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괜찮아. 잘했어. 잘해왔어. 슬퍼도 괜찮아. 수고했어. - 아니, 전혀. 나아진 게 없어. 아무것도 한 게 없어. 나에게 변명할 여지를 주지 마.
그녀의 세상에서는, 존재만으로 의미를 갖는 사람은 없다. 그녀 자신도 그렇다. 아무도 아무것도 아니다.
별것 아닌 일에 몸도 마음도 금방 지쳐 버린다. 기대한 만큼 돌아오지 않는 사랑에 내면에서 분노가 일고, 그 분노가 외부로 표출되면 그가 자신을 떠날까 두려워 다시 억압하고, 감정을 억압하느라 우울하고 무력해지는 악순환의 고리이다. 그녀는 스스로를 위로해 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한다.
이렇게 보자면 그녀의 애착형성 과정엔 분명히 문제가 있다. 애착이란 욕망의 대상이 되는 특별하고 유일한 사람과의 친밀하고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자 하는 욕구이다. 그녀는 아무것도 빼앗긴 게 없음에도 박탈당할 것 같은 불안함에 떨었다. 그런 불안함은 오히려 그녀 스스로 자신의 것을 빼앗기도록 내몰았다. 그녀는 박탈당한 애착의 감정을 어떤 식으로든 보상받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어울려 다니고 마음에도 없는 사람에게 사랑받으려 하고 다수의 교제를 허락해 왔다. 그녀가 가진 압도적인 분노와 불안으로부터 감정적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말이다.
그녀가 어릴 적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어둠이었다. 어두운 곳에는 괴물이 살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님이 모두 늦는 날이면 혼자 온 집안의 불을 켜놓고 잠들곤 했다. 그러나 그날만은 달랐다. 그녀는 화장실 불도 켜지 않은 채로 여러 번 입을 헹구었다. 헹구는 동안, 어둠이 무서워서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는데도 말이다. 그녀는 계속해서 불도 켜지 않은 깜깜한 공간에 자신을 가두었다. 왜인지 모르지만, 스스로 벌을 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숨 막힐 것 같은 어둠에 집어삼켜지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남성편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아버지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아버지와 엘렉트라보다 더 깊은 관계였지만 이름조차 남지 않고 심연의 뒤편으로 잊혀 버린 스미르나를 그녀와 비슷하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아주 불행한 점은, 그녀는 아프로디테의 저주도, 에로스의 화살도 맞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녀의 첫 키스의 대상은 그녀의 아버지다. 연인이 나누는 키스가 어떤 의미인지도 모를 나이에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범해졌다. 축축하고 뜨겁고 냄새나는 두터운 혀가 자신의 여리고 작은 입안을 헤집는 것을 어린 소녀는 저항 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다. 달리 무엇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 아버지가 자신에게 무어라 말을 한 것 같지만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아버지는 누구에게라도 좋으니 사랑을 확인받고 싶었던 것 같다. 그래서 고작 자신의 1/3 정도의 인생을 산 어린 소녀에게 몇십 년 동안 쌓아온 자신이라는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이게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전부를 받아들이기엔 그녀는 너무 작고 여렸다. 그 좁은 틈새를 비집고 안간힘을 써서 들어가려고 바둥대는 아버지는 당신이 만든 것이라며 그녀의 육체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더듬는 두껍고 거친 손길의 감촉이 싫었지만 그렇다고 저항하는 낌새를 드러내지도 않았다.
모든 것이 끝나고 소녀는 아버지께 웃어 보였다. 웃는 것 외에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불안한 듯 몇 마디를 건네는 아버지를 향해 소녀는 끄덕이며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것을 허락의 신호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버지가 그때 어떤 생각이었든 소녀에겐 알바가 아니다. 소녀는 단지 얼른 이 찝찝한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다. 소녀는 아버지와 헤어져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입을 여러 번 헹궜다.
"그건... 아버지가 너를 너무 사랑하셔서 그런 거야."
이 말은 어머니 나름의 위로였다. 그녀는 어머니의 말을 곱씹었다. "너무 사랑해서."
정도를 넘치고 너무 해버리고 만 그 사랑이란 건 대체 어떤 걸 의미하는 걸까?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그녀를 사용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불러도 되는 걸까? 그렇다면 사랑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꺾어 자신을 채우는 것을 말하는 걸까? 사랑은 상대방이 고유한 타자라는 인식을 제거하는 걸까? 상대방과의 경계가 무너지고 나면 사랑은 그 잔해 위에 군림하는 걸까?
그녀는 그 말이 하나도 이해되지 않았지만 더 이상의 설명은 들을 수 없었다. 싸늘한 방에서 들리는 것은 오직 메아리치며 점점 고조되는 침묵, 그 커다란 침묵뿐이었다. 침묵은 계속해서 그녀의 귀를 울렸다. 그 공간을 차지하는 침묵이 너무도 컸기 때문에 다른 어떤 소리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결국 그날의 대화는 여기서 끝이 나고 말았다.
그날 밤, 그녀는 꿈을 꾸었다.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던 세상, 사랑이 없는 세상에서 자유롭게 떠도는 영혼이 되는 꿈. 영혼은 날아다니면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커다란 짐을 지우고 그 짐 때문에 목이 졸려 죽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게를 포기하면 편할 텐데...'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절대로 그 '무게'를 포기할 수가 없나 보다. 그들은 무언가에 쫓기는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로부터 들키지 않게 숨는 것 같기도 했다. 두려움과 외로움에서 벗어날 방법은 오직 무게, 무게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무게를 포기했기 때문에 날아다닐 수 있었다. 자유로운 기분을 느끼며, 무게에 쩔쩔매는 사람들 위로 슝하고 지나갔다. 꿈속에서 그녀는 비로소 가벼워질 수 있었다. 모든 기억도 이해도 내려놓고 공허해질 수 있었다. 그녀가 꿈속에서 날아오른 순간부터, 그녀는 어쩌면 단 한 번의 추락도 없이 계속해서 날아가고 있는 상태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언제든지 날아오를 수 있는 표면적이고 가벼운 관계만 유지하려 한다. 누군가는 그녀가 사랑을 피하는 것처럼 보았겠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애초에 그녀가 사랑하려 했던 것은 사랑을 할 수 없는 자신이다. 그녀는 날아오른 순간부터 오직 자신만을 사랑하려 하고 있을 뿐이다.
그녀는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낄 때면 통제할 수 없는 기묘한 흥분 또한 함께 느꼈다. 무언가를 잃어야만 자신이 존재함을 온몸으로 처절하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에 있어서 그녀의 모든 선택은 가벼웠다. 너무나 가벼워서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그녀가 일평생 원했던 바로 그것이다. 가루가 되어 스러질 것 같은 감각, 정말로 그렇게 사라진다면 어쩌면 나는 가장 자유로운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의 눈에 비친 공허함이 어쩐지 사랑스러워 보였다. 자신의 눈에 비친 공허함을 사랑하기 위한 값을 치르기 위해, 평생 동안 그에 마땅한 불행을 겪어 보상해 온 것이라고 해도 납득이 될 것만 같았다. 인간의 본질이 지금 그 채울 수 없는 구멍에 비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