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유성 한 조각
내가 나의 가족들과 인연을 끊은 지는 조금 됐다.
추석과 설날 같은 명절, 크리스마스, 나의 생일 등… 거의 모든 가족들과 함께할 만한 행사를 나는 이제 오롯이 홀로 맞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냥 외롭지는 않다. 때때로 친구나 연인, 지인 같은.
피가 섞이지 않았어도 그들보다 좋은 사람들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온전히 그들 덕분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과거에는 몇 차례 실패했지만, 최근에서야 결국 가족들과의 인연을 정리하는 데 성공하고야 만 내 자신에게 스스로 대견하다 말해주고 싶다.
어떤 분이 내게 말해준 것처럼, 결국 가족도 시절 인연이라고…
그 말이면 내겐 충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악몽에 시달릴 때가 있다.
꿈속에서 나는, 나를 쫓아오는 가족들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고는 한다.
학교, 집, 공원, 강 등. 그들이 갑자기 나타나서 나를 쫓아오는 장소는 실로 다양하다.
가정폭력 피해자 트라우마.
그 증상으로부터 아직 나는 완전한 자유를 얻지는 못한 상태이다.
실제로 과거에도 내가 가족들과 인연을 끊기 위해 결심하고 연락처를 바꾼 채 잠적했을 당시.
나의 어머니가 내가 진료받는 병원까지 쫓아온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회사를 다니던 중,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한 달 넘게 자궁 출혈을 했고. 결국 자궁근종 수술을 해야 했다. 마침 나의 병원에 동행했던 어머니가 나의 수술 후 진료 날짜를 나 몰래 저장해 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나를 다시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병원 진료를 마치고 나오자마자, 병원 복도에서 내 쪽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를 마주했던 순간.
채 가눌 수 없는 몸을 벽에 기대어 울며, 나는 그렇게 또 울어버렸었다.
"왜 연락을 끊고 그래…."
그렇게 말하며 다가오던 어머니의 모습이 몇 달 새에 너무 많이 야위어 있어서.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라는 말이 뭔지, 그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치밀어 오르는 순간에도 이해가 되더란다.
그때의 경험으로 인해, 내가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한은 그들로부터 온전히 벗어나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현실이 나를 꿈속에서조차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오죽하면 ‘호적 파는 방법’을 여러 번 검색해 봤을까.
남들이 들으면 실소할지도 모르겠으나, 인터넷에 나와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들의 글들을 본 후, 나 또한 부분적으로 마음의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또 다른 면에 있어 씁쓸했던 사실은…
아직도 우리나라의 법과 제도가 가정폭력 피해자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고통에 대해서는 충분히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이었다.
꿈속임에도 나는, 나를 어떻게든 쫓아오는 가족들로부터 필사적으로 도망치며, ‘하지 마!’, ‘싫어’, ‘제발 그만해…!’라며 절규에 가까운 외침을 하고는 한다. 꿈이기에, 목소리가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만큼, 크게 외쳐지지도 않기 때문에. 그 꿈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고역일 수밖에 없는 악몽일 뿐이다.
그러다가 꿈에서 깨어나면, 땀에 흠뻑 젖은 상태이거나, 변하지 않는 내 방 안의 고요한 풍경을 보며, 끝을 알 수 없는 절망감에 사로잡히고는 한다.
‘내가 왜 살아 있을까…’
가족들과의 인연을 완전히 끊어내지 못했을 때는 ‘나를 왜 낳았어’라며 울부짖었고.
가족들과의 인연을 끊고 혼자가 된 이후에는 홀로 있는 방에서 나의 존재의 이유에 대하여 끊임없이 내 자신에게 질문을 하고는 했다.
나는 인간의 인생이 마치 터널에 들어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내가 들어선 컴컴한 터널의 끝이 어디인지, 도저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이제는 빛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게 맞다,라고. 나 스스로를 믿기로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이 기록을 남긴다.
무엇이든 시작이 가장 어렵고, 도둑질도 처음이 어렵다는 말이 있던가.
어쩌면 내가 너무 쉽게 그들에게 나의 전 재산을 내어줬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삼촌의 건물을 내가 받은 후부터 내게는 또 다른 고난과 역경들이 펼쳐지기 시작했고, 그 선봉에는 당연하다는 듯 나의 어머니가 있었다.
처절한 나의 외침을 너무도 손쉽게 무시해 버린 나의 어머니.
