. 그게 무엇인지. 아, 죄송해요. 원래 손님에게 이런 사적인 질문드리면 안 되는 건데.”

믹싱 글라스 안의 얼음이 바 스푼으로 휘저을 때마다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냈다. 그녀는 다시 한번 스트레이트 잔 사이에 간격을 두고 시간을 채웠다. 그러는 새 옆자리에 앉은 손님의 칵테일이 완성됐다. 그때 그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꽃병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사이에선. 휘발유와 시너를 섞어 넣은 그 병 말입니다.”

그녀의 눈이 각인된 시간을 끄집어내듯 진열된 술병들을 찬찬히 훑었다.

“그렇게 만든 것들이 저렇게나 많이 쌓여갔습니다. 그리고 우린 사정없이 던져댔습니다. 그날, 얼마나 아름다운 정의의 불꽃들이 피어났던지. 그것이 꽃병이라 불렸던 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이 정도의 시간 간격이면 벌써 세 번째 잔을 내어놓으라 했겠지만, 그녀는 웬일인지 고개를 푹 숙인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중얼거렸다. 이번엔 진짜 세심히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난 그 순수함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어. 그럼, 그랬지. 맞아. 그랬어. 그런데 요즘 내가 참 이상해. 자꾸 섞여 간다고. 잊은 거야? 변한 거야? 왜? 왜!”

그건 그녀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었고, 고민이었고, 있는 듯 없는 듯 무색으로 찰랑거리는 생각의 흔들림이었다.

보드카에 바카디 151을 섞어 넣었다. 그리고 그 위에 불을 붙였다. 작지만 강단 있는 불꽃이었다. 그녀도 그 기운을 느꼈는지 머리카락 사이사이 박아넣었던 열 손가락을 다 내려놓고 나와 칵테일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몰로토프 칵테일이에요. 화염병에 붙은 가장 아름다운 별명이죠.”

그녀는 잠시 칵테일 잔 위에 핀 작은 불꽃을 응시했다. 그리고 재빨리 불을 끈 다음, 단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 드디어 멈췄던 그녀의 시간이 다시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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