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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radbury Jan 02. 2024

나는 턱시도를 입는다

나는 그 정밀한 품격을 입고 싶다

    입고 싶은 옷이 생겼다. 카탈로그를 넘기다가 나도 모르게 눈길이 머문다. 빛도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이탈리아산 고급 공단은 모델의 몸을 타고 검은 폭포처럼 떨어져 내린다.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너비와 길이가 맞춰져 있다. 품은 주먹 하나 들어갈 만큼 넉넉해서 답답해 보이거나 반대로 처져 보이지 않는다. 소매 길이는 은빛 시계를 덮을 만큼만, 바지 길이는 발등을 가리지 않을 만큼만 내려와 있다. 그 어떤 화려한 무늬나 액세서리를 곁들이지 않았지만 그것으로 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의 배경은 한옥 담벼락이다. 그마저도 예스러운 분위기를 옷에 더한다. 그래서인지 그 옷엔 아직 내가 경험하지 못한 우주의 시간도 담겨 있고 과거의 시간도 겹겹이 덧입혀져 있다. 누가 이렇듯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정밀한 품격을 만들어 놓았을까. 

    한국에서 난 늘 옷을 고르는 데 애를 먹었다. 팔, 다리 길이는 짧았고, 어깨너비는 좁았다. 세 아이를 낳고는 더 힘들어졌다. 불어난 몸은 이 시대가 원하는 체형이 아니라는 듯, 주위는 온통 내가 입을 수 없는 옷들로만 가득했다. 큰 사이즈를 판다는 곳에서 산 옷도 날씬한 모델을 앞세워 카탈로그 사진을 찍었기 때문에 실제로 입어보면 내가 생각하던 것과 아주 달랐다. 그렇다고 전 세계 옷이 다 그런 건 아니었다. 한 예로 독일에서 산 바지는 그나마 길이가 맞아 꽤 오랫동안 아껴두고 입었다. 미국에 와선 다행히 길이나 어깨너비, 사이즈가 맞아 선택의 폭이 넓어지긴 했다. 그런데 그것도 뭔가 모르게 불편하고 어색했다. 밑위가 짧거나 가슴이 너무 파였거나 통이 크거나 그 외에 다양한 이유로 또다시 옷 쇼핑을 그만뒀다. 

    우리는 프레타포르테 시대를 살아간다. 기성복이 주는 편리는 언제든 바로 사 입을 수 있다는 점에서 온다. 물론 고급 기성복도 많다. 선택의 폭도 넓다. 어쩌면 내 체형이 ‘보통’이라는 기준에 잘 맞았더라면 그 편리가 주는 불편을 모르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구매평에 달리는 수많은 댓글이 그것을 반증한다. 길이가 생각보다 짧아요, 길어요. 사이즈가 좀 크게 나왔어요, 작게 나왔어요. 심지어 이런 댓글도 있다. 가격 대비 그럭저럭 괜찮아요. ‘그럭저럭 괜찮은’ 옷을 입는 우리는 진짜 괜찮은 걸까. 혹시 사회적 보편성을 가지려는 심리는 아닐까. 사람들 속에서 튀지 않고, 섞여 들어가려는 성질. 그건 마치 고르게 깔아놓은 잔디밭 위에 핀 한 송이 민들레와 같다. 사람들은 결국 이 불편한 비통일성을 견디지 못하고 그것이 더 번지기 전에 재빨리 뽑아버릴 것이다. 각자의 머리를 들지 말고 국으로 숨죽여 살란 뜻인지. 

    난 그 머리를 곧게 쳐들었다. 오트쿠튀르를 입고 싶어졌다. 마스터 테일러가 정성껏 내 어깨너비를 재고, 가슴둘레와 허리둘레, 엉덩이둘레를 재고, 등 길이와 다리 길이를 재서 내 몸에 딱 맞는 옷을 만들어 준다면 어떨지 생각했다. 내 어깨가 넓으면 넓은 대로, 팔, 다리가 길면 긴 대로, 체격이 크면 큰 대로 나에게만 온전히 맞춰진 옷. 그건 불편하지도 어색하지도 않을 것이다. 내 취향과 생각이 담겨 다른 이로 하여금 내가 누군지 보여줄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맞춤복을 고집하는 나를 보며 유별나다고 할지도, ‘적당히’ 좀 살라고 그게 좋은 거라고 강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각자의 존재는 원래 유별나다. 전 세계 칠십억이 넘는 사람들은 각기 다르다. 

    같을 수 없으니 자꾸 프레타포르테 방식을 강요한다. 때론 공공의 선이나 이익을 위해 짜인 틀이 필요하긴 하다. 기성복에 몸을 맞출 때도 있어야 한다. 같은 유니폼을 맞춰 입어야 소속감이나 공동의식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우리의 숨겨진 개성은 기성복에 맞춰질 수 없다. 마음껏 표출되어야 한다. 길이도 너비도 재조정되어야 한다. 각자의 몸에 맞게 그만큼 정성을 들인 옷을 입어야 한다. 기성복보다 맞춤복이 비싼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에게 맞춰진 옷을 다른 사람은 절대 입을 수 없기 때문이다. 소비자가 한 사람이니 당연히 그 가치와 가격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 

    카탈로그 사진 아래에 작은 글씨로 ‘맞춤 정장 여성 턱시도’라고 상품명이 적혀 있다. 남성의 전유물 같이 느껴지던 턱시도라는 단어가 여성에게 입혀지니 독특한 느낌을 준다. 그런데 뒷맛이 씁쓸하다. ‘여성’이란 기성복을 입던 습관때문일까. 나도 모르게 아무런 거부감 없이 입었던 기성복들. 또다시 그 편리가 주는 불편이 가슴께를 날카롭게 긁어내린다. 하지만 그건 오트쿠튀르를 향한 나의 첫걸음이 어색해서일 뿐이다. 낯선 시선들이 나에게 쏠릴 테지만 그건 나름 내 작전이 잘 통하고 있다는 증거다. ‘옷이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이 있다. 내게 딱 맞는 검은색 턱시도를 입으면 그 옷은 나를 어디로 데려갈까.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갈까. 

    카탈로그 모서리를 세모지게 접는다. 언젠가 그곳에 들를 날을 고대한다. 종로 북촌의 이 층 작은 공방. 뒷마당에 있는 백 년 된 소나무를 바라보며 그 시간만큼 대를 이어 온 마스터 테일러를 향해 두 팔을 수평으로 뻗는다. 나는 그 정밀한 품격을 입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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