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유성 한 조각
가정폭력 피해자. 어느 순간부터 내게 붙은 수식어가 되었다.
내 스스로가 가정폭력의 피해자이며, 그 사실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또 수긍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심리학의 아버지 프로이트가 했던 말처럼.
우리 인간이 일상적으로 인지하는 의식이란 고작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며, 무의식은 물속에 잠긴 아주 거대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가 가정폭력 피해자라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나는 삼촌의 사업에 얽매이는 사건을 계기로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있었던 문제들을 더욱 가시적으로 직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가족에 대한 주제로 받은 심리상담의 기간만 장장 10년이 넘었다. 한 주도 빠지지 않고 받게 된 건 이제 막 5년이 좀 넘는 것 같다.
하지만 분명 나는 10년 전부터 간간이 개인상담이나 집단상담을 통해 진심으로 ‘살고 싶어서’ 몸부림쳐왔다. 가족들로 인해 내 수입은 안정적이지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나 자신의 자기 치유를 위해 노력해 온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나의 실화를 글로 옮겨 본다.
다만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상담을 받았음에도 나의 이야기를 온라인에 올리는 과정에서 작게 꿈틀대는 두려움은 여전한 것 같다. 마치 채 빼내지 못한 가시의 일부가 내 손톱 아래 박혀서 나의 온 신경을 자꾸 깔짝깔짝 건드리고 있는 것처럼. 다양한 걱정들이 나의 밤잠을 편치 않게 만들기 시작했다.
아마 한 명이라도 가정폭력 피해자를 만나본 사람이라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느끼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책감과 죄의식은 상상 이상이다.
또한 심리 정서적으로 상당히 취약했던 상태가 꽤 장기간 지속 되어왔기 때문에 그 모든 걸 단숨에 떨쳐내기란 결코 쉽지가 않다.
사실 피해자들은 잘못한 것이 없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가해자로부터 가스라이팅을 당해왔기 때문에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고백하는 순간조차도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 이야기 속의 내 모습이 너무 바보 같이 보일까 봐.
만약,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오히려 나를 믿어주지 않고 비난할까 봐.
내가 이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했다는 걸 가족들이 알게 되면… 또 쫓아와서 못살게 굴까 봐.
여러 부정적인 사고에 금방 잠식당하기 때문에 자신의 피해 사실을 주변에 고백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 또한 브런치에 익명으로 글을 쓰고 있음에도 불안감에 휩싸이는 건 쉽게 떨쳐내기가 어렵다.
하지만 본래의 결심대로 이 글을 꼭 끝까지 써보고 싶다.
더 이상 아무 잘못도 없는 내가 도망치고 숨어야 하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기에...
다시 힘을 내어본다.
돌이켜 보면, 그 당시 나의 어머니는 분명 수상한 낌새가 있었다.
대학생이 되고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라는 것을 경험해 본 나는 그 비용을 모으기보다는 쓰는 데 급급했다.
그로 인해 어머니로부터 비난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내게 명령하길, 앞으로 내가 버는 아르바이트 비용은 거의 전액 모두 저축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말을 순순히 따랐다.
지금 쓰면서 생각이 난 거지만, 그 상황도 사실 잘못된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재산이랄 것까지도 사실 없지만, 내가 가진 모든 금전의 내역을 어머니가 철저히 확인하고 관리 감독했던 상황. 어머니의 이런 행동은 내가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지속됐고, 내가 잠시 공직 생활을 하게 됐을 때는 나의 공무원 신분을 이용하여 자신에게 필요한 급전을 대출받아 달라고 부탁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내 스스로가 가정폭력 피해자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지한 후부터는 나 또한 어머니에게 경계를 세우기 시작하며, 더는 나의 재산 상황을 어머니에게 공유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어머니는 쉽게 그만두지 않았지만, 상담을 받은 효과로 인하여 나중에는 어머니가 더 이상 묻지 않게 되었다. 남들은 나의 이런 반응에 대해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겠지만… 내게 있어서는 내 자신이 어머니에게 그렇게까지 저항할 수 있게 됐다는 작은 변화 하나가 무척 자랑스러운 성취였다.
어쨌든 나는 어머니의 말에 순종적인 딸이었고, 그때부터 지출을 거의 하지 않은 채 모든 아르바이트 월급을 내 개인 CMA 통장에 저축하기 시작했다.
때는 2009년이었고, 그 당시 공무원 봉급표를 보면 비교가 되겠지만.
