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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nui Jan 14. 2021

아름다움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가? (2)

위대한 소설이 우리에게 감추지 않는 것 (《롤리타》서평)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작품 《롤리타》에 대한 서평입니다. 길이가 길어지고 전반부와 후반부의 성격이 달라 두 편으로 나누었습니다. (1) 편은 《롤리타》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과 이현우 님의 해석 및 이에 대한 비판을, (2) 편은 제 개인적인 해석을 수록합니다.


※본문에 기재된 페이지는 모두 문학동네 리커버판 기준입니다.


문학동네 리커버



아름다움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가?

위대한 소설이 우리에게 감추지 않는 것




(1) 편에 이어...


지금부터는 방향을 좀 바꿔 보자. 나보코프는 상징과 비유를 싫어한다고 분명하게 말했지마는, 작가 자신과 예술을 풍부하게 감상하고자 하는 독자에게 상징과 비유는 아주 효과적인 무기가 될 수 있다. 험버트가 뻑뻑한 콜트를 친구라 부르고, 롤리타를 빛이요, 몸에 붙은 불이요, 죄이자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나쁜 것은 상징과 비유가 아니라, 길을 잃게 만드는 나쁜 상징과 나쁜 해석이다. 

  고로, 의미에 목마른 독자라면 메타포와 알레고리의 바다로 나가기를 주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바닷물로는 갈증을 달랠 수 없듯이 텍스트에 근거하지 않는 해석은 말짱 도루묵이다. (참고로 도루묵은 바닷물고기다.) 무수한 해석을 낳는 메타포와 알레고리가 바다라면, 텍스트는 돛과 든든한 선체, 나침반이다. 텍스트에서 근거를 찾고 그 적실성을 검증하는 작업은 해석의 구조를 세우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멀리 돌아 다시 ‘롤리타’로 돌아왔다. 이제 우리는 롤리타의 의미와 상징, 험버트 험버트와 퀼티, 그리고 작가 나보코프의 관계 등에 대해 따져 물어야 한다. 언제나 과잉 해석—예를 들면 《롤리타》를 유럽과 미국에 대한 우화로 읽는다든지 하는—을 경계한 작가의 당부는 당부대로 주의하되, 텍스트 안팎에 흩어진 진주알들을 꿰어 그럴싸한 목걸이를 만들어 보자.




언어예술로서 《롤리타》의 가치는 아까 언급하기도 했고 일부러 부연하지는 않겠다. 취향에 안 맞을 수는 있어도 《롤리타》가 시적인 표현과 말맛을 살린 유머, 정갈하고도 도발적인 문장과 관능적인 묘사로 채워진 20세기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롤리타》가 지니는 서사예술로서의 가치, 소설의 이야기와 형식이 자아내는 마력에 대한 분석은 아무래도 찾아보기가 어렵다. 

  바로 앞의 문장에서 매력 대신 마력이란 단어를 쓴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내가 읽기에 《롤리타》는 마법적인 소설, 또는 마법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도취의 순간에 대해 말하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대목에서 당신은 ‘마법에 걸린 사냥꾼’(The Enchanted Hunter)을 떠올렸을 것이다. 소설 안의 장소이자 가상의 희곡인 ‘마법에 걸린 사냥꾼’은 이야기의 흐름상 중요한 역할을 맡을 뿐만 아니라, 험버트 험버트, 퀼티, 롤리타, 심지어는 나보코프의 마법에 홀린 독자에 이르기까지 텍스트 안팎의 여러 인물들이 놓인 상황을 은근히 환기하는 중요한 메타포이다. 

  이를테면 험버트에게 ‘롤리타’는 마법의 주문이나 사랑의 미약이 아닐까? 일상을 부수고 틈입하는 초월적인 순간, 도무지 거부할 수 없는 세이렌의 노래라면? 느닷없이 솟구치는 순수하고 황홀한 기쁨은 광기와 구분할 수 없다. 마법에 걸린 행위자는 의지와 의무의 영역을—"인과응보에 대한 두려움마저” 뛰어넘어,(98p) 아무런 계산 없이 행위 자체로 뛰어든다. 험버트 험버트는 병리학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이러한 의미에서 진정한 정신 착란증 환자다. 우리는 이들을—그리고 우리를—홀리는 이 마법의 정체에 주목해야 한다.



1) 험버트 험버트와 클레어 퀼티

  누구라도 눈치챘을 테지만 퀼티Quilty는 guilty(유죄의)라는 형용사에 구체적 형상을 씌워 만들어낸 상징적 인물이며, 험버트 험버트와 거울상 관계를 이룬다. 딱히 그리스도교적인 가르침을 참조하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다른 대상을 찾아 먹어 치워야만 존재를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원죄를 지니는 동물이다. 그렇기에 험버트는 원래부터 유죄Guilty이지만 그 죄는 아직 형태를 부여받지 못한 채로 잠재되어 있다. (퀼티는 초반부터 계속 언급된다.) 그러나 캠프Q에서 험버트가 돌로레스를 데려오는 그때에 죄는 구체적 형상Q+uilty을 띠고 험버트의 앞에 나타난다.

