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왜 썼는지 모름
지난주부터 편의점에서 야간 알바를 시작했다. 편의점 알바는 처음이라 아직 낯설긴 하지만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조그만 점포라 별다른 어려움은 없다. 손님들도 대부분 담배를 사러 오는 게 고작이다. 다만 평생 담배를 입에도 대본 적 없는 비흡연자로서 갖가지 담배 이름을 외우려니 여간 귀찮은 게 아니다(나는 혐연자다).
일을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런대로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 여기에 옮겨 본다. 엊그제 새벽에 있었던 일이다. 안색이 파리하고 술 냄새를 풍기는 내 또래의 젊은 남자가 힘겹게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곧장 계산대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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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레종 블루
네?
달라고
잠시만요
뭐해? 없어?
아, 그게… 저 죄송한데 오늘만 다른 거 피우시면 안 될까요…?
야. 너 레종 데트르가 무슨 뜻인지 알아?
…뜻이요? 잘 모르겠는데요
존재 이유란 뜻이야 씨발놈아. 레종이 없으면 나는 존재할 수가 없다고. 레종이 없으면 우리는 왜 사는 거지? 레종이 없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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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색이 파리한 남자는 혼잣말을 마구 지껄이다가 말보로를 사서 나갔다. 별로 당황스럽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나빴다. 존재가 어쩌니 하는 심오한 얘기를, 것도 생면부지인 사람한테 떠들어대는 것은 무람없는 짓이다. 아무리 취했대도. 더구나 지금은 21세기 아닌가.
존재: 하지만 우리가 존재라는 단어를 기피하는 까닭은 이미 존재하는 존재자에게 존재 이유를 따져 묻는 것이 무례한 짓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훨씬 근본적인 문제다. 타인의 존재 이유를 묻는 사람은 자연히 자기 자신의 존재 이유도 문제 삼게 되는데, 존재의 담지자였던 신이 사라지고 존재의 근거라고는 불쾌한 생리 작용이 멈추지 않는 기계-몸뚱이밖에 남지 않은 21세기에 이런 물음을 던지는 사람은 자기 보존 기능에 심각한 훼손을 입게 된다. 사실 우리의 존재에는 아무런 당위도 없으니까. 내가 죽어 누워 있어도 세상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타인의 존재를 의문시하는 사람은 스스로의 존재 근거 또한 잃어버리게 되므로, 사람들은 누구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지지 않고 그냥 함구하기로 한 것이다. 존재자는 그냥 존재하는 것이다.
터부: 존재 이유에 대해 생각하지 말 것.
우리는 ‘실종된 레종 데트르raison d’etre의 시대’를 살고 있다.
우리는 ‘실종된 레종 데트르raison d’etre의 시대’를 살고 있다.
실종된 레종 데트르raison d’etre의 시대를 살고 있다
실종된 레종 데트르raison d’etre의…
밝혀야 할 것이 있다. 방금 전까지 내가 한 이야기는 완전한 허구다. 나는 최근에 편의점에서 알바를 시작하지도 않았으며 혐연자도 아니다. 레종을 달라는 안색이 파리한 남자도 내 상상 속의 인물일 뿐이다. A4 1매도 안 되는, 엽편이라기에도 민망한 이 글은 레종 데트르란 이름의 담배에서 시작됐다. 4500원에 스무 까치. 그깟 담배 따위에 존재 이유씩이나. (솔직히 그다지 맛있는 담배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을 몇 명 알고 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담배만이 삶의 이유일 수도 있다. 담배는 피우는 사람의 폐부까지 들어가 흉금에 얹힌 삶의 무게를 연기로 띄워 내보낸다. 삶이 너무 팍팍하면 뭐라도 해야 하는데 한숨을 쉬자니 땅이 꺼질까 두렵다. 티를 내지 않고 한숨을 쉬려면 담배를 피우는 수밖에 없다. 담배를 태우는 사람은 사실 한숨을 태우는 것이다. (후- 넌 이런 거 피우지 마라.) 브라운 운동을 하는 담배 연기는 표류하는 존재자의 분신分身이다. 그리고 담배는 분신焚身한다. 담배는 허무가 됨으로써 허무를 유예한다. 레종 블루를 피우는 남자. 말보로 레드를 피우는 여자. (있지도 않은) 존재 이유를 불사르고 마시고 내뿜으며 삶을 가장하는 사람들. 레종 데트르는 담배의 대명사다. 담배는 죽어 버린 시간의 대명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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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일은 일정 부분 담배와 유사하다. 글과 담배는 모두 허무에서 시작한다. 작가들 중에 유독 골초가 많은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소설은 파문과 파장에 관한 허구다. 읽고 쓰기는 죽은 시간에 돌을 던지는 행위다. 허구의 행위는 현실보다 더 진실하다. 수면 아래에서 헐떡이는 괴물을 상상하라. 돌멩이는 없지만 쥐고 있다고 가정하라. 돌을 쥐었으면 물수제비를 뜨자. 되도록 멀고 깊게 가라앉자. 소설은 가라앉음에 관한 허구다. 떠오름에는 기약이 없고 올라온대도 금세 사라질 방울진 기포에 불과하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돌을 던져야 한다. 담배가 제 몸에 불을 지르듯이. 후- 넌 글 같은 거 쓰지 마라…
) 나도 이 글을 왜 썼는지 모르겠다. 원래 이탈로 칼비노의 『존재하지 않는 기사』에 대한 글을 쓰려고 했는데 삼천포로 빠져 버렸다. 칼비노에 대한 글은 언제 쓸지 모르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