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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덟 번째 유성 한 조각

나는 별이 되고 싶었다.

by 엔키리 ENKIRIE


만약 사촌동생들만 내게 그렇게 함부로 대했다면, 나는 외갓집 식구들에 대해 그렇게까지 상처받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에 듬성듬성 박힌 유리 파편들 같은 상처는 대다수가 거의 외갓집 식구들로부터 박힌 것이었고. 거기에는 사촌동생들 뿐만 아니라, 이모와 삼촌들의 흔적도 있었다.


나에게는 큰 이모와 막내이모, 둘째 삼촌과 막내삼촌이 있는데, 둘째 삼촌은 자신의 사업장 건물에 나의 명의를 묶어놓는 문제로 너무 오랜 시간 나에게 고통을 주었고, 그 못지않게 막내이모 또한 나의 삶 전반에 걸친 정신적 고통을 안겨준 또 하나의 인물이기도 했다. 그 외 다른 두 명에 대한 일화는 소소한 것들이 더 많기에 이후에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어머니는 외갓집 셋째였고, 작고한 큰삼촌과 큰 이모 다음의 형제였다. 그 밑으로 둘째 삼촌, 막내이모, 막내삼촌이 순서대로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상당히 중심에 놓여 있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였는지 모르겠으나, 외갓집 식구들의 대소사를 논의할 때 어머니는 꼭 거기에 빠지지 않았고, 특히 둘째 삼촌의 건물 문제가 발생한 이후에는 큰 이모나 막내이모, 막내삼촌이 유독 어머니에게 연락하여 때로는 어머니의 조언을 듣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여기서 재밌는 사실은 둘째 삼촌에 대한 것인데. 실제로 둘째 삼촌은 사업에 문제가 생겨서 나의 명의를 자신의 사업장 건물에 매여놓기 전까지, 우리 집에 자주 놀러 오거나 찾아온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그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야 우리 집에 자주 찾아와서 했던 말은.


"나는 너희가 당연히 형제들 중에 가장 잘 살고 있는 줄 알았어. 그래서 먹을거나 뭐 좋은 거 있으면, 맨날 큰 이모나 막내이모한테나 이것저것 좋은 거 다 갖다 날랐는데. 그때마다 여긴 들를 생각도 못했네."


한 마디로, 둘째 삼촌은 자신의 사업에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는 우리를 제외한 다른 이모들 집에 더 많이 들르며, 그들과 주로 교류했다는 것이다. 우리 집은 막내이모와 같은 아파트였고, 막내이모가 살고 있던 아파트의 바로 옆 동이었음에도 말이다.


특히 막내이모네 집하 고는 막내이모부와 함께 동업을 하면서 둘째 삼촌과 막내이모네 가족들끼리 해외여행까지 같이 자주 갈 정도로 함께 놀러 다녔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가족은 해외여행은 고사하고 가족끼리 제주도 여행조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지만 말이다.


이에 대해 나의 언니는 분노했고, 또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나는 아직도 기억해. 명절에 외갓집에 갔을 때 둘째 삼촌이 애들한테 다 용돈을 주는 거야. 그래서 나도 당연히 줄줄 알고 서 있었는데. 나하고 수아만 빼놓고 다른 애들만 다 주고 갔어."


나는 전혀 알지도 기억하지도 못했던 기억.

그런데 언니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둘째 삼촌에게 용돈을 받았던 기억은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작 둘째 삼촌의 사업이 어려워졌을 때, 큰 이모와 막내이모는 둘째 삼촌에 대한 불만을 엄청나게 토로했고, 그들로부터 열심히 둘째 삼촌을 보호하려고 나선 사람은 나의 어머니뿐이었지만 말이다.


무엇보다 둘째 삼촌의 사업을 살려보기 위해 그를 돕겠다고 나의 어머니가 나서면서, 어머니 형제들의 불만은 주로 어머니에게 쏟아지기도 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크게 불만을 토로하며 둘째 삼촌을 비난한 건 막내이모였다. 어머니는 그런 막내이모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는 했다.


"너네 막내이모는 맨날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말도 못 하면서 뒤에서 얘기해. 나한테도 맨날 너네 둘째 삼촌 욕을 그렇게 하는데. 정작 너네 둘째 삼촌한테 전화 오면, 어 오빠~ 이래. 그니까 너네 둘째 삼촌은 맨날 너네 막내이모한테 껌뻑 넘어가지."


실제로 그랬다.

막내이모는 자기 자신에 대한 칭찬과 평가는 아끼지 않았지만, 타인에 대한 평가는 박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조카들 중에서도 나에게 그게 심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를 얘기하자면.


