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사회 문제를 들어 글을 쓰는 데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
여섯 살 난 조카가 카드놀이를 하잔다. 한쪽 면엔 나라 이름이, 다른 쪽 면엔 그 나라를 상징하는 그림과 단어가 있다. 카드를 하나씩 들어 그림을 보고 나라 이름을 유추해 맞추는 간단한 놀이다. 조카는 눈을 가늘게 뜨며 턱을 약간 치켜들었다. 어디 한번 덤벼 보라는 듯.
도전자는 포기할 기색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용감하게 받아줄밖에. 결국 소매를 걷어붙이고 몸을 앞으로 기울여 앉았다. 첫 번째 카드를 든 아이는 캥거루 그림을 보고 단번에 오스트레일리아라고 외쳤다. 다음은 내 차례였다. 자유의 여신상 그림이었다. 내가 미국이라고 외치자, 아이가 이번 건 너무 쉬운 거 아니냐며 볼멘소리를 냈다. 하지만 그 후로는 쉽지 않았다. 아이는 제 엄마와 국기 카드를 공부했던지라 나라 이름을 줄줄이 외쳐댔지만, 난 보츠와나, 라트비아, 산마리노 같은 생소한 나라 이름을 만나며 점수 차가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아이는 턱을 한껏 더 추어올렸다. 그리고 다음 카드를 집어 들었다. 뼈가 앙상한 아기 그림이었다. 아이는 부르기도 힘든 ‘에티오피아’를 또박또박 말했다. 그런데 그 카드를 앞뒤로 몇 차례 뒤집어 보던 아이가 그림 아래에 적힌 단어를 가리키며 내게 물었다.
고모, 에티오피아에서는 아기를 거꾸로 기아라고 부르나요?
함구령이 내려진 것처럼 입을 닫았다. 두 단어 사이에 이렇게나 큰 감정이 숨어 있는지 몰랐다. 답을 기다리는 아이의 두 눈을 잠시 미뤄두고 에티오피아 카드를 지그시 바라봤다.
많은 나라가 자신들의 자랑스럽고 아름다운 문화유산, 자연환경, 인물, 동물 등을 소개할 때 넌 어쩌다가 기아로 나라를 소개하게 되었니? 에티오피아에 되묻고 싶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이 나라의 이름을 그리 잘 알게 되었을까. <<타인의 고통>>에서 수전 손택은 빈곤 포르노(Poverty Pornography)에 대해 ‘고통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낱말 카드를 만든 출판사가 다른 그림을 사용했더라면 어땠을까. 가령 커피 같은 것 말이다.
춘천에 갈 때마다 들르는 곳이 있다. 이곳이 고향인 엄마의 손을 잡고 어릴 적부터 드나들던 곳으로 당시엔 제대로 발음하지도 못했던 커피숍의 이름, ‘이디오피아집’이다. 처음 지었던 그 이름 그대로 간판을 사용한다. 과일 주스를 마시다가 몰래 홀짝거리던 커피는 지금의 내 커피 취향을 만들었다. 대형 커피 브랜드가 즐비한 시애틀에 살고 있지만, 난 여전히 산미가 느껴지는 에티오피아 커피를 좋아한다.
한국 전쟁 시 에티오피아 황제는 자신의 근위병을 보내어 돕도록 했다. 그들이 싸웠던 곳이 춘천 지역이기에 이곳에 기념비를 세우고 두 나라의 교류를 위해 커피숍을 만들어 자국의 품질 좋은 원두를 제공해 왔다는 설명은 읽을 때마다 감동으로 다가온다.
그 후로 한국 경제는 발전했지만, 에티오피아는 심각한 내전과 오랜 가뭄으로 점점 더 가난해졌다. 우린 종종 이런 말을 한다. 전쟁 후 한국은 에티오피아보다 못 살던 나라였는데 이제는 경제 강국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국제 구호 개발기구(NGO), 월드비전, 국제연합(UN)에선 이 나라를 소개할 때마다 비쩍 마른 기아의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그 영향으로 우리는 점점 더 에티오피아에 최빈곤 국가라는 얇은 옷만 입혀 기억 속에서 내몰아 버렸다.
빈곤 포르노와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의 뿌리가 같다고 하는 건 무리일까. 남의 불행을 보고 안도하며 쾌감까지 갖는 인간의 심리가 내게 없다고 장담할 수 없다. 남이 불행해진 것을 보며 상대적으로 난 그렇게 살지 않아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은 비단 가난에서 그치지 않고, 장애, 실업, 인종 차별 등의 문제로 확대된다. 그래서 난 사회 문제를 들어 글을 쓰는 데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 겉으론 나와는 맞지 않는 글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그 무게를 감당하기에 내 글 그릇은 작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내 부족한 재주가 풀어내기엔 너무 무겁고, 아프다. 자칫 시답잖은 한 줄로 값싼 동정이나 깊은 마음의 상처를 주게 될까 두렵다.
고모, 에티오피아에서는 아기를 거꾸로 기아라고 부르나요?
아프리카 땅을 한 바퀴 크게 날아 다시 조카와의 카드놀이로 돌아왔다. 지그시 바라보던 카드를 내려놓고, 기아가 무엇인지 간단히 설명했다. 감정을 넣지 않고 담담히 사전적 정의만 말해주자, 아이는 더 묻지 않았다. 이해해서인지, 이해를 못 해서 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크게 관심을 느끼지 않아서인지 모를 일이지만 어느 쪽이든 아이의 이해를 구하고 싶진 않았다. 언젠가 다시 에티오피아를 떠올릴 때, 산미가 느껴지는 향기로운 커피나 지구 반대편의 작은 나라를 돕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아름다운 마음으로 기억하길 바란다.
난 이제 그 나라에서 기아가 거꾸로 그냥 평범한 아기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하며 다음 카드를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