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서평
당나라의 어느 시인이 길을 가다 시상이 떠올라 머릿속으로 시를 지었다. 지어 놓고 보니 마음에 변덕이 들어, 마지막 구절의 한 글자를 고쳐야 할지 말아야 할지 헛갈린다. 어느새 제 앞에 고관대작의 수레가 와 있는 줄도 모르고 장고를 거듭하던 시인은 깜짝 놀라 높은 양반에게 자초지종을 고한다. 마침 시에 조예가 있었던 높은 양반은 잠시 생각하더니 글자를 바꾸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조언한다. 이것이 그 유명한 “퇴고(推敲)”의 유래다. 이렇듯 “두드리다(推)”와 “민다(敲)“ 사이에서 고민을 하다 제 앞길도 못 보는 것이 글쟁이의 습성이며, 따라서 작가에게 있어 글을 고쳐 쓴다는 것은 전혀 유별날 것이 없는 보통 때의 일이다.
얼마만큼 보통의 일인가 하면은, 퇴고라는 것은 밥을 먹은 뒤에 물로 입가심을 하는 것만큼 당연스런 일이라, 고금을 막론하고 수많은 글쟁이들이 아침에 써 놓은 글을 점심에 들여다보고 저녁에 고쳐쓰기를 마다하지 않았다지만, 그럼에도 어느 작가가 초년에 내어놓은 소설을 오십 년간이나 붙잡고 씨름했다는 사정을 듣고 나면 우선 탄복하게 되고, 그다음은 영문을 궁금해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테다. 요컨대 『광장』을 읽을 때에 우리는 첫 장부터 이러한 시차와 그것의 동시성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광장』은 아홉 번이나 다시 쓰인 소설이다. 첫 완성본을 포함하면 열 번이나 씌어졌다는 말이 된다. 판본이 찍힌 것이 그만큼이니, 작가의 책상 아래 수북 쌓인 지우개 가루는 바닥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며, 줄이 그이고 구겨지고 찢어진 원고지를 겹놓으면 천장까지도 능히 닿으리라. 쉬이 짐작도 안 되는 수고이지만 덕분에 『광장』이 작가에게 있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 작품인지는 대강 알 만도 하다. 처음 발표된 것은 1960년이었고, 마지막 열 번째는 2010년이었다. 무려 반세기 동안이나 고쳐 쓰인 소설. 수천 페이지 분량의 장편도 아니고 이백 페이지 남짓의 중편소설 치고는 퍽 이례적인 일이다.
최인훈 선생은 어째서 이 소설을 그다지도 고쳐 써야만 했을까. 바깥세상에 내놓은 자식이 못 미더운 부모의 마음이라고 하기에 『광장』은 너무 나이 든 소설이 아닌가. 다행스럽게도 주요한 수정 사항이 있을 적마다 새로 실린 서문이 있어 우리는 어렴풋이나마 개작의 사유를 따라가 볼 수 있다. 가령 문학과지성사 7판 기준으로 —이하의 인용은 모두 이 판본을 기준으로 한다— 가장 최근인 89년도의 판본의 서문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겪은 운명의 성격 탓으로 나는 이 주인공을 잊어버릴 수가 없다. 주인공이 살았던 것과 그렇게 다르지 않은 정치적 구조 속에 여전히 필자는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가 말하는 정치적 구조가 어떠한 것인지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89년에서 다시 서른한 해가 지난 지금에도 우리는 1960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정치적 구조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까닭이다. 그 정치적 구조라 함은 물론 상당 부분 민족 분단과 이념 대립의 역사를 이르는 것일 테지만, 그것만으로 깔끔하게 정리되지는 않는다. 작가는 함부로 시대를 재단하는 대신 그 시대의 풍파를 함께한 인간 이명준을 끈기 있게 들여다본다. 73년도의 일역판 서문을 줄이자면, 작가는 아랑곳없는 세계 앞에서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하는, 비범하지 못한 평범한 사람들의 운명의 표정을 그리고자 하였다고 말한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숱한 개작의 주된 이유는 세상이 반세기가 지나도록 변함없이 말짱하기 때문일 것이며, 그와 반대로 작가가 바라본 이명준의 표정은 시시때때로 미묘하게 바뀌어 갔기 때문일 것이다.
이 이명준이란 작자는 누구인가. 일역판과 같은 해의 국문판 서문에서 작가는 이명준을 “‘이데올로기’와 ‘사랑’이라는 심해의 숨은바위에 걸려 다시는 떠오르지 않은 사람“으로 칭한다. 그의 발목을 건 ‘이데올로기’와 ‘사랑’은 오늘날에도 이명준이 걸려 넘어진 바로 그 해역에서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고서 뭇사람들의 발목을 잡아끌고 있다. 이 이데올로기와 사랑이란 것은 하도 그 품이 넉넉해서, 또한 사람 사는 세상에는 어디에나 있고 어느 때에나 있는 것이라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집어삼키고도 여즉 흔들림 없이 그저 그곳에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그것이 태초부터 점지되었던 인간 삶의 전제 조건인 양 여기고 살아가게 된다.
