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유성 한 조각
2019년 9월 30일.
형사사법포털에 남아 있는 나의 고소 기록이다.
이 사건의 피고소인은 나의 둘째 삼촌이었다.
본래 피의자는 2명이었다.
하지만 초기 수사 단계에서 ‘친족상도례(형법 328조 1항)’ 규정으로 인하여 두 번째 피고소인은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최근 연예인 박수홍 씨의 문제로 인하여 알려진 친족상도례 규정.
2024년 6월 27일, 모 언론사의 보도에 따르면, 무려 71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숱한 가정폭력 피해자들을 울리고 난 후에야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그, 혈족이라는 가면 속의 악인들을 위해 존재했던 제도.
이 글에서 굳이 숨길 것이 무엇이 있을까.
그렇다. 나 또한 2019년도 사건 접수 당시, 두 번째 피고소인으로 나의 어머니도 신고했지만, 위의 잘못된 제도로 인하여 어떠한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가족 간 발생하는 재산 범죄, 즉 가정폭력 중 경제적 학대의 문제가 점차 가시화되면서 이 제도에도 변화가 생긴 것이다.
내가 글의 서두에 이 내용을 먼저 앞세우는 이유는 명확하다.
더 이상 나와 같은 그리고 또 다른 경제적 학대의 피해자로 알려진 유명인들과 같이, 더는 우리와 같은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이 사회에서 늘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법의 변화를 통해 부디 많은 사람들이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
이제는 진정으로 피해자들을 위하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앞으로 더 많은 법과 제도가 개선되길 소망한다.
이 사건의 시작은 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때 당시 내가 고소장에 적어놓은 기록에 의하면, 내 자신의 모습은 마치 멋모르고 밭만 갈다가 갑작스레 나타난 늪에 발이 빠져 그 안으로 속절없이 끌려 들어가는 한 마리의 소처럼 연상되는 내용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들에게 옴짝달싹 할 수 없이 붙들려 버린 날짜는 2009년 5월 13일이었다.
그해에 나는 아직 대학생이었고, 나의 어머니의 소개로 인하여 어머니의 친구가 운영하던 학원에서 사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소개였기 때문에 학원 내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더욱 아무 말하지 못한 채 꿋꿋이 참아야만 했다.
나의 어머니는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학원의 원장님과 사회에서 만났지만, 서로 반말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근한 친우였다. 그래서 자신이 원장님과 친구라는 관계를 이용하여,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시간 동안에 학원 원장님에게 부탁해서 어머니 본인의 일까지 함께 처리하도록 지시할 때가 잦았다.
그러한 형태로 내가 학원에서 처리하는 업무는 매번 과중될 때가 많았지만, 나는 그 부분에 대하여 어떠한 문제도 제기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의 그 태도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의 부모로부터 ‘순종성’을 강요당하며 성장해 온 또 다른 가정폭력 문제하고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내용은 추후 다른 내용에서 다루어 보기로 하겠다.
어쨌든 나는 그날도 학원에서 성실하게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고, 나의 어머니로부터 갑자기 다급한 전화를 받게 되었다.
“수아야, 지금 바쁘니?”
“어, 엄마. 조금. 왜?”
“수아야, 큰일 났어. 둘째 삼촌이 자살하려고 했어.”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네가 도와줘야 해. 안 그러면 삼촌이 진짜 큰일 날지도 몰라.”
“뭐라고?”
“삼촌이 곧 너 있는 학원으로 갈 거야. 내가 원장한테는 전화해 놨으니까, 너는 삼촌이 네 학원 건물 밑에서 전화하면, 바로 따라가서 삼촌이 시키는 대로 해.”
큰일 났어. 삼촌의 자살. 네가 도와주지 않으면. 큰일 날지도 몰라.
아직 대학생이자 아르바이트생이었던 나에게 있어서는 꽤 충격적인 말들이 어머니의 입으로부터 전해졌고, 결국 나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삼촌의 차를 탄 후 행정복지센터, 은행 등 여러 기관들에 따라다녀야 했다.
나는 가정이나 학교에서 경제 교육을 철저하게 받고 자라지 못했다.
어떤 부모들은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에게 저축 통장을 시작으로 기본적인 경제 교육도 시켜준다고 들었지만, 나는 그런 경험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20대 중반까지도 수표가 은행으로부터 추적당하기 때문에 불법적인 일에 사용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사실도 몰랐다. 사실 이를 알게 된 것도 나의 어머니로 인해서였고, 그때도 어머니로부터 ‘넌 그런 것도 몰랐냐.’며 타박을 들으며 배워야 했다.
나중에서야 들었던 생각이지만, 아이들에 대한 경제 교육은 가정에서도 그리고 학교에서도 철저히 해줘야 한다고 단언한다.
어쨌든,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예측할 수 없었다.
그저 어머니의 말만 믿고 어린 마음에 삼촌을 걱정하는 마음만 앞섰다.
그로 인해 삼촌이 시키는 대로 내 CMA 통장을 해지하여 내 전 재산을 삼촌에게 주고, 나의 인감증명서도 발급받아서 주고, 인감도장도 갖다 찍어주고, 삼촌이 소개해 준 은행 직원 앞에서 난생처음 지장이라는 것도 찍어봤다.
그 당시 삼촌이 어떤 말을 했더라. 자세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다만, 나를 이곳저곳 데리고 다니던 삼촌의 표정과 내 옆에서 여러 차례 반복했던 말 한마디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나를 자신의 자동차 옆자리에 태운 삼촌은 그저 언제나처럼 ‘해맑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더란다.
“삼촌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금방 끝나.”
사실 삼촌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 통장을 해약하는 일부터 삼촌의 건물이 갑자기 내 명의로 이전되며 삼촌의 빚까지 내 앞으로 옮겨지는 상황까지, 그 모든 업무가 단 하루 만에 일사천리로 마무리 됐기 때문이다.
또한, 삼촌의 그 말처럼 내 20대의 평화도 그날을 기점으로...
정말 완벽하게 막을 내려버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