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
사랑은 메타포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
내 노트북 배경 화면은 르네 마그리트의 ‘사람의 아들’이다. 내가 알기로 이 작품은 연작이라 다양한 판본이 있다는데, 내 노트북 화면에는 번듯한 양복 차림에 약간은 이상스러운 차렷 자세로, 중산모자를 머리에 얹고, 둥실 뜬 초록색 사과에 얼굴이 가린 남자가 서 있다.
나는 마그리트라는 사람을 좋아한다. 미술에 관해서는 형편없는 문외한이라 무어라 말할 게 없지만, 그의 그림이 내뿜는 중력이 나를 잡아당긴다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얘기할 수 있다. 그에 대해 아는 거라고는 기껏해야 나무위키에 씌어 있는 정도가 고작이지만, 그를 잘 알지 못하더라도 나는 그를 좋아할 수 있다. 그가 그런 그림을 그렸고, 나는 그런 그림을 좋아하니까. 순전히 우연히.
요즘 읽고 있는 과학 책이 있는데, 거기서는 사람이 브로콜리를 좋아하고 싫어하고를 결정하는 것은 유전자라고 말한다. 하지만, 어떤 그림을 사랑하고 말고는 아마도 우연에 달린 일이라고 나는 믿는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그러한 것과 같은 이치다. 미적인 감각이래도 좋고, 스타일에 대한 판단이래도 좋다. 어쨌든 우리는 직관의 지배를 받고, 직관은 살면서 맞닥뜨리는 숱한 우연들에 의해 변형된다.
그러니까, 내가 마그리트라는 사람과 그의 그림을 좋아하는 까닭은 운명적인 우연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다. 운명적인 우연이란 말이 의미론적인 오류로 보이더라도 상관없다. 기호논리학에서는 이런 개념을 정의할 수 없을지 몰라도 사람의 세계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아무런 오류도 없다. 일단 좋은 것은 아무튼 하여튼 좋은 것이고, 따라서 그것은 우연인 동시에 운명이라고 불러야 옳다.
알다시피 2011년 민음사에서 출간을 시작한 쿤데라 전집의 표지는 마그리트의 그림들로 장정되어 있다. 사실 쿤데라와 마그리트 사이에는 별다른 연결 고리가 없다. 그러므로 책의 표지에는 고흐를 쓸 수도, 피카소를 쓸 수도 있었다. 달리나 마티스도 안 될 것 없다. 아니면 비교적 무명에 가까운 프랑수아 피카비아라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판본의 표지 그림이 피카비아의 작품이다.)
쿤데라와 마그리트라는 상관없는 두 예술가를 엮어준 것은 다름 아닌 중산모자다. 마그리트는 뚜껑이 불룩한 중산모자를 쓴 남자를 여러 장 그렸고, 쿤데라의 소설 중 한 편에는 중산모자를 물려받은 여자가 나온다. 그걸 본 한국 출판사의 편집자가 마그리트의 그림으로 쿤데라 전집의 표지를 디자인하자는 아이디어를 냈고, 본디 2차 가공을 허락하지 않는 마그리트 재단이 기꺼이 허락함으로써 쿤데라의 글은 마그리트의 그림과 접합한 것이다. 마치 원래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그리고 나로서는, 마그리트의 그림이 그려진 소설을 좋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우연이든 운명이든 간에. 소설 속 쿤데라의 문장을 빌리자면, 사랑은 메타포로 시작된 것이다. 달리 말하면, 한 작가가 어떤 화가의 그림을 통해 나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진 순간, 사랑은 시작된 것이다.