  퀼티와 험버트는 죄를 공유한다. 죄목은 사춘기 소녀 돌로레스 헤이즈를 기망하고, 쾌락과 탐욕의 대상으로 삼아 그녀의 운명에 어두운 흉터를 남긴 것, 그 흉터를 외면하거나 망각되도록 놔둔 것일 테다.

  퀼티는 독자로 하여금 험버트의 죄악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도록 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롤리타가 소설의 주인공인 험버트 험버트가 아닌, 그의 분신이자 안타고니스트인 퀼티를 사랑했다는 것이다. 험버트는 롤리타를 빼앗겼다고 생각하고 퀼티를 응징하려고 하지만, 기실 그가 응징하게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험버트는 롤리타에게서 누구도 보지 못하는 매력을 포착하고, 누구보다 열렬하게 그녀를 숭배함에도 불구하고 충실한 아빠는커녕 애인이 되는 것마저 실패한다. 험버트의 실패는 오롯이 그 자신의 책임이다. 그는 오로지 돌로레스의 육체와 도발적인 천박함으로 이뤄진 가상의 ‘롤리타’를 손에 넣는 것에만 흥미가 있는 무책임한 탐미주의자니까. 열두 살에 멈춰 성장하지 않은 험버트는 오직 자신만 있는 유아론적 세계에서 살며, 그가 사랑한 것은 실제의 소녀 돌로레스가 아닌 상상 속에서 재구성한 롤리타이다.

  아름다움과 예술, 사랑과 노스탤지어의 메타포인 ‘롤리타’는 사냥꾼의 심장을 마법처럼 잠식하고, 뇌를 마비시킨다. ‘마법에 걸린 사냥꾼’은 롤리타의 마력을 거부할 수 없다. 도취적이고 도착적인 이 현상은 “믿기 어렵겠지만 틀림없이 존재”하며(186p), 험버트의 소망은 “섹스가 아니라 그 위험천만한 마력을 영원히 붙잡아두는 것”(213p)이다. 같은 맥락에서, “성sex은 예술의 시녀”(411p)라는 험버트의 대사는 롤리타가 지닌 신비의 정체를 보다 또렷하게 보여준다. 험버트에게 롤리타는 이미 단순한 섹스가 아니라 예술이다. 

물론 험버트의 꿈은 실현될 수 없다. 환희의 순간은 순간일 뿐이고, 시간은 비가역적이기 때문이다. 


2) 롤리타와 퀼티

  롤리타는 어째서 퀼티를 사랑하는가? 험버트는 퀼티로 인해 죄악을 인지하지만, 퀼티는 되레 롤리타를 망각하고 지워 버린다. 험버트는 거울을 통해 퀼티를 보지만, 퀼티는 험버트를 볼 수 없다. 그는 단지 ‘마법에 걸린 사냥꾼을 쫓는 마법에 걸린 사냥꾼’이 되어 하염없이 욕망을 충족시킬 뿐이다. 무책임한 탐미주의자 험버트보다도 타락한 탐미주의자가 바로 퀼티다.

  그러나 그럼에도 롤리타는 발군의 심미안을 지닌 험버트가 아닌 퀼티를 사랑한다. 왜일까? 이에 대한 논리적인 답변은 불가능하다. 애초부터 비논리적인 일이므로. 험버트가 걸렸던 마법의 덫에 롤리타도 걸렸을 뿐이다. 

  덧붙이자면 퀼티는 스스로를 사냥감을 쫓는 사냥꾼으로 여길 테지만, 실은 그 또한 나보코프가 부린 마법에 걸린 한낱 피조물일 뿐이다. 또한 자신이 쫓던 험버트에게 쫓기는 사냥감이기도 하다. (퀼티에 대한 험버트의 살의 역시 마법의 다른 이름인 광기에 의한 것이다. 험버트의 퀼티 살해는 롤리타에 대한 속죄가 아니라 그 자신의 숙명이다. 롤리타는 험버트의 손에 퀼티가 죽기를 바란 적이 없다. 퀼티를 죽이고 험버트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린 것은 다름 아닌 작가 나보코프다.)


