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그로 인해 심한 독감에 걸렸기 때문에, 그는 그녀를 자신의 병원에 데려가고 종국에는 집까지 데려오게 되었다. 자신을 향해 쏘아붙이던 이전과 같은 올곧고 도전적이던 눈빛은 온 데 간 데 없고, 통증으로 인해 지쳐서 가라앉은 눈빛이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모든 걸 바쳐서 그녀를 지탱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지탱해주지 않으면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녀를 보면서, 그녀가 나을 때까지 아주 다정하게 돌볼 책임이 있다고 느꼈다. 그렇게 그는 그녀를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했다.
그의 다정함과 세심함을 누리면서 그녀는 그와의 사랑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그의 손길을 더 받을 수만 있다면 한쪽 다리를 분질러 버려도 상관없다고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그녀는 마음이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이 느낌을 잘 알고 있다. 그를 바라보며 느꼈던 건, 몰입해 읽던 순정만화를 보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그래, 이건 판타지지 사랑은 아닐 것이다. 스스로의 감정을 아무것도 아닌 취급 하는 건 그녀의 전문 분야다. 스스로를 신뢰하지 않는 이는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을 자신에게 절대 주지 않는 법이다. 그녀는 그의 집을 떠났다. 그를 사랑하는 것이 무서워진 것이다. 그녀에게는 속절없이 그에게 빠져들어가 자신을 잃는 것이 가장 두려운 일이다. 그녀는 사실 그와 단절된 이 순간들도 두렵기만 하다. 자신의 나약함을 들키고 싶지 않아 철저하게 숨기고 있지만 그녀는 지금 무너져가고 있었다. 가끔 그녀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아무도 사랑하려 하지 않는 것 같다. 실상 그녀는 사랑 앞에서 그저 도망자에 불과하다.
그의 집에서 머물고 있는 일주일 동안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곳에서 그와 만날 수 있었다. 그가 없더라도 그가 살던 흔적들에 머물 수 있었다. 그와, 그가 남긴 흔적들의 돌봄을 받는 동안 그녀는 살면서 다신 없을 충만한 기쁨을 느꼈다. 그녀가 원한다면, 그에게 함께하자고 제안한다면 그는 기꺼이 그렇게 할지도 모른다. 그는 아마 남은 자신의 온 생애를 그녀를 돌보는데 바치려 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무엇을 바라는 걸까? 그녀가 느끼는 것이 사랑이 맞을까? 그녀는 그저 돌봐줄 아버지를 찾고 있었던 게 아닐까? 환상에 대한 기대감으로 인해 진실을 봐도 깨닫지 못하고 충족되지 못한 좌절감에 허우적거리게 되는 걸까? 그녀는 스스로에게 의문을 가지면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의미를 하나씩 빼내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녀의 내면에서는 아주 위험한 어떤 희롱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때문에 그녀는 정신없는 상황 속에 자신을 밀어 넣고 아주 작은 은유로도 시작될 수 있는 온갖 사랑의 모조품들을 자신의 껍데기에 덕지덕지 바른다. 그녀가 마음속으로 가장 원하는 것은 그이지만, 그녀는 그가 아닌 다른 남자들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거기에는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에는 의미를 빼내어가기 시작하고, 오히려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것에 의미를 부여해 사랑을 체험하려 한다니, 이건 또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과연 누구일까?
모르겠다. 그녀가 가장 사랑하기로 결심했었던 한 사람은 이미 배반하기로 결정한지 오래다. 때문에 지금의 새로운 사랑조차 온전히 새로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녀는 사랑의 무게를 자꾸만 덜어낸다. 사랑에 빠져들수록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만한 행동을 하고자 한다. 금기시된 무언가를 깨면서 안심을 얻으려고 한다. 항상 익숙한 곳에 한쪽 발을, 그리고 낯선 곳에 다른 쪽 발을 걸쳐 놓는다. 그녀는 사랑 앞에 절대로 자신을 완전히 내어 준 적이 없다. 감정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버리는, 스스로를 모두 내어 던지는 그런 감정을 느끼고 싶다고 입버릇 처럼 말해왔던 그녀이지만, 보아하니 막상 기회가 와도 느끼고 싶지 않은 눈치다. 그리고 이렇게 삶의 순간순간에 떠오르는 그를 사랑이라 여기고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착각하고 싶다가도, 사랑이라 여기고 싶지 않은 마음에 스스로 이렇게 질문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이성의 통제를 벗어 나는 일인가? 과연 그런 사랑은 실재하는가? 사랑은 그냥, '선택'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다른 이를 만나고 싶다.'
그녀는 속절없이 빠져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급하게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난다. 상대를 향한 강렬한 열망이 그와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그녀를 끌어당긴다. 그렇게 그녀는 상대와의 관계에서 항상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연애 게임에서는 상대에 대한 여유를 잃는 순간 끝이 결정되고 만다. 지기 싫어하는 성격의 그녀는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변수가 생기는 것이 두렵다. 아, 그게 아닌가? 그냥 그녀는 이토록 나약한 자신을 들키기 싫어 여러 명에게 자신을 분산시켜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그녀에게 가장 치명적인 남자였다. 그녀는 일상에 침잠해 들어오는 그를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길을 걷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그녀는 그를 생각하면 심장이 마구 뛰었다. 참지 못하고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밤, 그녀는 다시 한번 더 위험하다고 느꼈다. 그녀는 그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 몸이 달아올랐으나 그의 앞에서의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기 위해 쌓아 올린 시간을 배반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와의 시간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 차라리 그를 배신하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더 나은 대안이 있지 않을까?'
이건 그녀가 평정심을 유지하려 할 때마다 속으로 외는 주문 같은 말이다. '더 나은 대안'. 분명 그가 최선의 선택이 아닐 것이다. 안달내고 조급해할 필요가 없다. 더 나은 대안을 찾아 떠나면 그만이다. 어차피 가까워지면 그도 별반 다를 것 없는 남자일 테니 그건 틀린 말도 맞는 말도 아니다. 어찌 되었건, 대안은 있을 것이다. 덜 만족스럽다고 해도, 대안은 있을 것이다.
- 왜 그를 배반하면 안 되는 걸까?
그는 너무 좋은 남자다. 그녀에게 있어 그는 완벽한 존재다. 그녀는 그런 그를 상처 주고 싶지 않다. 따라서 다른 이를 만나면서 그녀의 가장 못난 욕망을 해소하고자 한다. 다른 이에게 그녀가 가진 못난 결핍을 풀고 그에게는 최선의 모습만 보여주면 안 되는 걸까?
그녀는 가끔 어찌할 수 없는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이런 식으로 풀곤 한다. 가장 사랑하는 이를 배반하면서 얻는 쾌락. 그게 그녀가 자신을 위로하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그녀는 들키고 싶지 않으면서 들키고 싶었다. 나로 인해 상처받는 그의 표정은 또 얼마나 짜릿할까? 그걸 보고 싶었다.
새롭게 만나는 남자는 그와 비슷한 눈빛을 가졌다. 그 남자에게 끌린 이유는 단지 그뿐이었다. 처음부터 그녀는 그 남자에게 이유 모를 친밀감을 느꼈다. 다른 남자를 만나 그를 잊어가는 것이라 착각하는 우매함이 그녀가 지금 계속해서 다른 이에게서 그를 찾고 있다는 사실을 덮어두고 있다.
"나는 이제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아."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그 외에 다른 사람을 찾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모르고 있다. 다른 사람을 만나도 그녀는 그 사람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와 만나고 있다. 그녀는 이미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