"푸핫. 언니 수아 다리 좀 봐."

"…."


나와 어머니, 그리고 언니가 막내이모와 함께 길을 갈 때면, 주로 나와 언니가 앞에서 걷고, 어머니와 막내이모가 우리의 뒤에서 걸었는데. 그때마다 나의 뒤에서 들려왔던 막내이모의 목소리.


"수아는 얼굴은 작은데 다리가 진짜 어떡하냐. 푸하핫"

"풉! 야, 그만 좀 해! 수아 스트레스받아!"

"아니, 사실이 그렇잖아. 어떻게 다리가 유독 저러냐. 하하핫!"

"…."


인신공격에 가까운 비난.

막내이모는 자신의 다리가 예쁘다는 이유로 매번 자신의 조카인 나와 자기를 비교하며, 나의 다리가 굵고 못생겼다고 지적하고 비웃었었다. 그리고 그녀는 전혀 몰랐을 것이다. 청소년기부터 성인기까지, 내내 내 다리를 비웃고 비난했던 막내이모의 행동 때문에 내가 서른 살이 넘을 때까지 긴 바지 혹은 긴치마만 입었다는 걸.


마치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내 다리를 쳐다보거나 못생겼다고 비난할 것 같아서. 그 심적 고통 때문에 줄곧 여름에도 여름용 긴바지를 찾아 입고는 했었다. 반바지를 사더라도 거의 집 안에서만 입거나 저녁 시간대에 입고 나가는 게 고작이었다는 것을.


그녀는 알 수나 있었을까.

자신이 새겨놓은 상처 때문에 너무 아파서, 다 큰 성인이 되어서도 고통받았던 조카의 역사를.

그리고 나의 다리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도, 막내이모의 외모 지적 때문에 강한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렸다는 것도. 한창 심리치료를 받고 난 이후에서야 깨달았고 말이다.


더욱이 슬펐던 건 막내이모의 비난에 동참한 어머니와 언니의 태도 때문도 있었다.


"풉"

"왜?"

"아니. 정말 다리가 굵긴 굵구나 싶어서."

"…."


집에서 반바지를 입고 돌아다닐 때면, 갑자기 들려왔던 비웃음과 비난의 목소리. 그건 어머니였고.


"뭐야? 내 다리를 왜 만져?"

"아니야. 언니는 주물러 주는 거야. 내 동생 다리 좀 얇아지라고."

"뭐?"

"시원하지?"

"…."

"봐! 언니가 이렇게 친절하게 동생 다리도 주물러주고! 정말 좋은 언니지?"

"…."


엎드려 누운 자세로 만화책을 보거나 스마트폰을 하고 있으면, 갑자기 다가와 내 다리를 만지며 자신이 좋은 언니라고 우쭐대던 사람이 나의 자매였다.


여기서 밝히자면, 나는 진심으로 언니가 내 몸에 손을 대는 게 싫었다. 그게 마사지이건 무슨 핑계를 대건 간에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언제나 자신이 나의 머리와 엉덩이를 쓰다듬거나 두들기는 게 언니로서 동생을 귀여워해주는 거라고 우겼고. 때때로 내 다리를 주물러주는 것도 나를 위한 것이라고 뻔뻔하기 그지없었다.


처음에는 나는 그녀에게 여러 차례 거부 의사를 표현했고, 어머니에게도 도움을 요청했지만. 어머니의 반응은 '자매끼리 다정하고 보기 좋다'였기 때문에 내 의견은 자연스레 또 묵살되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결국 체념했고, 빨리 그 시간이 지나가길 바랐다. 언니가 주장하는 마사지를 해준다는 시간.


"그래, 거기 주물러봐. 더 세게."

"거봐! 너도 좋아하잖아!"

"…."

"좋으니까 아무 말도 안 하는 것봐!"

"…."


지금 생각해 보면, 마치 성추행범의 대사와도 같던 언니의 말.

그런 그녀의 직업이 지금은 변호사라니.

나의 부모가 무엇을 키워낸 것일까.


조금 더 덧붙이자면, 막내이모의 나의 다리에 대한 인신공격은 모든 사람 앞에서 한결같았다.

막내이모에게는 세 딸들이 있었는데, 그들 앞에서도 마찬가지였고, 다른 사촌동생들 앞에서도 똑같았다.

그렇게 나는 외갓집 식구들 모두에게 다리가 굵은 아이로 낙인찍혔고, 때때로 그들로부터 비웃음을 살 수밖에 없었다.


나에게 전혀 울타리가 되어주지 않은.

오히려 협조자가 되어준 어머니와 아버지, 언니의 막내이모에 대한 동의 하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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