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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nui Jan 12. 2021

역사를 문학화하기: 아프리카의 비극과 그리스의 비극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의 주인공 오콩코와 오이디푸스


역사를 문학화하기: 아프리카의 비극과 그리스의 비극



                       “헤라클레스에게 선택권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중 뭐가 더 비극적일까?”
                   “선택권이 없는 거요. 모두 필연적인 일이라면 인물들은 희망이 없잖아요.”

                                                          영화 〈유전〉(2018) 中 



1. 치누아 아체베의 소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의 주인공 오콩코는 얼핏 단순한 듯하나 실은 복합적인 인물이다. 이는 오콩코가 그저 허구의 인물일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역사적 쟁점들을 응축하고 있는 하나의 메타포라는 사실을 염두에 둔 것이다. 오콩코는 우무오피아이며, 이보족이기도 하고, 나아가 아프리카이기도 하다. 따라서 아프리카의 역사를 복원하고 식민주의가 심어 놓은 열등의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작가 아체베의 의도를 떠나서는 이 소설과 주인공 오콩코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지적은 타당하다.


그러나 소설 바깥의 역사적 맥락이, 특히 이 소설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하여 그것만 가지고서 소설을 전부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뉴스 기사만 읽고 나서 축구 경기를 다 본 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 아닌가? 소설이 소설인 이상 그것은 무엇보다도 소설로서의 가치를 지녀야만 한다. 요컨대 우리가 어떤 텍스트를 좋아하는 까닭은 그것의 내용이나 표층적 의미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풀어내는 작가의 스타일과 그로 인해 열리는 다층적인 의미 때문이다. 제아무리 훌륭한 의도로 쓰인 작품이라도 의도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법이다.


만일 아체베의 소설이 한갓 선전 도구에 지나지 않는 무색무취의 작품이라면 아프리카 문학을 대표하는 고전이라는 현재의 위상은 심히 과장된 것이리라. 물론 나는 《부서지다》의 미학적 독창성이나 성취를 평가할 만큼 문학에 정통하지는 않다. 다만 역사적 의의를 차치하더라도 《부서지다》는 나름의 문학적 완성도를 갖춘 작품이며, 되레 그렇기 때문에 말미에 가서는 역사적 맥락들과 자연스럽게 맞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에서 두드러지는 아체베식 글쓰기의 특징으로는 먼저 잦은 속담과 격언의 사용일 것이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이보 문화와 풍습의 충실한 활용도 눈여겨볼 수 있을 테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이러한 주제들 대신, 주인공 오콩코의 영웅적 면모를 조명하고 이 작품의 비극성을 운명과의 대결이라는 모티프와 연관 지어 살펴보고자 한다.



2. 오콩코에 대한 해석은 상술하였듯이 작품 외적인 콘텍스트로 인하여 더욱 풍부해지지만, 소설 안의 인물로서도 그는 충분히 복합적인 캐릭터이다. 겉으로 드러난 오콩코는 시종 성급하고 폭력적이지만 그의 내면과 돌아가는 상황이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작가 아체베의 서술을 통하여 읽어낼 수 있다.


오콩코가 시도 때도 없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나약함에 대한 뿌리 깊은 공포 탓이다. 그는 아버지 우노카에 대한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있다. 어릴 적 친구가 아버지를 ‘아그발라’(여자 혹은 칭호가 없는 남성)라며 놀렸을 때 느꼈던 수모를 그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우노카는 실패한 사내였다. 그의 생애는 아버지가 겪은—그리고 아버지로 인해 그가 겪어야 했던—굴욕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의 과정이었다.


청년기를 거쳐 중년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그의 노력은 결실을 맺는 듯했다. 오콩코는 전쟁터에서는 가장 용맹한 전사였고, 일터에서는 수완 좋은 농사꾼이었다. 빚더미에 앉았던 아버지와 달리 그는 어머니와 동생들, 나중엔 세 아내와 여러 아이들을 성공적으로 부양한다. 그는 어려움을 이겨내고 자수성가한 사람이며, 사회적으로도 좋은 평판을 얻어 이미 젊은 나이에 “당대의 가장 훌륭한 사람”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소설의 막바지에 이르러 오콩코는 한순간에 몰락하고, 끝내 스스로 목을 매달고 만다. 파멸의 원인으로 먼저 그의 오만한 태도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작중 내내 오콩코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 한다. 그의 완고한 의지가 더 이상 먹혀들지 않게 되었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밖에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달리 없었다. 



