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트리스 체스넛, <에니어그램으로 깨어나기> 큐레이션
나의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던 어린 시절, 불평과 항의를 해봤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던 경험이 깊게 남아있는 사람들이 있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을 넘어, 자신보다 더 큰 목소리를 내며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누군가의 목소리에 자신의 목소리가 덮여버리는 경험이 반복된다면 무기력을 학습하게 된다. 거세게 항의해도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냥 포기해 버리게 된다. 어차피 아무도 듣지 않을 거니까. 그냥 차라리 잠이나 자는 게 낫겠다. 적어도 잘 때만큼은 편안하니까.
연결이 끊어졌다는 감각, 소속되지 못할 거라는 분리된 느낌은 아마 모든 이들에게 가장 큰 두려움일 것이다. 그래서 여러 친구를 사귀고 어울리려 노력하다가 자신의 욕구는 잊어버리고 오히려 사람들이 원하는 것에만 집중하게 되기도 한다. 내 의견을 포기하고 누군가의 의견을 따르는 게 차라리 더 쉽다. 다른 의견이 있어도 굳이 맞서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내가 정말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신경 쓰는지조차도 모르게 되어버린다. 모든 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나 자신조차도.
가끔 내 욕구나 의견을 말해달라는 사람이 있었지만 이제는 정말로 나조차도 그게 뭔지 정확히 모르겠다. 어차피 아무도 듣지 않으니까 내 욕구를 마음 한 구석으로 밀어내다가 나조차도 잊어버린 것 같다. 내가 원하는 것이 없다 보니 적극적으로 주장한 적도 별로 없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내가 뭘 해도 잘 맞춰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귀를 기울이거나 나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화가 난다. 이렇게 화가 쌓이다 폭발한 적도 몇 번 있다. 그렇지만 화를 내게 되면 오히려 주변 사람들과 더 멀어지게 되어버리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또 억누르게 된다. 누군가에게서 끊어지고 단절되는 것은 외롭고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분리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 조용하고 편안하게 지내려 하는 것은 에니어그램 9번 유형의 생존전략이다. 내면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겉으로는 고요하고 조용한 것처럼 지낼 수 있다. 9번은 이 전략으로 인해 쉽게 자신의 감정, 의견, 목소리를 잊어버린다. 이들에게는 사람들과 평화롭게 잘 지내는 것, 그래서 마음 편하게 있는 것이 모든 인간관계의 목적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진짜 욕구는 미뤄둔 채로 지낸다. 매일 아침 눈을 뜨고 일어나지만 몽유병 환자와 다름없는 ‘잠든’ 상태에서 일상을 보내게 되는 것이다.
당신이 아래 문장들에 공감한다면 9번 유형일 확률이 높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 혼자 우선순위를 세우기 어렵다.
주변 사람들과 서로 화목하고 잘 지내며 긴장이 없는 상태를 좋아한다.
사람들과 웬만한면 잘 어울리고 타인의 의견에 쉽게 동의할 수 있다.
평화의 상태를 깨고 싶지 않으며, 갈등을 피하고 중재하는 데 뛰어나다.
직접적이고 공개적으로 분노를 거의 표현하지 않는다.
주변 사람들에게 느긋하다, 함께 있으면 편하다는 말을 듣는다.
여러 사람과 있을 때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거나 의견을 제시하지는 않는 편이다.
가장 힘들 때는 사람들이 자신을 중요하지 않게 여기거나 자신을 소외시킬 때이다.
사람들은 불가능은 없다고 하지만, 나는 매일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_곰돌이 푸(SP9)
9번 유형은 흔히 잠이 많고 게으른 캐릭터로 묘사되곤 한다. 그런데 더 근본적인 문제는 이들이 설령 부지런하게 깨어 활동한다고 해도 사실 잠들어 있을 때와 별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며 자신의 감정과 단절되어 있는 불편한 느낌에서 도망치기 위해 삶 전체를 수면 상태로 지낸다. 이들의 나태는 근본적으로 습관보다 삶과 자신에 대한 태도에 관한 문제다.
“나태”는 9번을 움직이게 만드는 격정이자 정서적인 핵심 동기이다. 에니어그램에서 설명하는 “나태”는 흔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게으름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필요한 중요한 행동을 취하기를 주저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중요한 행동‘이란 자신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해야 할 행동이고, 대체로 이것이 상황을 바꾸는 첫 단계이다. 그래서 이들의 나태는 무의식적으로 계속 자신을 등한시하고 세상에 참여할 수 있는 자신의 역량을 무시한다는 것을 뜻한다.
