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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nui Aug 19. 2020

「카스테라」는 곧 문학이다

박민규 「카스테라」

# 본 글은 필자가 교양 수업 때 썼던 발제문을 바탕으로 약간 수정한 글입니다.


# 다소간의 논리적 비약이 있는 철저히 개인적인 인상비평입니다.


# 단편집 『카스테라』가 아닌 해당 단편집의 표제작 「카스테라」를 대상으로 하는 글입니다.


# 글에 박민규 작가의 표절에 대한 언급은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필자는 박민규 작가의 표절과 이후 대처가 분명히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며 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입니다.






박민규라는 사건


    2005년 문학동네에서 출판된 박민규의 단편집 『카스테라』의 추천사에서 이외수는 이렇게 말한다. 


    “대한민국 문학사를 통틀어 가장 신선하고 충격적인 사건 하나를 지목하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박민규라는 작가의 출현을 지목하겠다.”


    책의 추천사라는 것에는 으레 과도한 극찬이 따라붙기 마련이지만, 적어도 박민규에 관한 한 이외수의 이 진술은 적절한 것 같다. 박민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든 부정적으로 평가하든 간에 박민규는 한국문학에 있어 하나의 사건인 까닭이다. 사건을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특이점, 되돌릴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바라볼 때, 한국문학사에 박민규의 등장만큼 뚜렷한 사건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박민규는 1968년에 태어나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본래 펑크록에 뜻이 있었다는 박민규는 대학에서 시를 전공한 뒤 졸업하여 해운회사 영업직원으로, 광고회사 카피라이터로 5년 동안 일반 회사원 생활을 한다. 이후 책 전문 월간지를 내는 잡지사에서 다시 3년 동안 일을 하다가 그만두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채 3년이 되지 않은 2003년, 문학동네에서 장편 『지구 영웅전설』로 신인상을 수상하고, 같은 해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으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일약 스타작가가 된다. 이후로도 박민규는 활발히 작품 활동을 하며 이상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 다수의 권위 있는 문학상을 휩쓸며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떠오른다. 


    혜성 같이 등단한 뒤 2000년대 한국문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온 박민규에 대한 평단의 평가는 극단적으로 엇갈린다. 한편에서는 박민규를 ‘무규칙 이종 소설가’(최을영), ‘문학 발전소’(황정아), 심지어는 ‘민주투사’(김형중)로까지 부르며 그를 상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박민규의 문제의식이 “작가 치고는 너무 미지근”하다거나 “치열하지 않고 날카롭지 못하다”(이상 류신)는 식으로 비판한다. 평론가 조영일은 2010년 프레시안에 게재한 기사에서 박민규의 소설을 일컬어 잠깐의 위로에 그치는 “딜도”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이명원은 “이제 비평가가 불필요한 시대가 올 수도 있겠”다고 말하며 비평의 죽음을 예감하기도 한다. 좋든 싫든 박민규는 한국문단에 있어 “하나의 ‘도전’이자 ‘뜨거운 감자’” 혹은 “비평가의 비평관을 검증하는 리트머스시험지이자 시금석”(이상 권성우)이 된 셈이다. 


    이처럼 박민규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문제는 곧 앞으로 도래할/하고 있는 문학을 어떻게 바라보고 기다릴 것이냐는 물음과도 긴밀한 상관관계에 있다. 이는 문학과 철학 등을 가로지르는 지난한 연구가 될 것이며 본 글에서 이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정리하기는 어려울 테다. 그 대신 필자는 박민규의 소설 세계에서 초창기에 쓰인 「카스테라」를 일종의 메타픽션적인 알레고리로 읽는 하나의 독법을 제시함으로써 작가 박민규의 초기 문학을 살펴보고 이를 도래할 미래의 문학에 대한 하나의 전망으로 읽고자 한다.








