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홀리스, <내가 누군지도 모른 채 마흔이 되었다> 큐레이션
최근 한 신문기사에 따르면 미국인 중 거의 40%가 해마다 진로를 바꾼다고 한다. 직업이 아닌 진로 말이다. 우리의 소명은 일직선이 아니라 이리저리 휜 구불구불한 길이기 때문에 수많은 개인이 여러 진로를 경험하면서 자신의 다양한 측면을 작동해보고 있는 것이다.
32살까지 직업을 5번이나 바꾸며 각종 단기 알바를 하고 적당히 ‘나‘와 맞는 경제활동을 거친 사람도 있다. 계속해서 이직을 하며 ’난 그동안 뭘했지? 뭘 위해서 사는 거지?‘하는 생각에 좌절감이 찾아오기도 한다.
프로이트는 건강하려면 일이 필수 요소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부심을 가지고 건강하게 삶을 운용하고 있는지 확신이 서질 않는다. 프로이트는 과연 어떤 종류의 일을 말한 것일까?
가리키는 대상은 같지만 ‘직업’과 ‘소명’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직업은 돈을 벌어 경제적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철학 석사학위를 갖고 있으며 새벽 3시부터 아침 8시까지 배달을 하며 그 외의 시간을 자유롭게 쓰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일과 소명 사이의 균형을 맞추며 그 혜택을 모두 누리려 한 것이다. 꼭 생계를 위해 돈을 버는 일에 당신의 소명을 연결 짓지 않아도 좋다. 직업은 생계를 위해서라도 데드라인을 정해놓고 정해진 시기, 성인기가 되면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여 선택해야만 한다.
반면 ‘부름’을 뜻하는 라틴어vacatus에서 온 소명vocation은 삶의 에너지를 실현하도록 요청받는 것이다. 소명에는 정해진 시기가 없다. 인생 전체가 소명을 실현하고 개성화를 이루어나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충분히 생산적이라고 느껴야 개성화를 이룰 수 있으며, 개성화의 요구를 받았을 때 자신의 소명에 응답하지 않으면 오히려 영혼이 상처를 입는다.
자신의 직업과 소명을 연결하는 데 성공한 경우도 있으나, 그 역시 소명을 성취하기 위해 엄청난 대가를 치르기도 한다. 역설적으로 강력한 소명은 자아의 욕구를 희생하도록 한다. 우리는 소명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수 없다. 소명이 우리에게 요구한다. 그리고 삶의 의미 중 상당 부분은 소명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데서 온다.
자아는 삶을 이끌지 않는다. 실제로 자아는 삶에 관해 거의 알지 못한다. 우리에게 전체가 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바로 수수께끼 같은 “자기 존재”이다. 전체가 되는 데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어떻게 사용할지 결정하는 일이 우리 삶의 여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소명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다. 소명이 우리를 선택한다. 우리는 거기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소명은 소득과는 무관하다. 누군가에게는 타인을 키우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예술이 대접받지 못하는 시대에 예술가가 되는 일이 소명일 수 있다. 천대받거나 거부당할지라도 자신의 소명을 기꺼이 하겠다고 답함으로써 자신을 지킬 수 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은 소명과 직업 사이의 딜레마를 다룬 작품이다. 나사렛 예수는 십자가를 만들던 목수인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결혼하여 교외에 살면서 낙타를 몰며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때 자기 내면의 소리인 보카투스vocatus가 그에게 다른 곳으로 가라고 명한다. 홀로 남은 예수는 마지막으로 자신의 소명을 외면한 채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평범한 삶을 상상한 후, 예수는 자신의 개성화를 외면하는 것은 스스로를 배신하는 일임을 깨닫는다. 보카투스의 부름에 응답함으로써 예수는 비로소 그리스도가 된다.
융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길imitatio Christi은 그 옛날 나사렛의 목수 아들처럼 사는 게 아니라, 예수가 그리스도의 삶을 산 것처럼 자신의 개성화 과정인 소명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한 의미와 같다.
당신의 사회적, 경제적, 관계적 짐이 무엇이든 간에, 당신의 지금 짊어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한 발 물러서서 스스로에게 반드시 질문해봐야 한다. “나는 인생에서 어떤 부름을 받았는가?”, ”나는 무엇을 하도록 요구받고 있는가?“ 그 답변에 겸손하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이제 안정을 찾았다 싶은 바로 그때, 지금까지 쌓아왔던 안정적인 삶을 포기하고 욕구를 거슬러 소명의 부름의 응답하는 일은 괴롭고 고통스러울 것이다. 자아는 언제나 편안함과 안락함을 추구하기 때문에 자아를 희생하는 일에는 언제나 아픔이 따른다. 그러나 인생의 보카투스를 무시한 뒤 남는 후회와 고통에 비교도 되지 않는다. 부름대로 더 큰 사람이 되지 못하는 일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영혼의 욕구는 경제적 풍요로는 채울 수 없다.
당신의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깨달았다면 계획을 세우고, 필요한 대가를 치르고 충분한 용기로 실현해 나가야 한다. 보카투스는 우리에게 자신의 모습대로 충만하게 살 것을 요구한다. 용기의 크기가 우리가 실현할 진정한 모습의 크기를 판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