그때 내 주변에 대학을 가지 않은 채 바로 취업을 한 친구들이 세금을 제외하고 받는 급여가 월 110만 원이 조금 넘을 때였다. 물론 내 주변 친구들이 한국인의 전체적인 평균을 대표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한 기억은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각자의 기억에 맡기는 게 더 좋을 듯하다.
다만 그 당시 나는 최저시급이 4천 원 정도인 상황에서 월 55만 원의 급여를 받으며, 앞서 설명했던 바와 같이, 나의 어머니의 친구가 운영하는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리고 꾸준히 돈을 모아서 총 550만 원의 저축을 달성했다.
그때 내 나이는 22살이었고, 내 인생에서 가장 큰돈을 스스로 모았다는 사실에 뿌듯함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나의 어머니는 내 곁에 고요히 잠들어 있던 아귀 같은 존재였고, 그때의 나는 그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머니가 물음에 아무 저항 없이 대답했던 것이다.
“수아야 너 얼마 모았어?”
그렇게 묻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실로 다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하회탈처럼 제대로 휘어진 눈웃음으로 자신의 속내를 감춘 채, 마치 일상의 질문인 양 평범하게 물어오는 어머니의 의도를 전혀 눈치챌 수 없었다.
“나? 500만 원 좀 넘을걸?”
“응… 그렇구나…”
“왜?”
“아니야. 그냥 엄마 말대로 저축 잘하고 있나 궁금했어.”
“어. 그때 엄마가 앞으로는 저축하라고 뭐라고 했잖아. 그래서 그때부터 계속 모았어. CMA 통장에 넣어두면 좋다길래 거기에 넣고 있어.”
이제 막 대학생이 된 나는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티를 채 벗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나 엄마 말 잘 들었어. 잘했지?’라며, 마치 칭찬을 바라는 듯한 아이처럼 자랑스럽게 그리고 투명하게 모든 걸 이야기했다. 그게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모르고…
“그래, 잘했네. 그거 아빠도 알아?”
“아빠? 아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내 통장인데?”
“으응, 아니야. 원래 그런 건 아빠고 누구고 절대 말해주면 안 돼. 남한테 말하는 거 아니야.”
“응. 알았어.”
사실 그 ‘남’이라는 단어에는 우리 어머니도 포함되어 있었지만, 그때 당시 나는 나의 어머니에게 감히 ‘미움’이라는 단어를 붙여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말에 담긴 모순을 알아챌 수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후에야, 심리상담을 통해 나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며, 당시 내 행동의 근본적인 문제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때 내가 얼마나 나의 부모의 사랑에 목말라 있었는지… 어리석기 짝이 없던 시절이었기에 온전한 형태의 사랑을 주지 못하는 부모에게 목을 매고 있었던 것이다.
‘착한 아이 콤플렉스(Good boy syndrome)’
가정폭력의 피해자들이 뛰어넘어야 하는 증후군 중 하나를 지닌 상태로 말이다.
그래서 나는 왜 자꾸 나의 어머니가 '너 얼마 모았어?'라고 물어보는지 몰랐고,
그 반복되는 질문에 대하여 어떠한 의문도 품지 않았다.
그저 엄마 말을 잘 듣고 칭찬받는 착한 아이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세 명의 삼촌이 있다. 아니, 있었다.
큰삼촌은 내가 어렸을 때 질병으로 사망했고, 둘째 삼촌과 막내 삼촌만 남아 있었다.
다른 사촌 동생들은 당시 아픈 몸 때문에 항상 인상을 쓰고 있던 큰삼촌을 무서워했지만, 나는 큰삼촌을 꽤 좋아했다.
커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사실 나는 편견이나 선입견이 거의 없는 아이였다.
그로 인해 상대방이 인상을 쓰고 있다고 해도 그게 나를 싫어해서 혹은 무섭게 하려고 하는 것이라는 느낌은 받지 않았던 것 같다.
그저 내 눈에 큰삼촌은 항상 몹시 아파 보였고, 그 와중에도 조카들이 외갓집에 가면 맛있는 음식이나 간식거리들을 잔뜩 챙겨 주시는 고마운 어른이었다. 나는 그렇게 나를 챙겨 주던 큰삼촌을 자연스레 좋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고, 그 때문에 어린 마음에도 큰삼촌의 건강을 무척이나 염려했던 감정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결국 큰삼촌은 질병을 이겨내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나야 했고, 그 사건에 대한 슬픔은 내가 성인이 된 순간까지도 남아 있었다.