쿤데라의 소설 속 여인이 물려받은 모자가 중산모가 아닌 중절모였다거나, 또는 스냅백이었다거나, 챙이 멋스럽게 구부러진 나이키 볼캡이었대도 나는 그의 소설을 좋아했을까? 아니면 마그리트에게 영감을 준 남자의 모자가 다른 모자였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쿤데라의 소설을 좋아했을 것이다. 방금 전까지 내가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댄 시적인 순간과는 별개로, (아직 세 작품밖에 안 읽어봤지만) 쿤데라의 소설은 내가 마그리트의 그림을 좋아하도록 만든 어떤 근본적인 미적 감각과 완벽히 부합한다. 구태여 이러한 미적 감각의 정체를 말로 풀이하자면, 자기 그림에 대해 마그리트가 남긴 코멘트를 빌려 오는 게 좋겠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다른 어떤 것을 가리고, 우린 항상 보이는 것에서 가려진 것을 보길 원한다.”
마그리트의 미학은 곧 미스터리다. 미스터리의 사전적 정의는 ‘도저히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이상야릇한 일이나 사건’이다. 마그리트는 이렇듯 불가해하고 설명이 불가능한 이상야릇한 수수께끼에 매달렸다. 그의 그림을 보고 있자면 마치 그림이 스스로 해석을 거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것도 아주 단호하게. 마그리트의 그림은 말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를 (조금 시니컬하다고 느껴질 만큼) 차분히 응시한다. 마주친 시선은 있을 수 있지만 실현되지 않은 또 다른 세계로 감상자를 몰고 간다. 그렇게 해서 마그리트의 그림은 현실도 비현실도 아닌 초현실에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비처럼 하늘에서 쏟아지는—또는 솟구치거나 아니면 그냥 그대로 떠 있는—남자들, 밤과 동침하는 낮의 풍경, 하얀 베일을 뒤집어쓴 채로 키스하는 두 명의 얼굴 없는 남녀, 파이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파이프 또는 글씨, 그리고 공중을 부유하는 사과에 얼굴이 가려진 중산모를 쓴 남자…
쿤데라가 자기 소설에서 다루는 테마도 마그리트와 다르지 않다. 쿤데라의 펜촉은 미스터리와 수수께끼라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마그리트가 붓으로 하는 것을 쿤데라는 펜으로 할 뿐이다. 그런데 그들을 매혹시킨 이 수수께끼는 우리가 발 딛고 선 세계와 동떨어진 선문답이 아니라, 틈만 나면 우리의 세계에 틈입하고 출몰하는, 그러면서도 결코 베일을 벗지 않는 삶의 수수께끼다. 명료하게 재단되지 않는, 심지어는 그것을 아예 거부하는 삶을 쿤데라는 기어코 소설로 그려 낸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화두가 되는 것은 니체의 영원 회귀라는, 우리의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가설이다.
아마도 쿤데라는 영원 회귀를 삶의 모든 순간에 흩어져 있는 가능성의 지평에서 바라보는 듯하다. 삶은 무수한 우연들이 일구는 길이다. 한데 우연이라 함은 덧없음을 뜻하므로 길을 계속 걷다 보면 우리는 언젠가 어쩔 수 없는 허무를 마주쳐야 한다. 허무는 특히 신을 조소하고 세계를 일회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현대인들에게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현대인들에게는 지독한 허무주의자가 되거나 일신의 안락과 즉각적 만족만을 추구하는 생존기계로 전락하는 이지선다 문항이 주어진다.
이러한 허무를 가리기 위해, 인간은 오래전부터 여러 장치들을 개발해왔다. 신이라는 이름으로 표상되는 절대자도 개중 하나일 테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주장은 일견 타당하다. 우리는 신을 상상함으로써 허무에서 벗어나고,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담 구름 위에 신의 나라가 없다는 것을 유치원생조차 당연하게 여기는 오늘날, 사람들은 어떻게 삶을 영위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각자의 환상을 만들어내고 그 환상 속에서 살아간다. 환상은 파괴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재생산하며 사람의 눈을 가린다. 어떤 이의 눈은 초록색 사과를 보고, 또 다른 이의 눈은 하얀 비둘기를 본다. 소설이 말하는 ‘키치’라는 것,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라는 것은 이러한 환상을 의미한다. 환상은 사람에게 의미를 부여하고 무게를 더한다.
