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글자

몸에 다른 글자는 없었구?

by Boradbury

“글자가 적혀 있었어.”

기다랗게 바(Bar)에 걸친 남자의 다리가 천천히 가로로 그은 선 같다고 생각했다. 맑은 고딕체, 거기에 두껍게 볼드 처리한 어떤 글자의 첫 획.

“무슨 글자?”

그의 다리만큼이나 길쭉한 일회용 컵에 탄산수를 붓자, 각진 얼음이 불편한 소리를 냈다. 찰지게 달라붙는 탄산을 급히 털어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소리였다. 내가 그 광경을 흥미롭게 관찰하는 새, 남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체를 부자연스럽게 옆으로 비틀었다. 왼쪽 옆구리가 커다란 곡선을 만들었지만 지방층 없는 몸에 군살이 구겨지진 않았다. 그는 그 상태로 긴 호흡을 내쉬며 말했다.

“몰라. 모르는 글자였어.”

말을 마친 후 다시 긴 호흡이 한 번 더. 그리고 아주 천천히 다음 획을 긋듯 팔을 커다랗게 돌려 자신의 머리를 감싸안았다.

“그림은 아니었고? 글자처럼 보이는 그림 말이야.”

탄산수가 조금씩 입안으로 들어왔다. 입술에 닿아 앙칼지게 터지는 방울들이 작은 통증을 일으켰다. 사소한 쓰라림 정도였지만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하기엔 충분했다. 내 입술을 콕콕 찌르는 작은 점들은 아무리 많이 모여도 온전한 글자가 될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그것들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일회용 컵을 같은 방향으로 돌리기로 했다. 그 안에서 네모지게 퍼지는 차가운 소리. 남자가 그제야 선 뿐이었던 눈꺼풀을 벌려 느긋하게 누운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솔인 그림 안 좋아해. 글자가 더 좋다고 했어.”

남자의 입에서 드디어 숨겨뒀던 글자, 그녀의 이름이 튀어나왔다.

“취향 참. 직설적인 것보단 숨기는 걸 좋아했나 봐?”

“숨기려고 한 것 없어.”

“그렇다고 드러낸 것도 없지.”

내 말이 그의 살갗에 닿아 계속 신경 거슬리게 콕콕 찔렀으면 좋겠다. 목을 조르진 못해도, 저 군살없는 옆구리에 칼을 꽂아넣진 못해도, 죽을 때까지 계속 거슬렸으면 좋겠다.

“그 글자... 어디에 적혀 있었는데?”

이번엔 남자가 바에 걸쳐뒀던 다리를 내려 가지런히 하고는 상체를 반대 방향으로 꺾어 공중에 또다른 획을 그었다. 그리고 다시 긴 호흡 한 번.

“왼쪽 가슴에.”

답을 마친 그가 바닥으로 훅 하고 꺼졌다. 긴 팔과 다리가 나무 바닥에 오묘한 선을 하나 그었다. 위아래가 어디인지 다소 판단하기 어려운 모양을 하고서 말이다. 지금까지 그어오던 획이 마지막에 와서 방향을 잃고 애매해졌다. 그 가운데 그의 상체가 한 덩어리를 이루며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춘다.

“왼쪽 가슴이라... 무슨 의미였을까?”

이젠 무의식적으로 돌리던 일회용 컵에서 쓰라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남자가 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의미가 있어야 해? 무슨 글자인지도 모르는데.”

성의없는 답변에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귓속에서 마구 탄산이 터진다. 찰지게 달라붙는 그들의 습성을 잘 알기에 머리를 사정없이 털었다.

“몸에 다른 글자는 없었구? 그림 같은, 알아볼 수도 없는 그런 거 말고 제대로 의미 전달이 되는 그런 글자.”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다음주가 당장 발표횐데 상대역인 솔이가 갑자기 사라져서 곤란한 건 바로 나라고!”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남자의 얼굴이 목까지 벌개져 있었다. 그는 분명 타당한 분노의 한 부분이라고 우기겠지만 내 눈엔 들통난 부끄러움의 한 부분처럼 보였다.

“그럼 적어도 그 애에게 기대는 하지 않게 했어야지! 포장이라도 잘 하던가. 그렇게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날것의 관계였다면. 솔이가 주변 사람들에게, 하물며 제일 가까웠던 나에게조차 분명한 글자로 단 한 단어, 한 문장을 고백하지 못하게. 왜 그렇게 만들었어? 왜 솔이에게 그렇게 흐릿하게 굴었어? 왜!”

이제껏 남자의 몸이 적어내려간 모든 글자가 형체없이 흐느적거리다가 공중으로 날아갔다. 적어도 그순간, 내 말들이 수많은 탄산 방울들이 되어 그의 심장을 쓰라리게 찔렀길 바랐다.

몸으로 적는 글자. 연습실 벽에 붙은 그의 발표회 포스터를 향해 일회용컵을 던졌다. 아직 다 녹지 않은 사각 얼음들이 사방으로 튀듯 날아갔다. 내 친구 솔이는 자신의 몸에 선명한 글자 하나 남기지 못했는데. 그 모르는 글자 하나를 더 새기려다가 이젠 탄산 없는 맹물이 되어 버렸는데. 그것도 모르고 탄산을 떨쳐낸 사각 얼음은 미끄러지며 바닥에 자꾸 알 수 없는 글자를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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