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다

키 크는 게 정말 싫어. 옷을 또 사야 하잖아.

by Boradbury

넌 창문 앞 가슴 넓은 의자에 앉았다. 거기서 보는 바깥 풍경은 물속에서 올려다보듯 묘한 기대감을 준다. 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 세상과 저세상은 다른 물질이 되어 질감조차 다르다. 길어진 팔을 뻗어보지만, 그 경계를 감히 넘을 수 없다.

키 크는 게 정말 싫어. 옷을 또 사야 하잖아.


너의 그 말은 깡충하게 올라온 바지만큼이나 지나온 시간을 보여줬다. 작년 한 해동안 키가 얼마나 컸더라? 5cm 정도는 컸을까? 처음 그 바지를 샀을 때만 해도 바짓단이 바닥에 끌리는 게 영 신경 쓰여 그 옷만 유독 손이 가지 않았었는데.

엄마는 바짓단을 수선집에 맡기기보다 밑단 테이프를 사용했다. 언제 또 짧아질지 모르니 매번 다리 길이가 달라질 때마다 테이프를 떼어내고, 다시 길이를 조정해 새로 붙이곤 했다. 그렇게 170cm가 넘어가고, 175cm가 넘어가고, 180cm가 넘어가고 나서야 엄마는 바짓단에 테이프를 갈아붙이는 일을 멈췄다.

창문 앞 가슴 넓은 의자에 앉으면 네 다리가 창문 밖 나뭇가지에 달린 사과처럼 흔들거리다가 겨우 발끝이 닿았다가 카펫에 두 발을 사뿐히 올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가 무릎이 뾰족한 산처럼 올라오게 됐다. 가끔 넌 네 다리가 대롱대롱 매달려 마음껏 흔들 수 있었을 때를 그리워했다. 창문 밖 하늘을 올려다보며 다리를 재빠르게 움직이면 마치 하늘을 달리는 것처럼 온몸이 자유로웠다.


이젠 옷을 새로 사지 않아도 되니 참 좋아.


네 그 말을 들은 엄마는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큰 키만큼이나 높아진 눈높이로 보는 바깥 풍경은 물 속에서 얼굴만 빼꼼히 내놓은 인어공주 같았다. 하늘에서 터지는 불꽃놀이는 창문의 면을 가득 채우고 네 눈도 가득 채웠다.

어느 날은 겨울도 아닌데 함박눈이 내린 날도 있었다. 엄마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 정말 신기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날에 먹으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열대 과일을 꽃무늬 접시에 담아 네 곁에 두고 방을 나갔다. 넌 언젠가 엄마가 중얼거리던 ‘기적’을 말하는 건가 싶어 하늘을 다시 올려다봤다. 일어나지 않을 일이 일어나는 것. 그건 분명 기적일 테니까.


새 옷을 사야겠어. 지금 옷들은 모두 너무 커.

엄만 홈쇼핑 채널을 보며 전엔 사지 않던 실내복을 몇 벌 샀다. 그리고 이번엔 네 허리에 맞춰 품을 줄였다. 양쪽으로 대충 너비를 손가락으로 잡아보고 천을 집어 바느질했다. 엄마가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바람이 불어왔다. 품을 줄여놓은 실내복이 너풀거렸다.

넌 창문 앞 가슴 넓은 의자에 앉고 싶었다. 거기서 보는 바깥 풍경은 물속에서 올려다보듯 묘한 기대감을 준다. 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 세상과 저세상은 다른 물질이 되어 질감조차 다르다. 가늘어진 팔을 뻗어보지만, 그 경계를 감히 넘을 수 없다.

엄마는 네 커진 옷들을 모두 빨아 차곡차곡 개어 놓았다. 방안 한구석에 높이를 더해가는 옷들을 보며 그것들이 창문을 가리고 팡팡 터지는 불꽃놀이를 더는 볼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하늘을 달리듯 다리를 흔들 순 없지만 하루에 30분씩은 의자의 넓은 가슴에 기대어 있을 순 있었다.


인제 그만 사. 내게 더는 새 옷이 필요 없을 것 같아.


그날 넌 엄마가 홈쇼핑 채널을 하루 종일 켜 놓고, 네 실내복을 수십 벌 사는 걸 봤다. 그 후로 며칠 동안 계속 배달되는 실내복의 품을 절반이나 줄이려 바느질하는 엄마의 손가락엔 여러 개의 반창고가 감기기 시작했다. 떨어지면 또 붙이고, 낡아지면 또 붙여가며 엄마는 수십 벌의 실내복을 모두 수선했다. 하지만 네게 그 많은 옷이 필요하지 않다는 걸 과연 엄마는 몰랐을까. 커진 옷들이 이룬 탑 곁에 또 하나의 탑이 쌓여갔다. 한 번도 입어보지 못한 새 실내복들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며 점점 높이를 더해갔다. 창문의 면이 점점 작아진다.

올해 늦봄에도 함박눈이 내렸다. 이젠 윗부분만 겨우 보이는 창문 가득 하얗게 색칠된 세상은 ‘기적’일까. 넌 그 함박눈처럼 다시 다리를 재빠르게 움직여 하늘을 달릴 수 있을까. 엄만 이제 홈쇼핑 채널을 틀지도 않고, 네 옷을 사지도 않았다.

가슴이 넓은 의자를 몇 시간씩 바라보다가 넌 문득 이렇게 중얼거렸다.

옷들이 나를 먹어버릴 것만 같아. 내 손가락, 발가락, 눈동자, 귀, 코, 가슴, 뇌까지 모두 다. 그럼, 내일 아침에 난 다시 눈을 뜰 수 없겠지.

그말에 네 엄마는 굳게 닫았던 입을 열었다.


내일을 위해 살아. 오늘은 이만 접어 두고.

난 너를 바라본다. 키 크는 걸 싫어했던 너. 가슴 넓은 의자에 앉아 다리를 재빠르게 흔들던 너. 함박눈이 내리는 걸 보며 ‘기적’이 일어나길 기대했던 너. 그런 너는, 아니 나는 어디로 갔을까. 난 네가 정말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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