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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radbury Jun 04. 2024

암흑의 지문(指紋)-1

6시 정시 입장. 10분 전 도착 필수. 늦지 말 것.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다시 감았다. 눈을 감았는데도 마치 뜨고 있는 것만 같다. 처음으로 눈을 감는 게 더 낫다는 생각마저 든다. 잠잘 때와는 또 다른 편안함. 그런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 눈꺼풀을 지그시 눌러 내린다. 처음엔 좀 무겁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확실히 레스토랑을 들어가기 전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난데, 분명 내가 맞는데 또 다른 사람이 된 듯. 그건 마치 옷을 뒤집어 입은 것 같은 느낌이다. 


# 오리엔테이션



   여기서 봅시다.  6시 정시 입장. 10분 전 도착 필수. 늦지 말 것.  -A로부터-



    장난기가 느껴지기도 하는 답장이었다. 얼른 시계를 올려다봤다. 시계의 작은 바늘은 이제 막 숫자 ‘5’를 넘기고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판결문 식의 답장에 안면 근육이 떨렸다. 그러나 곧 마감일이었다. 더구나 그를 인터뷰한다는 건 모든 언론사를 통틀어 처음이다. ‘뿅’인지, ‘짠’인지 도대체 어느 쪽에 방점을 찍어야 할까. ‘짠’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만 왠지내 기분은 ‘뿅’에 가까웠다. 그냥 느낌이 그랬다. 

    지하철로 이동하면서 급하게 질문지를 적어 내려갔다. 늘어나는 질문만큼이나 초침은 더 빠르게 달려갔다. 이럴 땐 정말이지 머리 위에 페르마타를 달고 싶다. 그런 부호를 달아서라도 달리는 시간에 발을 걸고 싶다. 시간과의 달리기 시합에서 이겨본 적은 없지만, 매번 그것을 소망하는 습관은 아직도 어쩌지 못했다. 그런 건 언제나 이렇게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새로 개통된 지하철역들은 왜 이렇게 계단이 많은가에 대해 심각한 고찰을 찰진 욕으로 대신했다. 목에선 풍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내가 원래 이렇게 욕을 잘했었는지 새삼 감탄하면서 끝도 없는 계단을 수행자처럼 올랐다. 점점 ‘뿅’이분명하단 확신이 들었다. 빌어먹을.


    내겐 인터뷰에 대한 징크스가 하나 있다. 힘들게 진행된 인터뷰는 결국 건질 것 하나 없이 끝나버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더 곤란한 건 그것을 수습하는 일이었다. 나물 일색인 밥상에 일류요리를 깔아 놓는 건 거의 창작에 가까운 작업이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마추어 같단 소리를 듣게 되니 자연스레 요령만 늘어갔다. 

    지하철역 탈출에 온 힘을 다 쏟은 다리가 자꾸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하지만 균형을 잃은 무릎을 다시 곧게 일으켜 세워야 했다. 아직 언덕길을 더 올라야 하기 때문이었다. 무릎에서 파열음이 났다. 휴대전화를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이십 분 전. 레스토랑이 극장도 아니고, 여섯 시 정시 입장이라니. 심지어 십 분 전 도착 필수. 그건 또 무슨 꿍꿍이, 아니 계략인지. 또다시 입에 잠시 묶어뒀던 찰진 욕이 풀려 나왔다. 제기랄.


    “오리엔테이션 시작합니다. 모두 여기에 집중해 주세요!”

    시간에 맞춰 겨우 레스토랑에 도착한 난 줄의 맨 뒤에 서서 숨을 골랐다. 많은 사람이 좁은 입구 가득 들어차 있었다. 

    “저희 <블라인드레스토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 입구로 들어가시면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혹시나 하고 기대하셨다면 역시나 하고 포기하세요.”

    이곳저곳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내 무릎은 되레 풀썩 꺾였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인터뷰해야 한다는 건가. 그 말은 사진 촬영도 불가능하단 뜻이다. 난 앞에 있던 남자의 소매를 잡아끌며 재차 확인했다. 

    “그래도 조금은 보이는 거죠? 밥은 먹어야 하니까 작은 촛불이라도…”

    “아뇨. 방금 못 들으셨어요? 하나도 안 보인다잖아요. 설마 이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고 오신 거예요? 여기선 모두 어둠을 즐길 뿐이에요.”

    남자는 내 질문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둠을 방해하는 휴대전화, 카메라, 라이터, 플래시 라이트나 잃어버릴 수 있는 귀중품은 모두 여기 보관함에 넣어 주세요.”

    역시 ‘뿅’이었다. 처음부터 ‘짠’을 기대한 것부터가 무리였다. 아무것도 안 보인다면 질문지 또한 들고 들어갈 수 없으니 이미 망한 인터뷰나 다름없었다. 불안했다. 제기랄.

    “A를 만나러 오셨죠?”

    벽에 등을 대고 주저앉아 있는데 웨이터 복장을 한 남자가 내게 조용히 다가와 물었다. 

    “아, 네.”

    “제 어깨를 잡고 따라 오세요. 프라이빗룸으로 모시겠습니다.”

    남자의 시선은 계속 내 쪽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암흑 속에서 식사한다는 것 자체도 이상한 일이지만 손님과 눈도 못 마주치는 웨이터가 일하는 레스토랑이라니. 어쩌면 이게 날 가지고 벌이는 회사 사람들의 몰래카메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단 생각까지 도달했을 때 난 이미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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