3. 오만은 영웅을 영웅이도록 만든다. 영웅은 본디 자기중심적이며, 스스로를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로 이해한다. 오만이야말로 그들을 세인들로부터 구별 짓는 영웅의 마지막 조건이며 완고한 운명의 경로와 맞서 싸우기를 추동하는 내적인 힘이다.


그러나 운명과의 대결은 보통의 싸움과는 전혀 다르다. 운명은 결코 길들여지지 않고 언젠가는 기수를 바닥에 떨어뜨린다. 오만함은 이제 성격적 결함으로 여겨지고, 영웅은 파멸에 이른다. 영웅의 전범이라 할 수 있는 헤라클레스는 어찌하여 광기와 고통으로 몸부림치게 되었는가? 영화 〈유전〉에선 그가 교만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희곡 내내 서서히 드러나는 비극의 전조들을 전부 다 무시해 버린 결과, 저승을 제집 안방처럼 드나들던 반신 헤라클레스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진짜 죽음을 맞이한다.


비단 헤라클레스가 아니더라도 그리스 비극의 영웅들과 오콩코의 공통점을 찾기는 어렵지 않다. 소설의 초장에서부터 우리는 오콩코를 오이디푸스와 비교해 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특히 나약함을 억압하고 아버지를 지양하려는 오콩코의 잠재의식은 언뜻 정신분석학적인 개념들로 설명하기에 안성맞춤인 듯하다. 더욱이 오콩코가 부족의 남성적 질서를 내재화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소설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변형된 알레고리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은워예를 또 다른 오이디푸스로 읽는 것도 재미있는 시도일 테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프로이트와 라깡이 원용한 ‘오이디푸스’가 아닌 소포클레스의 원작 《오이디푸스 왕》의 주인공 ‘오이디푸스’에 초점을 맞추도록 하자.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그 구조나 서사는 물론 인물의 에토스에 있어서 그리스 비극의 원형으로 꼽히는 작품인 바, 오콩코와 오이디푸스를 비교하는 것이 《부서지다》의 비극성과 오콩코의 영웅적 면모를 드러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아닐까 하는 기대에서이다.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

4. 오이디푸스가 누구인가? 코린토스의 왕자였던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할 것”이라는 신탁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나라를 떠난다. 오이디푸스는 통행을 방해하던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푼 공로로 테바이의 왕이 된다. 과부가 된 왕비를 취한 것은 덤이었다. 그러나 사실 오이디푸스는 테바이의 왕 라이오스가 버린 자식이었고, 그가 방랑하던 도중 죽였던 나그네는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 라이오스였다. 그가 사랑하던 아내는 알고 보니 그의 친모 이오카스테였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눈을 파내고 황야를 떠돈다.


오이디푸스의 가장 큰 결점은 오만이었다. 라이오스를 죽인 자를 찾으려 할 때조차도 행위의 동기가 된 것은 바로 오만함이었다. 그는 관대한 사람으로 보이기를 바랐고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인식 가능한 범위 너머에 있는 운명의 소용돌이는 그의 예상보다 훨씬 거칠고 불가해한 것이었고, 결국 그는 자기 눈을 파내고야 만다.


오콩코 또한 운명과 쉬이 타협하지 않는다. 그 역시 스스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살면서 여러 차례 운명에 도전한다. 인생 초년기의 시도들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끔찍한 가뭄을 겪기도 하였으나 운명은 그를 총애했다. “그가 ‘그래’라고 하면 그의 치도 ‘그래’라고”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비극의 단초는 오콩코가 이케메푸나를 죽인 이후부터 서서히 떠오른다. 아들이나 마찬가지였던 이케메푸나 살인은, 행여라도 그의 유전자에 새겨졌을지 모를 아버지의 나약함—유전은 운명의 유의어이다—을 억누르기 위한 오콩코의 발버둥이었다. 자기도 모르는 새에 아버지를 살해한 오이디푸스와, 자기를 아버지라 부르며 살려 달라는 이케메푸나를 죽인 오콩코를 그 권한과 책임에 있어서 동일 선상에서 바라보기는 어렵더라도, 최소한 오콩코의 행위가 그 자신의 잔인한 기질에 의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이후 고통받는 오콩코의 모습을 통해 엿볼 수 있다. 각기 다른 동기에서 비롯된 오콩코와 오이디푸스의 살해 행위는 운명과 운명에 저항하려는 두 힘 간의 길항 작용이 낳은 불가피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서로 겹쳐진다. 


