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간 후엔 가을입니다.
1시간 후엔 가을입니다.
올해도 무사히 가을로 전환을 시도한다. 캐플러425b 2세대였던 내 아버지들(더 정확히는 날 구성한 수많은 DNA의 공여자들)은 이 작업에 매우 큰 의미를 뒀다. 지난 날, 지구형 생명체가 거주하는 행성들은 최대한 지구와 비슷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연합해 왔고, 공동 연구를 통해 계절 전환 기술을 공유해 왔다. 그 일을 내가 맡게 되었다는 건 정말 영광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과거의 정보들은 내게 무한한 상상력을 일으킨다. 지식의 전수를 위해 시간과 공을 많이 들였던 지구의 삶은 꽤 낭만적이다. 낭만은 뭘까 고민하던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웃음이 난다. 후에 안 사실이지만 내 DNA 정보를 가만히 살펴보면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현 인류는 궁금하지 않을만한 사항이겠지만 오래된 데이터를 뒤져보는 독특한 취미를 가진 나 같은 인간에게 이건 과거 인류가 땅 속에서 화석을 찾는 것처럼 신비롭고 놀라운 일이다.
DNA를 가위질해 재조합하기 이전 세대들은 인간이 가진 무수한 생체적 문제를 평생 받아들이며 살았다고 한다. 물론 현 인류가 생체적 문제를 모두 해결하진 못했고 새로운 문제들이 생겨나곤 있지만 탄생과 함께 결정되는 문제의 대부분을 해결했다는 점에선 굉장한 이점이라 할 수 있겠다. 아, 그러니까 난 남들이 가지지 않은 놀라운 DNA를 갖고 있다. 난 5HTT 행복 유전자를 받았다. 우리 같은 3세대들은 최근 연구 결과에 의해 이 유전자를 받지 않고 대체 유전자를 받게 됐는데 나의 경우는 특수 케이스였다. 지구가 아닌 행성에선 생존 에너지를 보존하기 위해 감정 소모가 제어된 유전자가 공급되지만 이것이 계절 관리자에겐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듯싶다.
대기권 온도를 섭씨 24.2도에서 14.9도로 재설정합니다.
대기권을 둘러싼 공기 온도가 떨어져 지상에서 보는 하늘이 높아 보이고, 색도 푸르게 변해간다. 아마 나무들은 곧 바삭바삭한 이파리들을 땅으로 쏟아낼 것이다. 물론 청소 담당 로봇들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가을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모두 수거된 뒤 새로운 영양 흙을 겨우내 만들게 되겠지만. 지구와 비슷한 환경을 만든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고, 약간의 오류가 발생하면 시스템 전체를 다 손봐야 하기에 계절 관리자는 행성 가장 높은 곳에 살며 이 모든 것을 내려다 보고 통제한다.
이 어려운 과정이 그 옛날 지구에선 어떻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까 늘 궁금하다. 신의 영역이라는 많은 부분을 넘어선 현 인류에게 아직도 ‘신’이란 풀지 못한 우주 저 편의 총괄 관리자란 생각이 든다. 신은 정말 있을까.
계절의 변화를 생존 수단으로 여기는 이곳 다른 이들과는 달리 5HTT 행복 유전자를 받은 난 꽃이 피고, 초록 잎사귀가 나고, 열매가 생기고, 낙엽이 지고, 눈이 내리는 모든 과정이 낭만적이다. 감정 에너지가 너무 많이 소모된다는 경고 메시지가 종종 뜨긴 하지만 탄생 단계서부터 날 구성한 기질을 스스로 제어하긴 어렵다.
종종 다른 행성 출신자들이 웜홀을 통해 이주해 오기도 하는데 계절을 경험하기 위해서라고들 한다. 아무리 골딜락스 존에 있는 행성들일지라도 그 환경은 매우 다르다. 지구형 생명체가 살 수는 있지만 다른 생명체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그렇기에 여전히 지구에 가까운 환경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과거 지구형 환경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무수한 실험이 진행됐고, 의외로 가장 큰 문제였던 인간 관계적 행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감정 억제 기술이 필요했다. 갇힌 공간에서 많은 인간이 살기 위한 생존 방법이기도 했다.
현 인류가 선택한 여러 개의 행성들은 전쟁을 통해 이권을 다투고 서로를 해하므로 겪게 되는 야만적인 인구 조절방법이 아닌 DNA의 변이를 찾아내어 더 나은 것으로 조합해 내는 기술과 함께 감정 조절 기술도 도입하여 행성 내 적절한 인구수를 유지해 왔다. 하지만 환경으로 인한 변이는 끊임없이 일어나서 연구 대상이 된다. 발견하는 건 기계의 역할이지만 여전히 인간의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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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전 주기가 385일인 이곳에서 계절 전환 기술이 자리잡을 수 있었던 건 가장 지구와 공전 주기가 비슷해서이다. 후에 발견된 일이지만 계절 전환은 인체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지구형 생물체의 생존 환경을 애초에 누가 결정한 걸까. 과거 인류가 숭배했고, 현 인류가 도달하지 못한 창조주의 영역인 걸까. 섬세하고 완벽하게 설계된 시스템을 통해 돌아갔던 계절의 순환. 잘라서 조합할 순 있으나 생성은 불가능한 DNA, 여러 기계들로 비슷하게 구축할 순 있지만 자동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계절, 지우려 했지만 끊임없는 변이를 통해 생겨나는 다양한 감정들.
가을은 특별히 내 5HTT 행복 유전자를 쉴새없이 자극하고 때론 살짝 우울해지는 묘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과거엔 그것을 ‘가을 탄다’라고 했다던데 그 말마저도 낭만적이다. 감정 에너지를 너무 많이 써 수명이 줄어들지도 모르지만 과거 인류가 7~80세를 살고도 행복했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인 것 같다. 계절 관리자인 내게 유일하게 5HTT 행복 유전자를 제공한 내 아버지들은 어쩌면 계절의 전환이 인간의 감정과 가장 닮았고, 그래서 후대에 남겨져야 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언젠가 생존의 문제를 넘어 미래의 인류가 바삭바삭한 이파리들을 밟으며 가을의 행복을 느낄 수 있기를 현 인류를 대표해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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