허나, 우리 삶의 단단해 보이는 것들은 고작 풍문에 불과한 것일 때가 많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 속에는 얼마만큼 다양한 층위의 뒤틀린 감정들이 뒤엉켜 있으며, 우리가 우리의 생각이라 믿는 것들은 또 얼마나 바스라지기 쉬운 것이던가. 그러나 그러한 풍문들은 실로 감쪽같아서 평상시에 우리는 속절없이 속아 넘어가고 만다. 실에 묶인 마리오네트의 운명. 이명준은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무던히도 애를 쓴 사람이다. 비록 현장에 다다르더라도 풍문은 여전히 막강한 힘을 휘두를 테지만 적어도 그때에 우리는 우리를 옥죄는 실타래의 존재를 발견할 수는 있다. 『광장』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살아가야 했던 이의 특수한 역사를 문제 삼는 동시에 역사 너머의 보편적인 인간 실존에 다가선다. 이것이 『광장』의 역사성이며, 작가의 잦은 변덕에도 바래지 않은 고전의 미덕이다.
이제 텍스트를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자.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
바다의 출렁거림에 대하여, 이만큼 적실한 문장은 다시없을 것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소설의 출항을 알리는 이 문장은 아름다우면서도 섬찟하다. 짧은 어절들 사이에 가로놓인 콤마, 진하고 푸른 빛깔과 육중한 무게감, 무거운 것을 들추면서 간신히 헐떡거리는 날숨의 이미지. 바다의 가없는 크기와 가늠할 수 없는 깊이는 그것을 내려다보는 인간으로 하여금 까닭 모를 망망함과 공포심을 느끼게 한다. (바다를 바라보는 소설의 첫 문장은 얼핏 폴 토마스 앤더슨의 2012년 영화 〈마스터〉의 첫 장면과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전쟁의 트라우마와 실존적 무력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전역 군인의 망가진 삶을 그리는 이 영화는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거품과 푸르고 육중한 바다를 비추면서 시작한다. 서로 다른 두 작품에서 바다가 표상하는 바가 무엇인지 우리는 어렵지 않게 헤아려볼 수 있다.)
그 광대하고도 경이로운 바다 위에는 조선인 서른 명 남짓을 태운 타고르호가 유영하고 있다. 명준도 거기에 있다. 남녘에서도 북녘에서도, 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종국에 이 갑판까지 떠밀려 온 이명준은 무시로 자신을 따라다니는 허깨비를 본다. 허깨비가 그를 따라다니듯이, 갈매기들은 끈기 있게 배를 따라온다. 선장은 명준에게 갈매기들이 죽은 이의 넋이라는 실없는 소리를 건넨다. 명준은 갈매기들을 올려다본다.
다음 장면. 시계는 명준이 대학생이던 시절로 돌아간다. 태식과 영미 남매의 집에 얹혀사는 명준은, 만사에 재미만 쫓는 그들의 부르주아적인 삶을 어쩐지 딱하게 여기면서 삶에 의미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믿고 그것을 찾는 데 열심인 철학과 3학년생이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공간이 있다. 광장과 밀실이 그것이다. 명준에게 해방 직후의 남한사회, 즉, 자유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떠받드는 그 사회는 자유란 미명 하에 사람들을 밀실로 내몰고 광장을 폐쇄한 정치가 죽은 곳이었다. 어느 교수의 침실. 관 속에 뉘어 있는 알맹이 없는 미라. 그 미라와 교수 앞에서 명준은 남한의 현실에 대한 울분을 실컷 토한다. 그러나 명준은 한 번도 광장에 나서 본 적도, 자기 삶을 구성하는 물질들을 제 힘으로 취해본 적도 없다. 여자 경험도 아직 없다. 명준은 어디까지나 “젊고 가난한 철부지 책벌레”, 혹은 관념 철학자도 못 되는 “관념 철학자의 달걀”이다.
달걀 이명준은 월북하여 김일성 정권의 유력인사가 되어 있는 아버지 탓에, 경찰서로 끌려가 험한 매질을 당한다. 이제 명준은 몸으로 자신의 밀실과 세계의 불협화음을 느낀다. 남한에는 광장도, 밀실도 없다. 그의 밀실의 문은 불한당에 의하여 쉽게도 찢어지는 종이 문이었다. 경찰서에서 나온 명준은 돌연 서울을 벗어나 영미에게 소개받았던 윤애의 집으로 향한다. 그리고 명준은 그곳에서 윤애를 안는다. 불가해한 여자의 마음에 크게 흥미를 두지 않았던 명준에게 남은 것은 여자밖에는 없다. 그러나 종종 손길을 뿌리치는 윤애의 마음을 명준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 정조 없는 정조 관념의 아이러니. 그녀가 명준을 사랑하는 것인지 명준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면 명준은 어떻게 윤애를 사랑한다고 확신할 수 있었는가? 모르긴 몰라도, “이긴 사람의 미안한 마음”은 아니다. 명준이 윤애를 사랑했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때때로 그녀를 깔보았던 그의 마음이 아니라 그의 몸이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애는 그 몸을 명준에게로 있는 대로 열어주지 않았다. 남한에서의 마지막 광장은 그렇게 닫히고 말았다. 결국 명준은 윤애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북으로 향하는 밀항선에 오른다. “잡은 고기를 넣어두는”, “비린내가 메스꺼운 갑판 밑 어두운 뱃간에서”, 명준은 윤애 생각을 하는 대신 북에서의 삶을 꿈꾸며 들뜬다.