그래서 나의 어머니가 ‘네가 도와줘야 해. 안 그러면 삼촌이 진짜 큰일 날지도 몰라.’라는 말에 몹시 심장이 쿵쾅댔던 것 같다. 무엇보다 ‘자살’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자기 자식을 소중히 대하는 방법에 서툴렀던 나의 어머니는 언제나 단어 선택에 거침이 없었고. 특히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이루려고 할 때, 유독 정확하게 나의 약한 부분을 파고들 수 있는 단어들을 과감하게 투척하곤 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나의 어머니에게 있어 나는 언제나 월척이었을 것이다.
언제나 내 깊은 무의식까지 비집고 들어온 어머니의 강렬한 단어들은 어머니의 의도대로 내 정신 상태를 맘껏 헤집거나 들쑤시며 혼란스럽게 만들고는 했다. 그러다가 어머니의 목적이 달성되면, 내가 어떤 상태인지와는 상관없이 유유히 사라지는 것이다.
언어를 이용한 정서적 학대는 그게 무서운 것 같다.
외형적으로는 어떠한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하지만 피해자를 지배하고 자기 마음대로 조종하거나 휘두르는 건 한순간이다. 그러한 면에 있어서 나의 어머니는 그런 점이 무척 능수능란했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결국 어머니의 말 때문에 잔뜩 경직되어 있던 나는, 나의 어머니가 지시한 대로 삼촌이 잘못되면 안 된다는 일념 하나로 삼촌을 따라다니며 시키는 대로 했다.
순식간에 내가 모은 전 재산을 삼촌에게 건네주고, 삼촌이 거래하던 은행에 가서 삼촌이 시키는 대로 인감도장만 찍었다. 삼촌은 허허허 웃는 낯으로 내가 서류를 채 읽어보기도 전에 빠르게 넘기며, ‘여기. 여기에 찍으면 돼.’라고 후다닥 도장만 찍게 유도했다.
“뭐 볼 것도 없어. 그냥 빨리 도장만 찍어주면 끝나. 빨리하고 집에 가야지.”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제 진짜 끝났나 하며 어깨에 힘이 살짝 빠지려던 순간, 믿을 수 없는 말이 내 귓가에 꽂혔다.
“이제 건물이 조카님 거라는 말이죠? 그럼 지금부터 이 대출금은 조카님이 갚으시는 겁니다.”
대출금. 빚. 그에 대한 매월 이자는 40만 원 조금 넘짓.
그제야 정신이 번쩍하고 들었다.
융자금이 가득 끼어 있는 건물 하나가 내게로 옮겨온 것이다.
돈을 잃는 것뿐만 아니라 빚쟁이까지 되어버렸다.
삼촌이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돈을 삼촌에게 건네는 자체는 크게 아깝지 않다고 느꼈지만, 빚이 주어진다는 사실은 그 당시 내게 있어 너무나도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직원의 말을 듣고, 다시 서류를 제대로 보고, 내 생에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빚이 전부 내 앞으로 옮겨진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은행의 소란스러움이 내 귓가에 서서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몹시 당황했지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우선 집에 가서 어머니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운전을 하는 내내 계속 시끄럽게 떠드는 삼촌의 말 중 그 무엇도 제대로 이해하며 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한창 사업을 하고 있던 삼촌의 건물이었다는 내용은 부분적으로 들리긴 했다.
그래서 떠올려 보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삼촌이 처음 그 건물을 매입하고 가족들을 초대했을 때 나도 잠깐 본 적은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후에는 한 번도 찾아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건물의 모습은 전혀 기억해 내지 못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이 부분은 훗날 이 문제에 있어 아주 큰 암초 같은 존재가 되어버리고야 만다.
본론으로 다시 돌아와서.
어쨌든 사업이 망해가던 삼촌은 결국 사채에까지 손을 댔고, 그로 인해 그 건물이 헐값에 넘어가게 생겼다는 것이었다. 사업에 눈이 멀어 모든 돈을 탕진한 것도 모자라, 당시 9천만 원이 좀 넘는 가치를 갖고 있던 건물을 고작 2천만 원이라는 사채 때문에 홀랑 넘길 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그 당시 나는 삼촌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 ‘사채’라는 단어에도 충격을 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맨날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보던 불법적인 일이라고 들었는데, 그걸 내 가까운 가족이 손을 댔다는 이야기가 놀라웠다.