메타픽션과 「카스테라」


    메타픽션(Meta-Fiction)이란 무엇인가? 『메타픽션』의 저자인 패트리샤 워는 “픽션과 리얼리티의 관계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 가공물로서의 그 위상에 자의식적이고 체계적으로 관심을 갖는 허구적인 글쓰기를 가리키는 말”로 메타픽션을 정의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기존의 픽션은 현실의 대체물로서 독자에게 감정적 파토스를 일으키는 데에 초점을 둔다. 따라서 일반적인 픽션에서는 독자의 몰입을 원활하게 하는 개연성이나 핍진성이 중시된다. 이러한 기존의 관점에서는 독자로 하여금 허구를 마치 사실인 것처럼 믿도록 만든다면 좋은 픽션이다. 반면 메타픽션은 소설 안에 소설이나 소설가, 작가 본인을 등장시키거나, 영화 안에서 영화라는 매체를 다루는 식으로 픽션 그 자체의 허구성을 적극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그러한 예술 매체의 또 다른 가능성을 고찰한다.


    한 마디로 픽션 자체에 대한 픽션이 메타픽션이라고 할 수 있다. 메타픽션 소설은 전통적인 소설의 구조, 작법, 의미 등에 대한 회의로부터 시작한다. 요컨대 기술의 발달로 영화라는 새로운 매체가 탄생했고 영화는 이전에 소설이 도맡아 하던 서사를 함께 다루는 매체가 되었다. 또한 언어라는 체로 걸러지지 않고 곧바로 시각적인 리얼리티를 제공하는 영화는 전달력 측면에서 압도적일 뿐만 아니라, 현실의 재현이라는 과제를 (어떤 부분에서는) 소설보다 더욱 충실히 수행한다. 그렇다면 이제 작가는 무엇을 쓸 것인가? 좋든 싫든 우리 시대의 소설가들은 모두 같은 난관에 봉착했다. 


    몇몇 소설가들은 영화가 할 수 없는 ‘소설만의 것’을 찾아 소설의 앞날을 개척하고자 했다. 메타픽션은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려는 이러한 작가적 자의식의 결과물 중 하나이다. 메타픽션이라는 새로운 글쓰기 방식의 태동(혹은 발견)은 무지막지한 기세로 문학을 침범해 오는 시대와 이에 대응하려는 일군의 작가들이 벌인 치열한 고투의 결과물인 것이다.








    이제 박민규의 「카스테라」를 메타픽션적 성격을 띤 알레고리로 읽어 보려고 한다. 하지만 그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이 작품은 소설 내부에 소설이 등장하거나 작가 스스로가 개입하면서 글쓰기 자체를 문제 삼는 직접적인 메타픽션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메타픽션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는 뜻이다. 본 글에서 필자가 제안하는 독법은 「카스테라」를 읽는 한 가지 방법일 뿐이다. 박민규 자신의 창작 의도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필자는 「카스테라」가 기존 소설의 독법을 해체하고 그 위상을 의문에 붙이는 소설이라는 점 —서두에 언급한 이외수의 서평을 상기하자— 에서 다분히 메타픽션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기존 소설의 공식을 뒤집는 모든 소설을 메타픽션으로 읽을 수는 없다. 이는 어쩌면 오독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박민규 스스로가 “누구에게나 꼴리는 대로 생각할 권리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니까, 설득을 당하고 말고는 순전히 당신 몫이다.) 이를 면죄부 삼아서 우리는 「카스테라」의 텍스트 안에서 이 소설을 메타픽션으로 읽을 수 있도록 하는 몇 가지 장치와 그 구조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냉장고와 훌리건, 문학의 상관관계


    먼저 소설의 줄거리를 훑어보자.