그러나 그렇게 도착한 북에도 제대로 된 삶은 없다. ‘누군가의 말씀’을 지고의 가르침으로 아는 북에는, 밑으로부터의 혁명이 아닌 문서로 하달된 혁명을 수행한 북에는, 자유가 없다. 그의 아버지는 혁명가가 될 법한 여성 동지가 아닌 명준 또래의 전형적인 조선 여성에게 새 장가를 들었다. 혁명의 열기가 아닌 의욕 없는 생활의 피곤에 찌든 인민의 얼굴에서 명준은 잿빛만을 본다. 형태가 있는 모든 것을 불태우는 만주의 붉은 노을조차 형태가 없는 명준의 마음에까지 불을 지필 도리는 없다. 그가 바라 마지않던 광장은 이곳에도 없다. 이번에도 그가 찾아갈 곳은, 물론, 사랑밖에 없다. 북에서 만난 발레리나 은혜는 윤애와 달리 명준에게 모든 것을 열어놓는다. 이제 명준의 광장은 자기 아름만큼의 범위로 좁혀졌다. 그곳엔 오직 은혜만이 들어올 수 있다.
은혜는 결국 명준을 배신하지만, 전쟁터에서의 우연한 재회에서 명준은 전혀 고까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는 다시 만난 은혜를 사랑한다. “이 여자를 죽도록 사랑하는 수컷이면 그만이다.” —그의 자기 인식은 인간이라기보다 수컷에 가깝다. 그렇지만 명준은 여전히 인간이다. 인간다울 수 없는 세상의 수컷이지만, 사랑을 한다는 점에서는 틀림없는 인간이다.
전장 한가운데의 어딘가, 아무도 모르는 동굴 속. “접은 지름 3미터의 반달꼴 광장”은 은혜만을 위해 열려있다. 그러나 전장의 포화 속에서의 그 영원은 진정으로 영원할 수는 없는 법. 은혜는 명준의 딸아이를 밴 채로 전사한다. 명준은 포로수용소에 갇힌다.
명준에게는 세 가지 선택지가 있다. 북, 남, 중립국. 그에게 남은 키에르케고르식으로 말하자면 “실존하지 않는 사람들의 광장 아닌 광장”이었고, 북은 헛것을 섬기고 푸닥거리에 기대며 사랑이 아닌 미움이 다스리는 차르 나라였다. 그런고로, 명준의 선택지는 하나밖에 남지 않았으니, 중립국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다시 바다로 돌아와서. 동포들의 터무니없는 요구에 반대한 것으로 인해 인도인 선원들의 신임을 얻고 있는 명준은 동포들의 적의도, 외인들의 호의도 모두 우습다. 자신의 내면에 도사린 복잡다단함을 선뜻 축소시켜서 좋을 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식에 넌더리가 난다. 명준은 홀로 배 뒤켠의 갑판에서 햇빛을 맞는다. 그는 생각한다.
“자기 손을 보았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더듬고, 무엇인가를 잡고 있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외로운 놈이었다.”
문득 그는 자신을 따라다니던 허깨비가 바로 갈매기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두 마리의 갈매기. 크고 작은 갈매기. 명준은 갈매기에게 총을 겨누지만 이내 총구를 거둔다. 명준은 그 갈매기가 곧 은혜와 자신의 딸이라는 것을 선연하게 느낀다. “마침내 그를 찾아내고야 만 그들의 사랑을” 위하여, 명준은 바다로, 푸른 광장으로 투신한다.
이명준은 그렇게 거품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더없이 외로웠던 이명준의 표정은, 작가의 말마따나 오늘날 우리의 표정이기도 하다.
소설을 읽을 때에 실제의 인물을 떠올리는 것이 나만의 버릇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광장』의 이명준을 떠올릴 때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홍콩배우 장국영의 얼굴이 떠오른다. 비극적인 죽음이라는 결과적인 공통점 이전에, 장국영의 얼굴에 드러나는 천진난만함과 그 뒤에 어린 옅은 그림자는 그의 얼굴을 이명준의 얼굴로 생각하도록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는 듯하다. 그리고 그것은 곧, 여전히 현대인의 초상이 아닐까?
이명준이 바다에 몸을 던지고 나서 십 년 뒤일 1963년, 비틀즈는 빌보드차트에서 처음 1등을 하고 전설을 써 내려 간다. 촌스러운 영국 밴드에게 첫 1위를 안겨준 곡의 제목은 다름 아닌 〈I Want To Hold Your Hand〉였다. 아마도 비틀즈는 알았던 모양이다. 사람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그것은 분별 있는 관념이나 체계적인 이데올로기 따위가 아니다. 그저 마주 잡으면 그만인 다른 사람의 손이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설령 그것이 바닷속으로 뛰어들어야만 잡을 수 있는 세이렌의 손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