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진 판타지

이 공간은 어디로 이어지는 거죠?

by Boradbury

이 공간은 어디로 이어지는 거죠?

너는 그 작은 구멍을 공간이라고 불렀다. 바다의 질감을 닮은 구멍. 그 구멍. 몸집이 큰 내겐 구겨넣을 감정이 없어 지나치기 쉬운 것이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눈높이가 달라 벽의 음영 정도로 취급될만한 것이었다. 그런데 넌 마치 연극 무대 커튼 뒤를 궁금해 하는 어린 아이처럼 눈을 반짝였다.

없던 기억은 머릿 속에만 없을 뿐, 때론 몸의 다른 부위들이 그걸 기억할 때가 있다. 처음 바닷물에 찰박이던 내 작은 발이 갑자기 카펫 바닥을 뚫고 쑥 튀어 나왔을 때 그랬다.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느끼는 바다의 질감은 다소 낯설기도 해서 난감할 때가 있다. 바로 지금처럼. 난 장르를 뛰어넘는 이야기의 중간 부분을 설명하기라도 하려는 듯 네게 그 공간에 대해 입을 열었다.

시간을 탕진한 사람은 볼 수 없는 공간인데... 용케도 찾아냈네.

시간을 탕진한 사람? 재밌네요.

너는 두려움이라곤 전혀 읽을 수 없는 표정을 얼굴에 붙이곤 그 공간의 입구에 머리부터 집어넣었다. 푸른 곡선을 타고 네 몸이 사라졌다.

전시장은 입구서부터 난해해 관람객들의 원성을 샀다. 다른 전시장으로 이어지는 엘레베이터 옆 자리, 그 벽에 설치한 비밀의 문. 지도에는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입장권과 함께 받은 지도를 주머니나 가방에 바로 쑤셔 박았다. 그러다보니 그들은 판타지관 전시를 못 보고 돌아가거나 그나마 찾으려고 노력한 이들은 직원들의 도움으로 문의 위치를 알아내곤 했다. 전시를 준비하며 박물관 측에선 여러 차례 이 부분에 대한 시정을 부탁했지만, 난 여전히 판타지는 시공간의 구분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허연 벽을 밀어 문을 열고 나면 그 안은 유럽 어느 시골에나 존재할 것 같은 큰 성벽이 보이고, 우거진 숲 안으로 들어가면 지금껏 보거나 듣지 못했던 것들이 줄지어 오감을 자극한다. 철장 안에 갇힌 용의 코고는 소리가 제법 크게 전시장을 울리고, 벽에는 알 수 없는 문자와 그림들로 가득하다. 사람들은 새로운 규칙과 환경에 점차 익숙해져 간다. 시간이 아주 조금만 지나면 사람들은 처음 보는 공간의 이름들과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들을 입에 붙여 내뱉는다.


시간을 탕진한 난쟁이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지. 시간이 똑딱똑딱. 난쟁이의 시간은 음음음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몸이 움직이지 않아. 나는 시간을 탕진한 난쟁이. 시간이 똑딱똑딱. 내 시간은 음음음음.


엄마의 목소리가 바닷물에 찰박거리던 내 발소리를 끌어안고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그때부터 이미 엄마는 내게 시공간이 다른, 어떤 세계에 대해 말하고 있던 건 아니었을까? 그게 내 상상력의 첫 조각이 되었을지도.

그녀가 들어간 공간의 바깥쪽, 곡선의 벽을 따라 걸었다. 카펫 위를 천천히 걷는 발이 걷는 내내 젖은 소리를 냈다. 찰박찰박.

여기 좀 보세요. 이 안엔 계단이 있고, 2층으로 이어져 있어요.

벽을 타고 오른 푸른 곡선의 끝에서 네 목소리가 들렸다. 한껏 달뜬 네 얼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작게 내쉬는 거친 숨소리만이 벽 안 네 위치를 알려줬다.

이게 무슨 소재죠? 벽이 굉장히 차갑고 부드러워요. 내부에도 그림이 그려져 있고요. 모르고 그냥 지나쳤으면 어쩔 뻔 했어요? 이렇게 멋진 공간이 있는 줄도 모르고.

그러다가 감정도 탕진하겠어. 너무 흥분하진 마.

감정을 탕진한다고요? 정말 재밌는 표현이네요. 당신 오늘 좀 이상해요. 자꾸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고.


감정을 탕진한 왕자는 소중한 눈물을 잃었지. 슬프면 뚝뚝뚝뚝. 왕자의 눈물은 음음음음. 눈물이 흐르지 않아.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 나는 감정을 탕진한 왕자. 슬프면 뚝뚝뚝뚝. 내 눈물은 음음음음.


다음 해에 바다에 갔을 때, 엄마는 우리와 함께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난 엄마의 노래를 개사해 불렀다. 더는 맨발로 바닷가를 걷지 않았다. 이제 엄마는 나와 다른 시공간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내 소매와 바지는 점점 짧아져 갔다.

좋은 시간을 너무 한꺼번에 쓰지 마. 그리고 너무 좋은 감정도 한꺼번에 쓰지 말고.

네? 뭐라고요? 벽 때문에 잘 안 들려요. 다시 한번 말해 줄래요?

미안해.

네?

의사에게서 내가 엄마와 같은 병에 걸렸다는 말을 들었다. 난 이제 엄마의 시공간으로 옮겨질 것이고, 너와는 다른 시공간에 사는 사람이 될 것이다. 네가 내 시공간으로 이어진 이 작은 구멍을 찾아낼 수 있을까? 하지만 영원히 그것을 찾지 못하길, 그래서 바다도 가고 맨발로 찰박찰박 걷기도 하고 노래도 부를 수 있기를 마지막 소원으로 빌어본다.

미안해. 정말 아주 많이.

난 이제 시간, 감정 그리고 너에 대한 모든 사과를 탕진하고 바다의 질감을 좇아 발길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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