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

혹시 오해하실까 봐...

by Boradbury

“혹시 오해하실까 봐 미리 말씀드리는 건데요. 제가 오늘 아침에 운동하러 나갔다가 풀숲에서 엎어져서 이런 거거든요.”

그녀가 운동화에 묻은 진흙을 물티슈로 닦아내며 말했다. 사실 그녀가 옆에 와 앉은 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늘 그렇듯 한가한 시골 버스 정류장에 앉아 유튜브를 보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진흙 묻은 물티슈를 아무렇지도 않게 의자 밑으로 던져 넣었다. 바로 옆에 휴지통이 있는데도 뭔가에 지친 듯 자리에서 일어서고 싶지 않아 보였다.

“아, 그리고 이것도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 건데... 제가 그림을 좀 그려요. 이것도 오늘 작업하다가 물감이 좀 묻은 거예요.”

이번엔 그녀가 소매를 접어 올리며 말했다. 얼핏 보니 하얀 셔츠 소매에 빨간 자국들이 군데 군데 보였다. 갑자기 휴대전화를 쥔 손이 축축해졌다. 저 멀리 지평선으로 떨어지는 해가 벌겋게 주위를 삼키는 것 같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다음 버스가 언제 오는지 확인했다. 아직도 34분이나 더 기다려야 한다. 그녀와 함께.

“혼자 왔어요? 여기 사람들 잘 안 다니는 곳인데.”

“네? 아, 아뇨. 곧 친구가 올 거예요. 제가 좀 일찍 왔어요.”

나도 모르게 거짓말이 튀어나왔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녀의 눈이 내 얼굴서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훑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하려고 해도 마음과 다르게 몸은 점점 더 뻣뻣해졌다. 이런 내 생각을 그녀가 몰라야 할텐데.

“음... 되게 내 스타일이다. 대학생? 혹시 누구 닮았다는 소리 안 들어 봤어요? 약간 박보검 닮은 것 같은데.”

“아뇨. 그런 말 들어본 적 없는데요.”

난 그녀가 말도 끝내기 전에 꼬리를 자르며 답했다. 그리고 더는 내게 말을 걸지 않기를 바랐다. 사위가 어두워져 가는데 좀처럼 외진 길이어서인지 지나가는 차도 없었다. 그저 주변을 휘돌아가는 바람 소리와 아주 멀리서 들리는 들풀 스치는 소리가 주변을 더 스산하게 만들었다. 누군 이런 상황을 낭만이라고 부르고 싶겠지만 내 머릿 속은 그녀의 운동화와 소매로 가득차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이 여자는 과연 뭘 하고 온 걸까. 물을 수도 없는 질문이 자꾸 가슴을 방망이질했다.

“제 그림 보실래요? 오늘 그려서 아주 따끈따끈한데.”

그녀는 갑자기 백팩의 지퍼를 열어 그안에 있던 것들을 좁은 의자 위에 늘어놨다. 어린 애들이나 들고다닐 법한 플라스틱 공주 거울과 빗, 강아지 캐릭터가 그려진 천 필통, 먹다 남은 사과 반쪽 그리고 제법 큰 주방용 칼.

“어...어...”

입에서 어떤 멀쩡한 단어도 나오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그랬을 수도 있고, 반대로 뭐라고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입이 멋대로 의미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아, 오해하지 마세요. 간만에 장이 섰길래 갔다가 좋은 칼이 나와서 하나 산 거니까. 집에 있는 칼이 영 안. 들어서요. 이건 칼날을 평생 안 갈아도 되는 거라 해서 샀어요. 보세요. 날이 잘 서 있죠?”

나도 모르게 엉덩이를 뒤로 빼 의자 끝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뻣뻣하던 몸이 이젠 부르르 떨려오기까지 했다. 그녀가 이 떨림을 눈치채지 말아야 할텐데. 하지만 그녀는 내 이런 모습이 우스운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다가 다시 칼을 칼집에 넣어 내려놨다.

“아, 여깄네.”

그녀는 작은 스케치북을 꺼내어 몇 장 넘기더니 내 무릎 위에 올려놨다. 꽃그림이었다. 아마도 산속에 있는 야생화를 그렸을지도.

그제야 그녀를 차근히 쳐다봤다. 어깨를 조금 넘긴 검은 생머리,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 옷 군데군데 묻은 흙, 나이에 맞지 않게 거칠어 보이는 손, 그녀의 몸에 비교해 커 보이는 검은색 가방까지. 여자 혼자 이 시간에 인적없는 시골길에서 그녀는 뭘 했던 걸까. 정말 그녀의 말처럼 운동을 하다가 넘어졌고, 들로 나가 야생화를 그렸고, 장터에 가서 주방용 칼을 산 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곳, 버스 정류장으로 온 것일까.

“혹시... 오해할까 봐 그러는데... 제가 그쪽이 절대 마음에 들어서 드리는 건 아닌데요. 그냥 음료수가 몇 개 남아서요. 이거 하나 드실래요?”

그녀는 갈색병에 든 비타민 음료수 하나를 내 앞에 수줍게 들이밀었다. 커다란 나무가 허리 숙여 나를 내려다 봤다. 주위를 맴돌던 바람도 숨죽이고 날 바라봤다. 그녀의 눈은 기대에 차 있었고, 내 눈은 촛점없이 비타민 음료수 병을 내려다 봤다. 버스 도착 시간이 다시 40분으로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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