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홀리스,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 큐레이션
내가 맘에 들지 않는다. 자주 후회하고 수치스럽고 자책하는 감정이 든다. 자기 수용이 너무 어렵다고 느끼게 된다. 우리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자책하는 것을 넘어, 심지어 타인의 잘못이거나,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니더라도 자꾸 죄책감이 드는 이유는 뭘까?
내가 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늘 스스로 못마땅해하며 남의 눈치를 보면서 행동하는 사람은 내면의 비판자가 강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초자아가 강한 성향이거나, 부모님의 엄격한 양육방식을 흡수했거나, 예민한 기질을 타고나 부모의 훈육의 크게 손상을 입는 등, 내면의 비판자가 강화되는 이유는 다양하다.
아무리 어린아이들이라도 자신의 뜻과 마음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가 이를 공감해주지 못하고 엄격하게 통제한 경우에 아이는 그 분노를 표출하지 못하고 억누르게 된다. 그리고 그 화를 자기 자신에게 돌려 자기주장과 욕구, 감정이 올라올 때 그 화의 감정을 도리어 죄책감, 수치심으로 느끼게 된다. 그러면 스스로가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사는 것에 대해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끼며 살게 되는 끔찍한 일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감정이 지속되다 보면 부모의 억압과 기대에 맞춰서 살기 위해 자신의 개성과 특성, 욕구를 억누르고 부모에게서 흡수한 초자아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습, 누군가가 원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살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의식하게 된다. 이것이 내면의 비판자이다. 늘 부족하고, 늘 더 노력해야 하고, 늘 스스로를 채찍질하도록 한다. 자신의 모든 권위를 내면의 비판자에게 다 넘겨주게 된 탓이다.
우리는 부모를 그저 나와 다른 성인으로 볼 수 있게 된 후에야
진짜로 성장할 수 있다.
-융
스스로에게 자신의 권위를 찾아주는 일은 인생의 중반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를 성공적으로 해내지 못하면 유년기 경험에 의해 인생 후반부마저 지배당하게 된다. 대부분의 성인들이 많은 시간을 “자기 검열”을 하면서 보낸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모든 대화를 의식으로 끌어올려 따라가 보자. 종종 내 안의 보이지 않은 존재에게 조언이나 허락을 구하지는 않는가? 비판을 하는 ‘나‘는 대체 누구이며 비판을 받는 ’나’는 또 누구인가? 나를 그렇게 검열하도록 만드는 내 안의 어떤 존재는 누구인가?
내면의 권위는 부모를 대신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아주 오랫동안 우리는 이 존재에게 제대로 맞설 수조차 없었다. 우리가 그저 반사적인 패턴으로 행동하는 데 갇히지 않으려면 잠시 멈춰서 스스로 ’ 지금 나는 어떤 기분이고 무엇을 원하는가?‘라고 물어볼 수 있어야 한다. 자기 검열이 무서운 이유는 우리를 과거에 갇혀 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전 시대에는 변질된 종교가 많은 이들에게 자기 검열을 수행하도록 억압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느낌을 죄책감 없이 솔직히 표현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 아이와 다를 바 없다.
무의식적인 권위를 강요하는 부모와 성직자는 근본적으로 같다. 사람들에게 이로움보다 해로움을 더 많이 끼친다.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고 공동체에서 추방시키겠다며 위협함으로써 개개인의 발달을 저해한다. 아이는 이러한 부모, 또는 집단으로부터의 허락과 보호로부터 외면당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그 때문에 반사적으로 자신의 충동을 억누르는 것이다. 외면당할까 봐 두려워 생기는 자기 방어, 그게 바로 죄책감이다.
돌아갈 곳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위협과 유대감을 느끼는 부모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우리는 자기 검열을 계속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스스로의 본성에서 떨어져 어른이 되지 못한 채 과거에 갇혀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현재를 사는 능력과 스스로를 정의하는 성인으로서 살아가는 능력이 없다면 나아가기 두려워 길을 잃은 상황에서 자신이 말라죽을 때까지 혼란 속에 방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심리치료라 해봤자 현재의 고통을 전부 부모 탓으로 돌리는 것밖에 없냐는 질문을 들어본 적이 있다. 사실 그 반대다. 인간의 정신이 얼마나 연약한지 이해할수록 부모가 우리에게 준 상처를 용서할 가능성이 커진다. 가장 나쁜 일은 모든 것을 무의식 속에 묻어두는 것이다. 그랬다가는 치러야 할 대가가 크다. 자신의 과거의 상처와 결함을 발견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감싸안는 부모 역할을 해야 한다.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정신분석가는 내담자의 개성화를 계획하지 않는다. 내담자가 ’자기‘의 목소리를 듣고 스스로 진실을 믿게 되리라고 기대하며 내담자를 일깨울 뿐이다. 내담자가 스스로 인생의 목적을 알려주는 부름을 받을 수 있도록, 스스로를 깨우칠 수 있는 존중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대우해 준다. 자식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도 이와 같다. 그리고 자신과 같지 않은 타자다움을 사랑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과제이며 이는 결혼생활과도 마찬가지다.
