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같은 건 없었어? 바람? 그거야말로 바람 같은 거지 뭐.
넌 빙글빙글 돌아가는 바람개비를 검지 손가락으로 멈춰세우며 말했다. 바람개비의 한쪽 날개 끝이 스쳐가는 바람에 가늘게 몸을 떨었다. 마치 날아가려는 마음을 억지로 붙들어다 놓은 듯 답답해진다.
너를 마시고, 너를 듣는다. 목구멍으로 삼켜지는 너의 시간들이 꾸역꾸역도 아니고, 술술도 아닌 채 내 안으로 삼켜지고 있다. 귀안을 간지럽히던 네가 이제는 귓바퀴를 돌다가 일부만 귀안으로 흘러들어간다. 왜 이렇게 부자연스러울까. 나에게 넌 이제 구두코에 걸리는 작은 돌멩이 마냥 자꾸 내 걸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래서 창을 두드리는 빗방울을 들으려 한다. 탁탁, 톡톡, 툭툭... 투박하지만 점점 맑아지는 그 소리에 마음이 가라앉는다.
산이 가라앉는다. 아파트가 높아져 산이 자꾸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고 있다. 그 풍경을, 마음으로 본대로 그린다. 산 꼭대기에 보이는 뾰족한 침엽수의 머리카락이 짙은 색으로 물들어갈 무렵, 공연한 죄책감이 든다. 내 날카로웠던 말들이 산 꼭대기에 차곡히 쌓인다. 그 쌓이는 소리가 귓가를 무겁게 막고 있다.
소리가 들리지 않아? 바람 소리조차?
넌 다시 빙글빙글 돌아가는 바람개비를 멈춰 세웠던 검지 손가락을 떼며 물었다. 내게 뭐라 이야기했던가, 귀가 먹먹하다. 알 수 없다. 네 이야기는 늘 그렇듯 먹먹하고, 꾸준하다. 멈출 듯, 하지만 그렇지 않고 성실히 나아간다. 그래서 조금씩 귀 안을 막는다.
너를 듣는다. 너를 듣는다는 것은 내게 무슨 의미일까. 이 공간을 채웠지만 존재만 확인할 수 있는, 그저 바람 같은 건지. 그것이 내 검지 손가락으로 잠시 멈춰 세울 수 있던 것이었더라면 참 좋았을 것을. 마음에 점 하나로 찍힌 네 소리가 웅웅 소리를 내며 증폭되면 내 머리는 온통 네 소리들로 휘몰아쳐 머릿속 아주 작은 구멍으로 사라진다. 그건 마치 블랙홀과 같다. 주변의 것들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그것.
너를 다시 마실 수 있을까. 입을 크게 열어 바람 한 모금 서둘러 삼키면 공기도 물처럼 사래가 들어 가슴이 턱 막히는데. 그 통증은 꽤 오래 가기 마련인데. 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자꾸 내 입안으로 바람을 불어넣는다.
바람 같은 건 없었어?
그제서야 난 입술을 조금씩 움직여 답한다. 바람? 그래, 사실 바람이 있었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나조차도 말이지. 산들바람 같은 건 줄 알았는데, 그래서 만만하게 봤던 게 실수였어. 꽤나 셌거든. 강도에 비교해 타격감이 컸어. 준비도 안 하고 있었는데 휘청하고 몸이 흔들리고 귀는 멍해졌지. 방향감각을 잃고 숨을 멈췄는데 내 몸 한 쪽 끝을 누군가가 잡는 것 같았어. 바람에 파르르 떨리고 있었지만 간신히 날 붙든 손가락에 붙잡혀 겨우 바람 속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았지. 누구의 손가락이었을까. 그건 너였을까.
그거야말로 바람 같은 거지 뭐.
네가 그 말을 내뱉었을 때, 그제서야 귀가 뻥 뚫렸다. 주위의 온 소리가 다 날아와 박혀 들었다. 날카롭다 못해 살을 에는 그 소리들은 네 모든 말이었다. 내가 매일 마셨던 너의 목소리들이었다. 아직도 가슴에 턱 하고 박혀 쑥 내려가지 않은 무수한 말이 산꼭대기 침엽수 머리카락 같이 솟았다.
바람 같이 날아간 너, 그리고 나. 우리의 모든 시간과 추억이 이젠 놓아 달라고 검지 손가락을 향해 애원한다. 잡는다고 잡히지 않을 것이고, 잡으려고 애써 봤자 손가락 끝에서 바들바들 떨 그 감정들은 내가 놔 주어야 할 너의 모든 것이었다.
잘 가.
인사를 했다. 드디어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너. 자유롭게 두 팔 벌려 어딘지 모를 곳으로 날아간다.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회귀하는 습성을 좇아 내게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작은 기대조차 이제는 바람에 날려 보내줘야 한다는 걸 다시 깨닫는다.
너를 듣는다. 막혔던 귓속으로 시원하게 바람이 드나든다. 너를 마신다. 이젠 사래 들지 않고 편안히 마실 수 있을 것도 같다.
바람을 마시는 일, 바람을 듣는 일. 왜 그런 일을 하는지 알 수도 없는 일. 하지만 오늘 난 온 정신을 쏟아 그 일을 한다. 내 검지 손가락으로 잡았던 네가 자유롭게 날아가는 것을 바라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