그래서 계속 몸이 굳고 경직된 상태가 유지된 채 집에 도착했다.
운전은 삼촌이 했고, 관공서나 은행 등이 모두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거리에 있었지만, 당시 내 심정은 ‘간신히’ 집에 도착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나여야 했을까.
몹시 늦었지만, 그제야 불현듯 그 상황 자체에 대해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갑작스레 내 삶에 던져진 건물로 인하여 나는 몹시 혼란스러웠고, 누구라도 좋으니 그 상황을 제대로 설명해 주길 바랐다.
결국 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다급하게 어머니를 찾았지만, 그날따라 어머니는 본래 있어야 할 시간에 그 자리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집에서 밖에 있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고, 어머니는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평온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러고는 그저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지금 엄마고 이모들이고 막내 삼촌이고, 누구도 그 부동산 명의를 가져갈 사람이 없어.”
“그게 무슨 소리야… 다들 직장 다니고 돈 벌잖아….”
“이 맹추야! 엄마랑 이모들은 남편들이 있는데, 너네 아빠고 이모부들이고 다들 가만있겠냐? 너네 삼촌 건물 뺏어 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럼, 막내 삼촌은? 막내 삼촌은 돈도 잘 번다며!”
“막내 삼촌은 막내 외숙모가 있잖아. 거기도 막내 외숙모가 틈만 나면 이혼한다 뭐 한다 난린데 지금 그럴 틈이 어딨어. 거기다 막내 삼촌은 이미 둘째 삼촌 다른 빚 막아 주느라고 외숙모 몰래 모은 돈도 다 털었어! 근데 그것까지 어떻게 해! 넌 막내 삼촌이 진짜 이혼당하면 좋겠어?”
내 귀를 날카롭게 찌른다고 느껴질 정도로 어머니의 언성은 점차 높아졌고, 그 대화의 내용 중 일부는 나에 대한 비난 섞인 말들도 당연하다는 듯 섞이기 시작했다. 당시 어머니로부터 쏟아지던 ‘이래서 네가 뭘 모르고 멍청하다는 거야.’라는 폭언들은 너무 오랫동안 들어온 말이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그 부분에 있어 커다란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또한 내가 어머니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듣지 않으면 마치 외갓집 식구들 모두가 큰 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말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거지만, 전형적인 가스라이팅(gaslighting) 화법이었다.
마치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는 것처럼.
너무 어렸을 때부터 부모로부터 무시 어린 평가들을 듣고, 모든 게 내 탓인 것처럼 원망하는 말에 세뇌당해 있다 보니, 성인이 되어서도 그 말들의 심각성을 전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 당시 답답하고 황망하여 울 것 같았던 나는.
점차 막말의 수위가 높아지고 있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가만히 들으며, 이미 여러 번의 경험을 통해 뼈저릴 정도로 너무 잘 알고 있던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 이제 엄마한테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무슨 짓을 해도… 도저히 안 되겠구나.’
모든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그저 온몸에 힘도 쭉쭉 빠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여기서 물러서면 안 된다’라는 느낌을 받았는지, 없는 힘을 최대한 그러모아, 쥐어 짜내는 듯한 목소리로 마지막 항변이라도 하듯 재차 말했다.
“그럼 나느은…!”
“…….”
잠시 어머니는 아무 말이 없었고, 그 침묵에 불안감을 느껴야 하는 건 나여야 했다.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음에도 물밀듯 밀려오는 후회와 자책감에 휩싸여야 하는 것도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그리고 어느덧 숨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 듯한 전화기에 대고, 연신 ‘엄마’를 찾으며, 절실한 심정으로 매달려야 하는 것도… 왜 때문인지 나여야만 했다.
그렇게 두세 번 더 애타게 부르고 또 찾았을까.
“일단 기다려 봐. 넌 갖고만 있어. 삼촌이 사업 잘되면 다시 갖고 올 거니까.”
심지어 그 건물이 온전한 내 것도 아니란다.
순간 나의 모든 사고와 호흡, 시간조차 멈춘 것 같았다.
내가 전혀 사용할 수 없으며, 재산적 가치도 없고, 그저 빚덩이인 건물 하나에 내 명의가 붙었단다.
그렇게 자기 할 말만 내뱉은 어머니는 자신의 역할은 다 끝났다는 듯 끊는다는 말도 없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철저하게 무심한 처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