이때부터 그의 치는 삐딱선을 타고, 오콩코는 운명과 죽을 때까지 반목하게 된다. “자기는 긍정하지만 그의 운명이 부정”하게 된 것이다. 오만한 오콩코는 다시 운명을 자기 것으로 되돌리려 하나, 이미 너무 늦었다. 개별적인 치를 넘어서는 시대의 조류가 벌써 그의 허리춤까지 차오른 것이다. “물이 발목 정도에 찼을 때 물을 퍼내야 한다”는 동료의 연설은 때를 놓쳤다. 메뚜기들이 선발대를 보내듯 비극의 전조는 이미 나타났었으나, 마을과 오콩코가 이를 간과했을 뿐이다. 제국주의라는 메뚜기 떼 앞에서 “으르렁거리는 불길”과 같은 오콩코는 마지막 포효를 하고 사그라드는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오만함이 야기하는 이러한 비극적 서사는 문학 작품으로서의 보편성을 띠게 된다.








5. 글머리에 언급한 교수와 학생의 짧은 대화는 영화 〈유전〉의 주제, 그리고 모든 비극의 핵심을 관통한다. 〈유전〉의 주인공 가족은 운명의 쳇바퀴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지만, 악마 파이몬의 제물로 바쳐지는 결말을 그들은 뒤바꿀 수 없다.


이처럼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을 인물이 기어코 거스르고자 할 때 이야기는 비극성을 띠게 된다. 그리고 운명을 거부하는 이들은 오콩코가 그의 친구 오비에리카에게 “가장 위대한 남자”로 일컬어지듯 종종 영웅으로 추앙받기도 한다.


오콩코는 그때까지 그가 절대적 가치로 삼던 부족의 전통을 어김으로써 역설적으로 서구 제국주의에 의하여 침탈당할 공동체의 비극적 운명에 마지막으로 저항한다. 오콩코의 저항을 계기로 이보족의 전통과 서구의 제국주의, 그리고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 사이의 모순과 갈등이 마침내 첨예화된다. 하지만 그것은 이어질 폭발의 불씨를 댕기는 대신 단발적인 이벤트로 그친다. 비록 소설에서 묘사되지는 않지만 오콩코의 동족들이 그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그가 치안판사의 전령을 살해했을 때 보여준 두루뭉술함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치안판사는 한술 더 떠 오콩코를 흥미로운 가십거리 취급한다. 이는 그간 비아프리카인들이 그들을 바라본 시선이 실은 치안판사와 별반 다를 바 없으며, 아프리카인들 스스로에게도 얼마간 비극을 관망한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물론 당시를 살았던 소설 속의 인물들은 그들 자신과 오콩코의 행위가 가지는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를 이해하고 통렬하게 반성하는 것은 소설이 된 역사를 읽는 후대인들의 특권이자 과제인 셈이다.)


이러한 시점의 비대칭성과 가치관의 엇갈림이 《부서지다》의 비극성을 더욱 심화시킨다. 아체베의 말마따나 “그것은 그저 개인적인 비탄이 아니”게 된다. 오콩코의 슬픔은 우무오피아, 아프리카, 나아가 모든 식민지 역사의 슬픔인 셈이다. 우스운 원시인 오콩코는 아체베의 글쓰기를 통하여 영웅적 면모를 지닌 비극적 주인공으로 승화된다. 


오콩코와 오이디푸스의 서사는 인간이 아무리 잘났건 간에 세계와의 간극, 그 틈에 도사리고 있는 심연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없음을 암시한다. 기껏해야 젊은 시절의 오콩코나 오이디푸스처럼 일시적인 지연만 가능할 뿐이다. 심연은 결국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주체를 움켜쥐고 숨통을 조여 온다. 난폭한 운명의 자의성에 도무지 항복할 수 없는 영웅적인 인간들은 항복하는 대신 제 몸을 모두 불태우고, 그곳엔 재 가루만이 남아 처량하게 흩날린다. 


아체베가 출발한 곳은 식민 지배 시절의 아프리카, 개중에서도 이보 부족의 우무오피아 마을이라는 아주 특수한 시공간이었다. 그러나 아체베가 펜을 휘둘러 행한 부두술—주술적 미신이 아닌 근대적 예술로서의—은 “니제르강 하류의 원시 종족”에게 사람다움을 되찾아주고, 자신의 역사적 뿌리에 보편적 서사를 부여하며 그들을 실재했던 인간으로 되살리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하여 오콩코—아체베—는 이보족의 화신으로서 역사적 비극을 문학적 세계로 끌어들이는 어려운 과제를 비로소 완수하게 되는 것이다. 


치누아 아체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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