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어디 있니

또 문을 열고 나갔었다 보구나.

by Boradbury

또 문을 열고 나갔었나 보구나. 홀은 생각했다. 아니, 생각해 내야 했다. 요즘 자꾸 잘라먹는 기억 탓에 머릿속이 듬성듬성 빠진 머리카락 같다. 매일 매 순간 낯선 삶을 산다는 건 새로운 적응이 필요하기에 피곤하다.

가지런히 놓인 신발들을 보며 드는 생각. 크기별로 구분해 봤을 때, 이 집엔 성인 남자가 한 명, 초등학생 정도 되는 여자아이가 한 명 그리고 성인 여자가 한 명(아마도 이건 홀, 자신일 것이다.)이 사는 게 분명하다.

그때, 냄비 뚜껑이 여기를 좀 봐 달라는 듯 요란한 소리와 함께 침을 튀겼다. 홀은 서둘러 소리가 나는 부엌으로 달려갔다. 냄비 뚜껑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버드나무 꽃씨처럼 하얗게 피어오르던 거품이 차분히 가라앉은 후 모습을 드러낸 문어 한 마리. 내가 자숙 문어를 좋아했던가? 홀은 여덟 개의 다리로 머리를 감싸고 마지막을 맞이했을 문어를 조심스레 꺼내 찬물에 담갔다. 뭔가 이런 일이 능숙한 걸 보면 자주 해 먹던 요리임이 틀림없단 확신이 들었다. 홀 자신은 아니더라도 남편이나 딸아이가 좋아할지 모른다고, 그녀는 그 사실을 잊지 않도록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문어의 열기가 가시길 기다리며 다시 거실로 돌아와 여기저기를 살폈다. 창가로 나란히 놓인 화분들을 봤다. 꽃나무의 이름들이 기억나지 않는다. 소파 앞 탁자 위에 놓인 몇 권의 시집과 소설책을 손가락으로 무심히 훑었다.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글귀들에 하품이 났다. 그래, 뭐 남편의 취향일 수도 있지. 홀은 책들을 다시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발코니에 빨래 건조대가 보였다. 빨래해서 넌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오늘 아침에 일어나 빨래해서 널고, 문어를 끓는 물에 넣은 다음, 아주 잠깐 밖에 나갔다 온 것이다. 홀은 이 상황을 대충 그렇게 설명했다. 문어는 살짝 삶아야 한다. 오래 삶으면 질겨진단 걸 모를 리 없을 터. 그렇다면 집 앞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 온 게 아닐까. 홀은 사건을 재구성하는 형사처럼 자신의 시간을 차례대로 맞춰갔다.

사실, 홀은 자신의 이런 증세가 언제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심지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 것인지조차 알 길이 없었다. 그냥 늘 새로우니 그때마다 적응하고 사는 게 아닐까 한다. 그래도 오늘은 다행인 게 문어가 냄비 안에서 까맣게 타기 전에 돌아왔고, 빨래의 상태를 보니, 오랜 시간 바깥을 헤맨 것 같진 않았다.

자기 자신을 새롭게 알아가는 건 번거롭긴 해도 꽤 재밌는 일이다. 오늘도 그렇다. 홀은 집안 정보를 하나씩 수집해 레고 블록을 붙이듯 자신을 만들어 갔다. 가끔 머릿속에 그리던 자기 모습이 프랑켄슈타인에 나오는 괴물 같다고 생각하면서.

도마에 문어를 올려놓고 얇게 썰기 시작했다. 칼질이 나쁘지 않다. 난 꽤 실력 있는 주부임에 틀림없어. 그런 생각이 들자, 조금 전까지 들던 자괴감이 모두 사라졌다. 홀은 접시를 찾기 위해 찬장 몇 군데를 열어보다가 나선형 무늬가 그려진 넓고 큰 접시를 발견했다. 이 어지러운 접시가 뭐가 좋아 샀을까.

어쨌든 그 어지러운 접시에 문어 썬 것을 가지런히 돌려 담고, 이번엔 초장을 만들었다. 고추장은 어디에 있나, 식초와 설탕은? 기억나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영 불편하다. 그렇게 한참을 부엌 곳곳을 뒤지다가 양념통들을 모아둔 레이지 수잔을 만났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둥근 판에서 필요한 몇 가지를 꺼내 적당량을 섞었다. 맛이 제법 괜찮다고, 그녀는 만족했다.

그나저나, 문어 한 마리를 다 삶았다는 건 지금 가족들이 다 집에 있단 뜻인지. 만약 그렇다면, 이제 식사 준비가 다 됐으니 가족들을 불러 모아야 할 텐데. 홀은 또 다른 고민에 빠졌다. 분명히 성인 남자는 남편이겠지? 그럼, 여보라고 불러야 하나. 딸아이는 집에 있나? 오늘이 주말이라면 학교에 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제서야 홀은 이게 보통 난감한 상황이 아니란 결론에 이르렀다. 기억이 나지 않으니, 호칭도 낯설고, 어떻게 그들을 대해야 할지 영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래도 홀은 용기를 내서 방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막 문을 열려는 순간, 먼저 방 안에 있던 사람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을 연 여자아이는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에 다른 방에 있던 남자도 나왔다. 아니, 남자가 아니라 여자다. 그 여자는 곁에 있던 파리채를 들어 홀을 향해 마구 휘두르기 시작했다.

누, 누구세요? 왜 남의 집에 들어온 거예요? 어, 얼른 나가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홀은 도망치듯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달리고 달리다가 길가에 서 있던 트럭에 올라탔다.


또 문을 열고 나갔었나 보구나. 키까지 꽂아놓고 간 걸 보면 운전하다가 급해서 잠시 화장실에 다녀왔나? 홀은 차 문을 닫고 운전을 시작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일단 출발했다. 오늘도 홀은 나 자신을 찾기 위해 열심히 헤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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