이 냉장고의 전생은 훌리건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랬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 「카스테라」는 “열을 식힐 줄 아는 지혜”가 부족해서 죽어버린 남자가 유독 소음이 큰 냉장고로 환생했을 것이라는, 다소 어이없고 엉뚱한 공상으로부터 출발한다. 총 7개의 큰 단락으로 구성된 소설은 크게 앞의 세 부분과 뒤의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부에서 화자는 〈유난히 시끄러운 냉장고가 전생에 훌리건이었을 것이라는 공상〉에서 나아가 냉장고를 친구로 여기는가 하면, 냉장고의 역사와 냉장 이론에 대해 따로 공부를 하고 부패를 막는 냉장을 찬양하는 데까지 이른다. 후반부에서는 이러한 〈냉장고〉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고민하고, 거기에 소중한 것과 해악이 되는 것을 같이 넣기로 한다. 화자는 냉장고 안에 『걸리버 여행기』 같은 책부터 영화, 아버지, 어머니, 학교, 미국과 중국 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것들을 넣어버린다. “언뜻 닥치는 대로 집어넣은 듯하지만, 그러나 분명한 원칙을 따른 것이었다.”고 화자는 말한다. 어느덧 냉장고 안은 하나의 세계가 된다. 새로운 세기의 첫날 아침, 냉장고의 소음은 사라지고 문을 열어보니 그 안엔 〈따뜻하고 부드러운 카스테라〉가 있다. 화자는 카스테라를 씹으며 눈물을 흘린다.


    「카스테라」의 구조나 서사는 생각보다 명료하지만, 이 소설을 독자들이 이해하는 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다. 「카스테라」는 익숙한 의미화의 방식을 거부한다. 화자가 냉장고에 넣을 수 없는 것들을 아무런 의문이나 무리 없이 자연스레 집어넣는 상황은 독자들 입장에서는 도무지 자연스럽지가 않다. 그런 게 용인되는 세계라면 또 모르겠지만, 이건 SF가 아니다. 판타지라기에도 모호하다. (이를테면 핍진성의 결여. 아니, 아예 그로부터 벗어나 있다.) 더군다나 주위의 인물들도 화자의 기이한 행위를 문제 삼지 않고 오히려 독려하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무엇보다도 이상한 것은, 소중한 것과 해악이 될 만한 것을 동시에 수용하는 〈냉장고〉의 존재 방식이다. 


    전반부에서 화자는 〈소음〉을 통하여 〈냉장고〉의 존재를 인식하고 자신의 〈외로움〉을 환기한다. “나는 늘 불쾌할 정도로 외로웠다.”는 화자의 고백을 경유하여 설명할 길 없는 소음을 내는 냉장고는 하나의 주체로 격상된다. 불쾌를 촉발하는 원인이었던 〈소음〉은 이제 〈인격〉의 증거가 되고 냉장고는 〈강한 발언권〉을 가진 공감의 대상이자 주체가 된다. 화자는 냉장고의 〈받아버려!〉라는 자세를, 부패와 투쟁하는 존재 방식을 동경한다. 이제 화자에게 있어서 냉장고는 가전제품이 아닌 소통 가능성을 지닌 주체이고, 그리하여 20세기는 냉전의 시대가 아닌 〈환상적인 냉장시대〉가 된다. 


    소설의 후반부 내내 ‘냉장고에 소중한 것 혹은 해악이 되는 것을 넣기’라는 모티프가 반복된다. 이때 냉장고는 장기 보존해야 할 식품의 저장소라는 본래의 존재 의의를 넘어서 ‘다른 무엇’이 된다. 그러나 앞서 제기한 문제는 충분히 해명되지 않았다. 냉장고에는 소중한 것과 해악이 되는 것이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소중히 여기는 것과 나쁜 것은 분리하여 두는 것이 상식이다. 근묵자흑이라는 성어는 우리네 삶의 지혜가 아닌가. 그런데 화자는, 그리고 박민규는 구태여 둘을 같은 공간에 넣는다. 보존이 목적이라면 해악은 왜 냉장고에 집어넣는 것이며, 부패의 척결을 위한 것이라면 어째서 소중한 것이 같이 들어가는지 독자는 명료하게 대답할 수 없다. 이와 같이 박민규의 소설에서 의미는 끝없이 미끄러지고 익숙한 이분법은 해체된다.


