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쿠르트 하나

고작 요쿠르트 하나잖아요.

by Boradbury

극강의 화력을 자랑하는 양재역 앞 길거리 떡볶이. 그건 단 한 개만 입에 넣어도 온몸으로 화기가 올라 금세 목까지 벌개지곤 했다.

“야! 유재민, 빨리 빨리!”

“자, 여기.”

재민이는 그런 날 위해 늘 요쿠르트 하나를 준비했다. 그렇게 다 타버릴 것 같던 입안이 요쿠르트 하나에 단숨에 진화됐다. 항상 경험하는 일이지만 참 신기하다. 어떻게 이 작은 통에 든 음료 따위가 이런 큰 진화력을 갖는 건지.

“와, 이게 천국이지, 천국이 별 거야? 안 그래?”

“그럼, 네 말이 다 맞아. 매순간이 천국이지. 너랑 함께 있는 시간이.”

“뭐, 뭐래?”

어줍잖은,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리는 그의 말은 항상 요쿠르트 향을 풍겼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하루가 멀다하고 이곳 떡볶이를 찾는 걸지도 모르겠다. 매운 맛에 얼굴이 벌개지면 내 속마음을 적절히 숨길 수 있기 때문이다. 아직 단맛이 남아서인지 입안에 자꾸 침이 고였다.

매번 요쿠르트로 그에게 빚을 지는 게 처음엔 미안했지만 이제는 그러려니 한다. 단맛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단 뜻이다.

장마가 끝나고 무더위가 찾아왔다. 끈적이는 공기만큼이나 여행 시작 전부터 불쾌지수가 올라갔다. 친구들과 일 년 전부터 계획했다더니 덜렁 나와 강아지만 보내는 것도 그렇고, 난 부모님이랑 여행 가려고 모아둔 휴가까지 다 몰아 썼는데 자기는 빠질 수 없는 미팅이 있다며 홀로 남은 재민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삼박사일의 여행은 그런 나를 충분히 지치게 만들었다. 몇 번 재민이와 함께 만난 친구들이었지만 엄연히 그의 친구들이었다. 그러니 여행이 편하지 않은 건 당연했다.

입양해 온지 몇 개월 되지 않은 강아지, 멜로를 더운 날 혼자 집에 둘 수 없어 데려오긴 했지만 축 처진 멜로 탓에 좀처럼 여행에 집중할 수 없었다.

“소현 씨, 정말 미안. 앞 차가 소현 씨 탄 줄 알고, 벌써 멜로만 태우고 떠난 모양이야. 뭐, 네 시간만 가면 되니 잠시 떨어져 있어도 괜찮지?”

이런 경우가 어딨냐며 따지고 싶었다. 지금 멜로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나랑 떨어져 있으면 많이 불안해 할 거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재민이의 얼굴이 떠올라 이를 악다물었다.

피곤한 일정에 다 뻗어버린 차 안에서 한숨도 못 자고 휴대전화 시계만 쳐다봤다. 창밖 풍경은 날아가듯 지나가는데 초침은 렉 걸린 화면처럼 제자리 걸음했다. 차가 떠날 때부터 남겨둔 문자 메시지를 재민이는 아직도 확인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앞차가 도착하면 멜로부터 괜찮은지 챙겨 달라고, 멜로가 여행 내내 축 처져 있었다고, 글자마다 꾹꾹 버튼을 눌러 적은 문자는 마치 지금 내 심정과 같았다.

생각해 보니 재민이와 떡볶이를 먹으러 간지도 세 달이 넘은 것 같다. 어렵사리 취업한 회사에서 자리잡느라 힘들 것이라고 나름 쿨하게 넘기는 척 했다. 참지 못하고 홀로 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꼭 떡볶이 몇 개를 입에 넣고 나서야 뒤늦게 챙겨오지 않은 요쿠르트 생각이 났다. 그 생각의 끝에 갑자기 명치가 답답해져 왔다. 머리를 털어 생각을 지웠다. 떡볶이가 너무 매운 탓이라고, 감정이 더 진행되기 전에 그렇게 결론지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급히 앞차 운전자를 찾았다. 그는 재민이와 만나기로 한 장소에 이미 다른 친구들과 함께 도착해 있었다.

“멜로는요? 우리 멜로는 어디 있어요?”

“아, 참. 어쩌죠? 우리 차가 너무 일찍 도착해서 집에 짐 다 내리고 오면서 깜빡하고 멜로를 두고 온 것 같아요. 하지만 걱정마세요. 어디 도망가지 않게 문은 잘 닫아두고 왔으니까요.”

“뭐라고요? 제정신이에요? 남의 강아지를 주인 허락도 없이 데려간 것도 어처구니 없는데 그쪽 집에 두고 왔다고요? 참 책임감도 없네요. 배려심도 없고요!”

내 안에서 굵은 줄 하나가 끊어진 듯 온몸이 떨려왔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만약에 멜로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당신들 모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알았어?!”

날 가운데 두고 삥 둘러선 그들의 얼굴을 하나씩 눈에 찍어 담았다. 아무 잘못도 없다는 듯, 팔짱을 끼고 선 까만 눈동자들이 날 향해 우루루 쏟아졌다.

“대체 무슨 일이야?”

재민이의 등장에 날 향해 쏟아지던 까만 눈동자들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 서둘러 입을 열었다.

“재민아, 소현 씨 왜 저러냐? 기껏 너 대신이라고 생각해 끼워 줬더니 우릴 무슨 동물학대범 취급이나 하고. 나, 참 기분 더러워서.”

“뭐라고요? 재민아, 그게 아니라 멜로가...”

“야, 내버려 둬. 쟤 미친 짓 할 땐 그냥 무시하는 게 상책이야. 들어가자, 자리 예약해 놨어.”

믿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내 목소리가 그에게 가 채 닿기도 전에 그는 몸을 돌려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내게 쏟아지던 까만 눈동자들도 내 몸 여기저기를 허락없이 훑으며 건조하게 스쳐 지나갔다.

편의점 냉장고 앞에 섰다.

“저기요, 요쿠르트 없어요?”

“아, 손님, 죄송합니다. 저기 양재역 앞 길거리 떡볶이 아시죠? 거기 완전 유명해서 사람들이 맨날 요쿠르트 사가는 통에 이 시간이면 남아나는 게 없어요.”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제가 무리한 걸 달라는 것도 아니고, 고작 요쿠르트 하나잖아요. 그것도 안 되요? 그게 그렇게 과한 욕심이냐구요!”

아마 알바생은 내가 술취한 여자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극강의 화력을 자랑하는 양재역 앞 길거리 떡볶이도 먹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화기가 발끝에서부터 끓어올라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랐다. 양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이 턱 아래로 눈치없이 마구 떨어졌다.

이제 내겐 이 화기를 단숨에 진화해 줄 요쿠르트 하나가 없다.


Screenshot_20230828_212016_Gallery.jpg


keyword
이전 09화바람 듣는 하루(어른이 된 딸을 떠나 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