그녀는 점차 내게 더한 요구들을 하기 시작했고, 당시 너무 큰 충격을 받기도 했지만, 경제적 문제에 대한 개념 또한 너무나도 무지했던 나는 계속해서 어머니의 정신적 지배 행위에 속절없이 휘둘리고야 말았다.
삼촌이 사업을 하는 건물의 명의자를 나에게로 옮긴 후, 어머니는 한시름 놓았다고 생각했는지 상당히 평온해진 모습이었다. 그리고 또다시 내게 다음과 같은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건물 대출금 이자는 신경 쓰지 마. 그건 삼촌이 내기로 했어. 삼촌이 그 건물에서 계속 사업해야 하니까, 사무실 월세 대신에 그 이자를 부담하기로 했어.”
“넌 아무것도 신경 쓸 거 없어. 어차피 조금 있으면 삼촌이 새로운 사업 따서 바로 가져갈 거야. 넌 그냥 네 삶에 집중하면 돼.”
“수아야. 너 태어났을 때 생각해 봐. 그때 둘째 삼촌이 동전들을 잔뜩 모아 왔어. 엄마도 아빠도 돈이 없어서 널 낳았는데도 퇴원도 못하고 있었는데. 삼촌이 친구한테 말해서 동전들을 잔뜩 갖고 온 거야. 그 친구도 돈이 없었대. 그래서 네가 이렇게 멀쩡하게 태어날 수 있었던 거야. 그니까 넌 삼촌한테 잘해야 해.”
삼촌의 건물은 2층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삼촌은 그 건물을 통째로 사용하며 월 40만 원의 이자만 부담하겠다고 했다. 그 건물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중에 삼촌이 새로운 사업을 따서 돈을 벌면, 내 전 재산이었던 550만 원을 내게 돌려주고, 그 건물을 다시 가져갈 것이라고 계속해서 얘기했다.
무엇보다 나의 어머니가 여러 차례 강조한 내용은 과거에 내가 막 태어났을 때 삼촌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내가 그 은혜를 갚을 때가 됐다는 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엇하나 말이 되는 소리인가 싶은 내용들이지만, 그 당시 나는 아직 대학생이었기 때문에 한 없이 미숙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신적으로 너무 큰 충격을 받은 상태이다 보니 혼란스러움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어머니의 저런 말을 반복해서 들을 때마다, ‘그런가?’라며 온전한 사고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나의 어머니의 비정상적인 요구는 점차 강요로 변질되기 시작했고, 다음과 같은 기이한 말도 서슴지 않았다.
“수아 너 알바 월급날이 언제야?”
“월급. 내일모레인데… 왜?”
“너 월급 받으면 통째로 아빠한테 보내야 해.”
“내 월급을? 왜?? 다 보내야 한다고?”
“응. 삼촌 건물 사는데 사실 네 돈으로는 부족했거든. 그래서 네 아빠가 돈을 빌려줬어. 그니까 네가 갚아야 해. 이제 네 건물이잖아.”
“…그럼 나는? 난 뭘로 생활해…?”
“아빠한테 네 돈을 보내. 그럼 엄마가 그 돈을 그대로 너한테 줄게. 그러면 됐지? 넌 아무것도 손해 나는 거 없잖아.”
“…?? 일단 알았어…….”
내가 낮잠을 자고 있거나, 오전에 일어나기 직전. 혹은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정신이 없거나, 대학교 과제나 시험 준비 등으로 경황이 없을 때마다. 나의 어머니는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내게 다가와 삼촌 건물에 대한 이상한 요구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무언가 이상한 것 같다고 느끼면서도 그 말을 믿고 따랐다.
하지만 역시는 역시.
나의 어머니는 내가 아버지에게 돈을 이체한 이후에도 적은 금액의 용돈 수준만 딱 한 번 보내줬을 뿐 내 아르바이트 월급만큼의 돈을 돌려주진 않았다.
심지어 나의 아르바이트 내역에 대해 빠삭하게 알아보고는, ‘수아 너, 너네 학원 원장이 부업 갖다 주는 거 있다며. 그거면 충분하지 않아?’라며 모르쇠 했다.
그리고 즉시, 내가 모르는 새에 나의 아르바이트 학원 원장에게 전화하여 내 아르바이트 시간을 늘렸다.
그러고는 마치 나를 위해서 그런 것처럼 내게 이렇게 통보했다.
“수아야! 엄마가 너네 학원 원장한테 얘기해 놨어. 수아 돈 필요하니까 알바 시간 많이 늘려달라고! 아르바이트비도 많이 좀 쳐주라고. 그러니까 원장이 알았대.”