    「카스테라」에서 〈냉장고〉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흐리고 결국에는 무화시키는 ‘어떤 것’으로서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박민규의 글쓰기 방식을 통해 환상은 현실이 되고, 현실은 소설이 되며, 소설은 다시 환상이 된다. 이것이 〈냉장고〉가 존재하는 방식이며 「카스테라」가 지향하는 의식이다. 〈소중한 것과 해악이 되는 것〉, 〈아버지와 어머니〉, 〈미국과 중국〉 같은 이분법적 인식틀 너머에서 이 모든 것을 포괄할 수 있는 것이 문학이라고 한다면, 〈현실과 환상〉의 구분마저도 깨뜨리고 저 굳건한 현실의 논리를 깡그리 무시하는 〈냉장고〉의 존재 방식은 문학과 너무나도 닮지 않았는가. 화자는 급기야 “냉장고는 하나의 세계가 되었다.”고 진술한다. 냉장고는 훌리건이며, 세계이며, 허구이며, 진실이다. 이로써 냉장고는 곧 ‘문학’과 동의어가 된다.


    아직 해소되지 않은 의문이 하나 더 있다. 별 것 아닐 수도 있지만 다시 한번 소설의 도입부를 펴보자. 화자는 신이 “열을 좀 식히라고” 훌리건을 냉장고로 환생시켰다고 말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화자가 냉장고의 전생을 훌리건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은 바로 그 열과 같은 계열의 단어인 〈소음〉 때문이다. 냉장고-훌리건은 신의 바람과 달리 이번 생에도 열을 식히지 못하고 큰 소리를 낸다. 작품이 항상 작가의 뜻대로 쓰이지 않듯이, 냉장고는 조물주의 뜻을 고분고분히 따르지 않는다. 여기서도 〈냉장고〉를 문학에 대한 하나의 은유로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자, 신은 실패했다. 그러나 냉장고는 아직 실패하지 않았다.


    냉장고를 만져본 적이 있는가? 차가운 속과 달리 냉장고의 겉은 항상 뜨겁다. 그런데 냉장고 내부에 있었던 카스테라는 도리어 따뜻하다. 〈냉과 열〉이라는 이분법조차 냉장고에서는 해체되며, 이항은 공존하게 된다. 그리고 이 〈냉과 열〉이라는 키워드 또한 문학의 특성과 연관하여 읽을 수 있다. 다음은 매년 국내외 작가들을 초청하는 서울국제작가축제의 슬로건이다.



문학은 차가운 반영이자 뜨거운 개입입니다.



 — 그렇다. 〈냉장고〉는 바로 〈문학〉이다. 내부는 차갑고, 바깥은 뜨겁다. 어쩌면 박민규는 〈소음을 내는 냉장고〉를 〈훌리건의 환생〉으로 연결시키면서 이미 초장에 이 소설이 메타소설임을 암시한 것은 아닐까?








세기말의 글쓰기와 다음 세기의 글쓰기


    다음 세기를 상상하는 것은 세기말의 특권이다. 백 년의 막바지는 항상 새로운 시작에 대한 두려움과 두근거림을 잉태하는 법이다. 지난 세기, 밀레니엄의 끝에 인류는 수많은 종말론을 얘기했고, 빛나는 다음 세기에 대한 찬가를 부르기도 했다. 6장의 끝에서 세기의 마지막 밤에 있는 화자는 다음 세기를 상상한다. 이 단편집이 2000년 이후 출간되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이는 너무 이르거나 혹은 때늦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크게 어색하지는 않다. 「카스테라」에서 드러나는 박민규의 글쓰기 방식은 너무나도 세기말적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것을 뒤집는 새로운 글쓰기 방식은 〈부조리한 세계와 이를 마주한 자아의 발견〉이라는 근대적인 문학 이후의 새로운 문학을 기대하게 한다. 김영하가 ‘신언문일치체’라고 명명한 박민규의 말하는 듯한 문체는, 통속적인 장르 문학의 소재와 인터넷 유머들을 망설임 없이 레퍼런스로 삼는 박민규의 소설은, 이미 기존에 문학이 존재하던 엄숙한 정전正典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문학을 상상하게 만든다. (데뷔작인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부터 표절에서 자유롭지 않은 박민규가 그 장을 열어젖혔다고 할 수는 없더라도, 최소한 국내 순문학의 범주를 넓히고자 시도했다는 데에는 딱히 반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 다른 길의 한복판에서 박민규는 말한다. 