통제하거나, 자신이 못 이룬 삶을 대신 살게 하거나, 똑같은 가치체계를 강요하는 건 사랑이 아니다. 자기도취에 불과하며 상대의 삶을 방해할 뿐이다. 개성화를 스스로 이루는 것만 해도 충분히 어려운데 왜 타인의 욕구까지 짊어져야 하는가? 나의 욕구를 타인에게 넘겨주지도 말아야 하며, 타인의 욕구를 내가 이루려 해서도 안된다.
인생의 중반에서 자신을 바꾸려면 배우자와의 애정관계 또한 세세하게 짚어봐야 한다. 배우자가 같은 마음이 아니더라도, 내면이 바뀌려면 애정관계에 변화를 주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정말 애석하게도 결혼생활을 돌이킬 수 없이 오염시키는 것이 부모로부터 기인한 콤플렉스일 때가 많다. 부모가 우리를 긍정해 준다는 느낌 없이 우리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기는 너무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융이 말한 대로, 부모가 이루지 못한 삶이야말로 자식이 짊어져야 하는 가장 큰 짐이다. 부모의 삶이 자신의 공포로 가로막혔다면, 아이 또한 그 장벽을 넘어서는 것이 두려워진다. 게다가 부모의 발달 수준에 스스로를 맞추려는 무의식적인 욕구에 발이 묶여 더 나아가지 못한다. 그러나 부모가 스스로의 삶을 충실히 살고 있다면 무의식적으로 자식을 질투하거나 기대와 한계를 투사하지 않는다. 부모가 개성화를 성취할수록 자식 또한 더 자유로워진다.
부모는 아이의 안전감을 유지하게 하는 일 말고도 큰 역할을 맡는다. 바로 아이의 정신에 틀이 되어 주는 것이다. 아이가 부모에게서 경험하는 모든 것이 아이의 틀이 된다. 그리고 아이의 내면에도 부모와 유사한 능력이 생긴다. 당연하게도 우리의 부모조차도 완벽하지 않은 부모의 자식이었다. 그리고 스스로 경험한 것만을 자식에게 전달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인생의 막을 열기 위해서는 스스로 얻은 지식을 부모가 전해주는 메시지와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난 아버지/어머니와 어떤 점이 닮고 다른지‘, ‘누구에게 더 큰 영향을 받았는지‘, ’한 분이 영향을 끼칠 때 다른 한분은 어디에 있었는지’, ‘어떻게 내 삶이 별개의 여정으로 펼쳐질지‘에 대한 답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 답은 바로 나타나지 않는다. 되풀이되는 질문과 자기 탐구 속에, 갑작스러운 깨달음의 순간에 겨우 윤곽을 드러낼 뿐이다.
우리는 부모가 이루지 못한 삶, 부모의 슬픔과 분노를 계속 짊어지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것들이 무의식의 영역에 남아 있는 한 그렇다. 수치심도 마찬가지다. 수치심은 우리가 타인의 상처와 연관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살아온 과거를 피할 수는 없기에 콤플렉스는 필연적으로 존재한다. 의식하지 않았던 과거가 현재에 파고들어 미래를 결정한다.
스스로의 가치를 부모가 지지해주지 않았다면 실패를 두려워하여 삶의 여러 과제, 심지어 성공까지도 계속 회피하려 들 것이다.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땅이 무너지는 느낌이 든다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내가 딛고 설 땅을 다질 때까지 한 발씩 걸음을 내디디며 필요한 일을 하나하나 이뤄나가야 한다. 어린 시절이 자신을 지지해주지 않는다 해도 이 과제를 수행해 나가야 한다.
때로 나에게 상처를 주었을 수 있던, 그들 스스로의 인생의 여로의 맞서거나 그러지 못했던 ‘타인’으로 부모를 인정하자. 우리에겐 우리만의 인생의 여로가 있다. 그리고 이 길은 과거를 넘어 자신이 지닌 최대의 가능성에 다가설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