9번은 무의식적으로 ‘가장 저항이 덜하고 갈등이 적은 길’을 택하고 싶어 한다. 때문에 최소한의 노력만을 들이고자 하며,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고 적극적으로 나가기보다는 그저 상황에 따라가며 스스로의 우선순위를 망각하게 되는 것이다. 편하고 싶고, 쉽게 살고 싶기 때문에 갈등은 물론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도 피하게 된다.
9번은 흔히 주의가 외부세계에 있고 자신의 내적 경험은 망각해 버리기 일쑤다. 개인적 생각, 감정, 욕구를 알아차리기 어렵고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봐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는 점심 메뉴 같은 기본적인 것들조차 잘 알지 못하는 9 번들도 있다. 타인을 도와줄 때는 적극적이지만, 자신을 위해서 행동해야 할 때는 관성을 따라 행동한다. 자동 조종 상태로 살아가는 이들은 나태의 영향으로 자신이 중요하지 않음을 절실히 통감하게 될까 봐 세상 앞에 드러나기를 피하고 싶어 잠이 든다.
9번이 아래와 같은 징후가 있을 때는 주의를 기울여 지금 정서적 격정인 “나태”가 드러나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를 계속 미룬다.
원하는 것을 모르고 의견이 없거나 표현하지 않으며, 사람들을 지원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쏟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요구사항과 자신의 선호를 표현하기를 불편해한다.
동의하지 않을 때 거스르거나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가 너무 어렵다. (누군가 자신의 관심과 에너지를 지나치게 소모시켜도 선을 긋기 힘들다.)
자신이 중요시되지 않더라도 그저 이미 했던 일을 반복하는 편안한 상태에 머무르고 싶어 한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순간순간의 경험을 온전히 느끼는 데 관심이 부족하다.
상대를 자신보다 우선시하며 그가 원하는 것에 지나치게 맞추다 보니 상대가 원하는 것을 거절하기 힘들다.
삶을 회피하여 얻을 수 있는 평화는 없다.
_버지니아 울프
9번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세가지 단계가 있다. 9번이 깨어나기 위한 첫 단계는 자신을 마지막 순위에 두면서 얼마나 스스로를 중요하지 않게 여기는지 의식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편안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며 주위와 잘 지내는 데 필요한 것들에 자신을 맞추는 습관적인 패턴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 내가 주변 환경, 사람 등 외부 요소에 주의와 에너지를 집중하고 있는가? 언제 습관적으로 상대에게 맞추려는 충동을 느끼는가? 9번에게는 자신을 그 어떤 의견도 갖지 않는 것처럼 만들어 버리는, 자신의 욕구를 찾으려는 노력을 포기해 버리는 습관적인 패턴이 있다. 그걸 먼저 자각하는 것이 9번 성장의 핵심이다.
자신이 중요하지 않다는 느낌, 타인과의 연결이 끊어질 것이라는 단절감에서 비롯된 두려움으로 인한 모든 선택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어느 순간 내가 과도하게 사람들에게 맞춰주고 순응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자신의 요구을 망각하는 모습이 나온다면 그 순간 잠깐 멈춰서서 알아차려 보자. 그것이 바로 습관적인 에고의 패턴이다. 9번들에게는 무엇보다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깨닫고, 최종적으로 자신의 분노와 욕구, 우선순위를 더 명확하게 알아차리는 것이 먼저이다.
두 번째로, 9번이 그림자를 직면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고통을 느끼는 지점들을 표면 위로 가져와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불편함이 느껴지는 일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어떤 지점에서 불편해지는지, 어떤 것이 불편해서 도망치고 싶어지는지 주의를 기울여 보자. 모든 유형이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9번 유형들에게는 불편한 일이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불편한 일을 의식적으로 해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이들은 안전지대에서 떠나기를 온 힘을 다해 저항하고 있기 때문에 작은 일에서부터 큰 일까지 차례로 불편을 겪어보는 것이 변화를 위한 성장에 필수적인 단계이다.
마지막으로,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겠지만 9번 유형도 분노가 핵심 동기가 되는 본능형, 그중에서도 본능형의 중심이다. 태풍의 눈이 고요하듯, 분노의 에너지를 너무 강하게 억압하고 있어 평화롭게 보일 뿐, 그들의 내면에서는 거센 폭풍이 잠들어 있다. 분노를 느낄 때, 이를 잊어버리려고 하는 자신을 알아차리고, 내가 분노를 어떻게 잊으려 하는지, 화가 나는 이유는 무엇이었는지를 적어보자. 분노는 9번 유형에게 자신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알아차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단서이다. 직접적으로 건강하게 분노를 표현하는 위험을 감수해야만 한다.