다시 현대인의 삶이라는 문항을 살펴보자. 더 이상 이지선다가 아니다. 삶이란, 특히 현대인의 삶이란, 끝없는 선택지를 놓고 매 순간 풀어내야 하는 다지선다 문항이다. 무수한 가능성들을 고르고 걸러 내는 가운데 삶이 심연으로부터 떠오른다.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무게’다. 환상의 무게를 기꺼이 짊어질 것인가, 혹은 환영처럼 공중 답보를 하며 살아갈 텐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속 네 명의 등장인물들은 각각의 상이한 태도로 삶에 대응한다. 소설은 토마시는 가볍다거나, 테레자는 무겁다거나 하는 등의 방식으로 간단하게 삶의 태도를 구분 짓지 않는다. 실제의 삶은 그렇게 단순한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토마시는 가벼운 관계를 추구하지만 테레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기도 하고, 자신이 쓴 글에 침을 뱉는 대신 커리어를 내던질 만큼 무거워질 수 있다. 하지만 그러고 나서는 자신의 삶에 키치라는 무게를 지워줄 수도 있는 서명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의 선택은 순전히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다. 그런가 하면 테레자는 서로가 서로를 책임지는 무거운 사랑을 꿈꾸지만, 그녀의 무거움과 가벼움은 파르메니데스식의 — 또는 플라톤부터 데카르트로 이어지는 서구 형이상학식의 — 영육의 이분법과는 같지 않다. 그녀에게 무거운 것은 육체가 아닌 영혼, 그 영혼이 품고 있는 고유성이다.
요컨대 삶의 무게를 다는 저울은 모든 경우에 동일한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인생이란, 아주아주 복잡한 것이다. 그리고 쿤데라는 이러한 삶의 복잡다단함이 잉태하는 신비를 기어이 드러내려는 작가다. 전통적인 픽션에서는 작가의 목소리를 숨기고 픽션과 현실의 이음매를 감추는 것이 미덕이지만, 쿤데라는 거리낌 없이 목소리를 내고 소설의 실밥을 보여준다. 그러나 소설 창작의 과정, 즉 작위를 전시하는 그의 작법은 결코 인위적이지는 않다. 그는 가능한 하나의 세계를 그렸을 뿐임을 우리에게 시니컬하게 말한다. 쿤데라가 창조한 평행 우주는 벌써 홑겹이 되어 버린, 참을 수 없으리만치 가볍고 무상한 우리의 현대에 층을 더해주지만, 섣불리 무거운 짐을 지우지는 않는다. 그는 테레자로 하여금 "행복은 반복의 욕구"라고 생각하도록 만든 카레닌이라는 모델을 제시하지만, 우리 모두 알다시피 인간은 개가 누릴 수 있는 반복되는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저주받은 짐승이다. 그런 고로, 얼마큼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 것인가, 자기 삶에 어느 정도의 무게를 지울 것인가는, 전적으로 각자에게 달린 문제다.
소설은 답을 주지 않는다. 소설가는 불확실과 부조리로 가득한 이 세계에 정답 따위는 없다는 끔찍한 사실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려는 사람이다. 우리가 매몰된 삶에서 우리를 건져내는 것, 그럼으로써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것. 오직 그것만이 소설의 역할이요, 모럴이다. 쿤데라는 해야 할 모든 일을 해냈다. 소설 속 그의 목소리를 되새기며 글을 마친다.
... 내 소설의 인물들은 실현되지 않은 나 자신의 가능성들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그들 모두를 사랑하며 동시에 그 모두가 한결같이 나를 두렵게 한다. 그들은 내가 우회하기만 했던 경계선을 뛰어넘었다. 나는 바로 이 경계선(그 경계선을 넘어가면 나의 자아가 끝난다.)에 매혹을 느낀다. 그리고 오로지 경계선 저편에서만 소설이 의문을 제기하는 신비가 시작된다. 소설은 작가의 고백이 아니라 함정으로 변한 이 세계에서 인간 삶을 찾아 탐사하는 것이다. 자, 이제 그만하고 토마시의 이야기로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