내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학원도 어머니의 소개로 가서 일하게 된 곳이었고, 학원 원장도 어머니의 친구였기 때문에. 어머니로부터 저 말을 들은 직후 학원에 출근하자, 신문을 보고 있던 원장도 내게 이렇게 말했다.
“어~ 돈 필요하다며? 엄마가 전화해서 막 난리네. 그렇지 않아도 수강생도 늘어났고 해서… 나도 수아 씨가 일 더하면 좋지. 다음 달부터 월급도 100만 원으로 주기로 했어. 엄마가 많이 주라고 하도 그래서. 그러니까 열심히 해.”
“네… 감사합니다.”
사실은 하나도 감사하지 않았는데.
내가 그때까지 배웠던 ‘우리 사회’에서의 예절이란, 윗사람이 ‘호의를 베푸는 듯이 말하면’ 아랫사람은 당연하다는 듯이 감사하다고 인사를 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나 또한 그 당시에는 우선 감사하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최대한 열심히 하며, 월급이 들어오는 족족 아버지에게 전액 이체를 해야만 했다.
그러면서, ‘돈이란, 그저 손바닥 위의 모래알과 같구나.’라는 생각을 그 나이에 해야만 했다.
아르바이트 시간을 늘리고 난 후 스트레스도 더욱 급증했다.
무엇보다 전혀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삼촌의 건물이 가장 힘들었다.
어머니는 그 문제에 대해 아무 문제가 없다는 듯 합리화를 하느라 바빴고, 때로는 날 가스라이팅하는 말도 서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문제로는 더 이상 서로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래서 아르바이트 퇴근 후 시간이 날 때마다, 친구들을 최대한 자주 만났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 정신이 온전치 못할 것 같은 본능적 공포로 인해 친구들과의 시간을 최대한 늘렸던 것이다. 사람이 너무 고통스럽고 스트레스를 받으면,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셔도 안 취한다는 사실도 그때 경험했다.
지금 기억나는 한 가지 에피소드는 ‘봉구비어’라는 맥주 전문 술집에서의 일이다.
당시 나는 종류가 다른 병 맥주를 혼자 8병을 마셨고, 뒤이어 2,000CC의 생맥주도 연달아 비워냈지만 정신이 멀쩡했다. 내가 그렇게 마시는 동안, 나는 전혀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 앞에 앉아 있던 친구만 바뀌었다.
그렇게 총 3명의 친구를 바꿔가며 술을 연거푸 마셨지만, 화장실만 자주 갈 뿐 나는 역시 취하지 않았다.
특히, 마지막 세 번째 친구는 직접 집에 데려다 주기까지 했다.
그런 형태로 나는 한동안 내 주변 친구들 모두에게 내가 당한 삼촌의 건물 문제에 대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친구들도 모두 처음 들어보는 일이라며 놀라워했고, 다들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전혀 감도 못 잡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저 나를 위로해 줄 뿐이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내가 당한 가정폭력의 진실을 알고 있던 친구들은 2019년도에 내가 삼촌과 어머니를 고소했을 당시, 직접 ‘증인진술서’를 작성해 주기도 했다. 내 피해가 발생한 시점부터 장장 10년 동안, 멈추지 않고 지속되는 가족들의 잘못된 행위를 보며, 언제나 안타깝게 여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경찰 수사 단계에서는 내 친구들이 적극적으로 작성한 진술서들이 전혀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내 친구들의 증인진술서가 단지, ‘내 친구들’이 작성했다는 이유만으로 수사 과정에서는 그 어떠한 신빙성도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덕분에 나는 매우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가 기대하는 법이란, 실제의 법과 달라서. ‘법’은 진짜 피해자들을 온전히 보호해 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특히, 가정폭력 중에서도 정서적 학대와 경제적 학대가 ‘명확한 증거’를 육안으로 확인하기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법을 통해 전혀 보호받지 못한다는 현실을 말이다.
피해자들은 결국 자신이 진짜 피해자라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버둥대다가 점점 더 지치고 피폐해져 간다는 현실도 말이다.
2019년도에 경찰 신고를 했을 당시, 내가 경찰관들로부터 어떤 수모를 당했는가에 대해서는 조금 더 나중에, 다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나는 더 이상 그 어떤 가정폭력의 피해자도 경찰 수사 단계에서 경찰관으로부터 상처받지 않길 바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