불만, 분노, 속상했던 일을 떠올리고 그때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어떤 말을 했는지, 그때 하지 않았지만 어떤 말을 하면 좋았을지를 생각해 보고 적어보자. 9번 유형은 분노를 직접적으로 표현하기조차 회피하기 때문에 수동공격적인 경향이 자주 나타나곤 한다. 때문에 9번에게는 온순하나 고집이 세고 움직이기 힘든 “코끼리”라는 별명이 붙는다. 내가 완고한 고집이나 수동적 방식으로 저항하거나 공격하는 방식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이에 대해 가까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9번이 ‘올바른 행동’을 시작하면 이들은 습관적으로 양보하는 패턴을 거부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가치를 알고 조화를 이루기 위해 지나치게 겸손할 필요도, 자신을 잃어버릴 필요도 없음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자신이 중요한 존재임을 깨닫고, 더 깊게 연결됨과 소속감을 느낄 수 있으며 그를 통해 구체적으로 내가 어떻게 세상에 공헌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머무르는 대신, 그 과업을 시작할 수 있다. 자신과 주변 세상에 실질적으로 참여하고 현재에 능동적으로 집중하는 모습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의 9 번들은 의식적으로 자신을 위해 일하며 더욱 자신을 잘 돌보고, 세상에 자신을 적극적으로 강하게 표현하면서도 관심과 배려로 사람들을 돌볼 줄 아는 지도자가 된다. 그때서야 9번은 진정으로 자신의 역량을, 자기자신을 신뢰할 수 있게 된다. 9 유형이 참 자아를 받아들일 때의 핵심은 점진적으로 스스로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자신의 분노와 힘을 느끼고, 자신이 있는 그대로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알고, 타인에게 맞추느라 습관적으로 분산시켰던 에너지를 중요한 일에 집중하는 법을 배워감에 따라 ‘올바른 행동‘이라는 미덕을 실천하는 자유를 경험할 수 있다.
9번이 자신을 망각하고 사람들에게 맞추려고 하는 전략은 사실 아무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편안함만 추구하는 삶은 실질적으로 아무 보상도 가져다주지 못하며, 잠든 상태로 평생을 흘려보내는 것보다 불편을 감수하는 편이 훨씬 낫다. 불편함과 갈등을 받아들여야만 비로소 찾아오는 진정한 평화가 있다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 분리에 대한 두려움은 에고의 착각일 뿐이다. 자신의 참 자아는 모든 것과 가장 깊은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자신의 참된 모습을 알아감에 따라 모든 사람과 진정으로 연결되어 건강한 차원에서의 연합과 조화, 평화를 이룰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러한 평화는 어느 정도의 갈등 없이는 얻을 수 없다.
9번 유형들은 특히 신체를 감지하는 활동을 꾸준히 하면 효과를 많이 보는 사람들이다. 산책, 요가, 헬스 등 어떠한 형태로든 운동하며 몸을 움직이고, 신체를 더 의식하면서 활동적이고 활기차게 생활할수록 에너지 수준이 높아질 수 있다. 명상도 큰 도움이 된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동안 내면에 집중하며 자신의 힘을 느끼고 되찾아 오자.
마지막으로 9 번들은 사람들을 대할 때 선을 긋는 법, 경계를 세우는 행동을 연습할 필요가 있다. 그냥 필요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절실히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9번 유형들을 코칭할 때는 "NO WEEK"라는 것을 지정해서 거절 시키기도 한다. 한 주동안 받은 모든 부탁과 제안에 대해 "NO"라고 거절해보는 것이다. 터무니없게 느껴지지만 막상 실천해보면 일주일동안 우려했던 일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았음을, 그리고 이를 통해 수없이 거절해도 자신은 거뜬하다는 사실을 깨닫게된 9번 내담자들은 허탈하게 웃으면서 진작 이렇게 해볼걸 그랬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거절을 더 많이 하고, 싫은 일에 ‘예’라고 대답하지 말자. 덜 친근하고 덜 친절하고 덜 웃어도 된다.
용기를 내서 그림자를 직면하고 특히 분노를 회피하며 자신의 힘을 외면하는 방식을 알아차리면 9번은 잠든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가장 회피해 왔던 고통, 불편함은 사실 삶을 온전히 경험하고자 하는 당신의 깊은 열망과 연결시켜 주는 것이었다. 이 열망과 연결되도록 스스로를 헌신할 때 당신은 우리 모두에게 자신을 기억하고 참 자아를 회복하는 본보기가 될 것이다.
성장은 항상 안전지대를 벗어나야 한다.
_존 맥스웰
편안한 환경은 아름다울 수는 있지만,
그곳에서는 아무것도 자라나지 않는다.
_존 아사라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