다음 세기에는 이 세계를 찾아온 모든 인간들을
따뜻하게 대해줘야지, 라고 나는 생각했다.
추웠을 테니까.
많이 추웠을 테니까 말이다.



    이윽고 들어선 7장. 새로운 세기의 시작에서 〈강한 발언권〉을 가지고 주장을 멈추지 않던 냉장고는 갑자기 고요해진다. 어제까지만 해도 하나의 세계, 소중한 것과 해악의 뒤섞임이었던 냉장고 안은 이제 아무것도 없다. 오로지 희고 깨끗한 접시 하나와 한 조각의 ‘카스테라’만이 거기에 있을 뿐이다. 냉장고 안에 있던 그 카스테라는 놀랍도록 따뜻하다. 마침내 화자는 그 카스테라를 씹으며 눈물을 흘린다.


    가라타니 고진은 일찍이 근대 문학의 종언을 선언했다. 문학이 영원할 것이라는 낭만적인 기대와는 달리, 문학 또한 철저히 역사적인 구성물이며 문학을 키워낸 하나의 시대가 벌써 끝나가고 있다는 이 씁쓸한 예언은 실현된 것 같다. 어쩌면 이미 지나갔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더 이상 책을 찾지 않는 시대에, 문학-냉장고는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인류가 존속하는 한 끝나지 않을 여러 윤리적인 테제들, 이데올로기적 대립, 영영 타인과 맞닿을 수 없는 인간의 실존적 소외, 기타 수많은 삶의 문제들에 대해 문학은 정답을 줄 수는 없다. 그러나 답을 모르더라도 작가들은 여전히 각자의 방식으로 응답할 것이다. 따라서 박민규에 대한 비판 —현실 도피적이고 관념이 얕다는— 은 일견 유효하지만 부당한 듯싶기도 하다. 박민규의 글쓰기가 지니는 한계는 박민규만의 한계라고 볼 수는 없다. (차라리 박민규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명명백백한 표절 건과 맹숭맹숭한 그의 후속 대처에서 드러난 그의 무딘 작가 정신을 비판하는 게 낫지 않을까?)


    「카스테라」 이후 15년이 지났다. 지금 우리는 박민규의 소설을 통해 막연히 상상할 수밖에 없었던 ‘다음 세기의 글쓰기’가 무엇인지 대답할 수 있는가? 그 사이 한국 문단에는 “후장사실주의자”를 자처하는 일군의 작가들이 나타났고, 박상영을 위시로 하는 퀴어소설이 대두되었으며, 남성 주류문화를 성토하는 페미니즘 소설이 우후죽순 쏟아져 나왔다. 이들 중 누구를 지지할 것인지는 독자들에게 달려 있다. 박민규의 소설이 그랬듯, 당신이 읽은, 그리고 앞으로 읽을 모든 이 시대 작가들의 소설들은 당신의 “비평관을 검증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이다. 


    흐르는 물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알 수 없다. 우리가 하수처리장의 오물 속을 배회하고 있는지, 혹은 광활한 폭포의 하얀 알갱이가 되어 부서질 것인지는, 아직 오지 않은 다음 세기의 작가들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다만 당신이 문학의 현재와 한국문학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다음 세기로의 길목에 우뚝 놓인 세기말의 이정표로서 「카스테라」만큼은 한 번쯤 일독하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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