3) 예술과 예술가

  《롤리타》의 하이라이트를 꼽자면 나는 로가 테니스를 치는 장면을 꼽겠다. (나보코프도 이 대목을 소중한 부분 중 하나로 언급했다.) 롤리타는 승부에 연연하지 않는다. 웃음을 잃어 버린 롤리타를 웃게 하는 것은 테니스의 즐거움이 주는 순수한 희열이다. 롤리타는 아름답고 우아한 폼과 몸짓으로 이 순수한 기쁨을 체현한다.

  더없이 황홀한 장면이다. 아마 소설의 주인인 나보코프나 주인공인 험버트는 일개 독자인 나보다 수십 배는 강렬한 감정을 느꼈을 테다. 이 장면이야말로 《롤리타》가 눈 깜짝할 새에 도망가 버리지만 순간이나마 완벽한, 아름다움을 소유하려 하는 예술가의 딜레마를 그린 알레고리라는 주장의 가장 강력한 증거이리라.

  결론적으로 나는 《롤리타》가 아름다움을 게걸스레 핥아 먹으려는 예술가의 광기를 아주 잘 표현한 소설이며, 따라서 롤리타를 예술의 알레고리로 읽으려는 시도는 여타의 것보다 더욱 반박하기 어려운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름다움을 한없이 긍정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였다면 《롤리타》는 과한 수사적 액세서리로 치장한 고급 통속소설에 그쳤을 것이다. 《롤리타》가 위대한 작품이라면 그것은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던 험버트의 추한 민낯과 그가 치르게 되는 대가를 통렬하면서도 비통한 방식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윤리고 뭐고, 오로지 심미적 희열을 위해 글을 썼다는 나보코프의 작의와는 달리 《롤리타》는 인물들의 인생에 새겨진 아픔과 슬픔에도 진지한 관심을 거두지 않는다. 

  이러한 결론은 앞서 《롤리타》가 ‘비 윤리적’인 작품이라는 우리의 전제를 위반하는 것이 아니다. 나보코프에게 윤리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괜한 위악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나보코프는 예술과 아름다움만을 추구했다. 《롤리타》가 윤리적 문제를 건드리는 것은 역설적으로 철저하게 아름다움에 탐닉한 결과이며, 두어 줄짜리 교훈으로 요약하면 그만인 것이 아니라 이토록 숙고를 요하는 힘겨운 작업이다.




서술자 험버트는 “더러운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이 만나는 경계선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전혀 성공하지 못한 듯하다”(214p)고 술회한다. 그러나 아름다움과 죄악을 가르는 경계 같은 것은 원래 없다. 그 구분은 모두 자의적인 논리에 의하여 잠정적으로 정해진 것뿐이다. 누구도 그 완벽한 경계를 알 수는 없다. 다만 죄악에 잡아 먹힌 인간에게 어떠한 계기가 도래할 때, 간접적으로만 가늠할 수 있을 따름이다.

  예술과 사랑은 광기의 자식이고, 죄악은 부녀간의 근친이 낳은 사생아다. 이 소설이 윤리적인 작품이 아닌 까닭은, 롤리타를 상실한 험버트가 님펫에 대한 욕망을 멈추지 못하듯 죄를 인정한 서술자 험버트가 다시 주인공 험버트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죄를 저지르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롤리타》에는 속죄가 없다. 광기는 처음과 똑같이 험버트를 잠식할 것이고, 아마 험버트는 처음보다 능숙하고 편안하게 다시 죄를 저지를 테다. 깨달은 자조차 벗어날 수 없는, 이 아이러니와 모순의 갈림길이 곧 인생이며, 위대한 예술작품은 이를 결코 숨기려 하지 않는다. 

  인간은 끝없이 무언가를 욕망하고 대상화하는 존재며, 험버트는 우리와 다른 외계인이 아니다. 그도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다. “자신이 악인 것을 아는 악은 악인 것을 모르는 악보다 덜 끔찍하고 치유에 가까이 있다”고 일찍이 보들레르는 말했다. 만일 소설이 죄인을 구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소설이 죄의 기록인 덕택일 것이다.

  그러므로 《롤리타》의 윤리적 가능성은 차라리 서사예술이자 언어예술인 소설의 총체적·미학적 가능성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소설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 소설인가? 조심스럽지만 용기 있게, ‘언어로 진실을 이야기하려 하는 것’이 소설이다. 이게 당신이 소설을, 그리고 《롤리타》를 읽어야 하는 이유다. (사실은 나보코프의 창작인) 옛 시인의 말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의 양심이란

아름다움을 즐긴 대가로 치르는 세금 같은 것. (450p)


세금을 내는 것이 두려워 삶을 즐기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니 우리도 기꺼이 ‘마법에 걸린 사냥꾼’이 되어 달아나는 아름다움을 뒤쫓자. 예술은 인간을 구원할 수 없지만, 예술이 없이 인간은 구원받을 수 없다. 다만 한줌의 사무치는 양심을 지키려 간절히 노력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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