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앞에서

이름을 대라고!

by Boradbury

이름. 하지만. 그래, 그 이름이 괴상한 꼬리를 달고 있었단 말이지. 갈고리 정도는 아니고, 수풀 틈 작은 도깨비풀이 묻은 것처럼 떼어내고 싶은 군소리. 알캉은 시원하게 터지고, 베토벤은 때려 부수는 맛이 있잖아. 그런데 이건 완전히 오리너구리야. 사방에서 붙이고 싶은 말들을 주둥이에 붙이고, 꼬리에 붙이고, 발바닥에 붙이고. 그러다가 말이 막히면 독침을 쏘고, 전기까지 뿜어대는 만능 치트키.

사실 돼지고기와 김치처럼 평범하게 잘 어울리는 것 같다가도 젖꼭지는 없으나 젖을 먹입니다, 와 같은 문장 표현의 부조화가 두피를 야금야금 파고든다랄까. 어릴 때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포테이토헤드에 눈, 코, 입을 제대로 붙이면 재미가 없잖아. 거기에서부터 내 창작욕이 시작됐을지도. 그런 나를 바라보는 엄마의 얼굴이 포테이토헤드보다 더 우스꽝스러웠어. 결국 창조주에게 깨끗하게 완패를 인정하고 밤새 이불 속에서 잠재울 수 없는 증기를 뿜어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게 그렇게 화날 일이었나?

이름을 말하라고 했지. 하지만. 내가 흥이야항이야할 입장은 아닐지라도 의식의 흐름에 따라 그 이름 뒤에 붙는 모든 부정문을 칼질해 버리고 싶긴 해. 성격이 그래. 뭐든 꼬리가 붙으면 더 크게 자라기 전에 죄다 싹둑싹둑 잘라 다시는 어깨만 으쓱하는 그 건방을, 젠체하며 올렸다 내리는 저 눈썹을 보지 않으려는 거지.

버린 줄 알았는데 포테이토헤드가 여기 서랍 속에 있었네. 그런데 그거 알아? 포테이토칩은 얼마나 얇게 감자를 써느냐가 관건이거든. 반대쪽 물체가 보일 정도의 얇기. 속일 수 없는 투명도가 되었을 때에야 겨우 소비자의 입안에서 바삭, 하고 경쾌한 환호를 올릴 수 있는거야. 여기서 중요한 건 ‘속일 수 없는 투명도’야. 그러니까 변명하지 말라고.

그 이름의 평생은 변명이란 도상을 걷고 걸어 종국엔 깎아지른 벼랑 같은 불신에 매달리고 말겠지. 날 떠난 그녀가 그랬어. 입만 열면 구미호처럼 도대체 몇 개의 꼬리를 토해내는지. 숨 다 죽은 파절이마냥 알코올로 속만 게우고 있는데 날선 칼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탓에 그 늘어지는 군소리를 모조리 다, 이 가슴으로 받아냈다고. 등 뒤로 늙은이의 트림 소리를 내는 문짝은 또 어찌나 가늘고 긴 꼬리를 달았는지 목구멍에 걸려 완전히 닫히지도 않더군.

그때서부터였을 거야. 그 이름이 싫어진 건. 배부른 투정이래도 좋아. 아니, 잠깐만. 그게 왜 배부른 투정인 거지? 늘 이런 식이야. 네 더러운 양말을 내 속옷과 같이 빨지 말라고. 흙먼지 묻고 통풍도 안 되어 고린내가 폴폴 나는 양말과 중요한 부위 보호를 위해 입는 속옷 정도는 구분해야 하지 않겠어? 섞지 말 것, 섞이지 말 것. 그게 내 신조라고. 그 이름에선 정말 참을 수 없는 고린내가 나는군.

억울해? 그래, 억울할 수도 있겠지. 이 세상 모든 건 그에 맞는 자리와 위치가 있는 거니까.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시선도 눈높이도 달라지는 법. 상황에 따른, 순발력 있는 처신이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정체를 알고 나면 어색하게 붙인 말들이 한 번 붙으면 잘 떨어지지 않는 도깨비풀처럼 매우 곤욕스러울 거야. 사소한 변명의 군소리들이니까.

가장 소름 돋는 게 뭔 줄 알아? 알량한 공손체로 상대를 설득시키려는 저급한 변론술. 그 이름의 무기는 일말의 동정심, 피해의식과 열등감에서 끌어다 놓은 자기합리화, 재활용할 수도 없는 자존심이야. 봐, 뭐 하나 멀쩡한 게 있나. 비싼 포장지를 썼다 뿐이지 다 어그러지고, 개성없는 강남 미인들 뿐이잖아. 속내가 숨겨질 수 있을까. 착각하지 마. 한 두 번만 반복해도 금세 꼬리를 밟힐 걸. 변명의 행간엔 힌트가 넘치니까.

빨리 이름이나 대. 이름이 뭐냐고. 하지만. 묵비권 같은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는 사양이야. 내가 안 했어요, 그건 모두 오해예요, 이딴 거짓말도 금지야.

저기요, 제 이름이 ‘하지만’이라고 몇 번을 말합니까? 성이 하, 이름이 지만이라고요. 여기 담당 경찰 좀 바꿔 주세요. 아주 술냄새가 진동합니다. 무슨 술주정을 경찰 조사하면서 한답니까? 경찰이 이러면 이거 업무태만 아니에요?

난 네 이름이 싫어. 그 뒤에 붙은 꼬리가 싫어. 오늘에야말로 그 괴상한 꼬리를 잘라버리고 말거야. 속일 수 없는 투명도, 내가 절대 잊지 말랬지? 내 눈엔 다 보여. 그런데 오늘따라 눈꺼풀이 너무 무겁네. 눈을 뜰 수가 없어. 그래, 꼬리를 자를 거야. 자르긴 할 건데... 하지만! 오늘은 너무 졸려우니 내일 하는 걸로 하자. 굳나잇.

20230509_220837.jpg


keyword
이전 19화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