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국영 영화를 몇 편 보고 나서
1. T.S. 엘리엇은 4월이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다. 나는 엘리엇의 그 시를 아직 읽지 않았고 그 유명한 구절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잘 알지 못한다. 다만 나는 매해 사월이 되면, 그러니까 담뿍 흐드러진 벚꽃이 온 거리를 몽글몽글한 분홍으로 물들일 무렵이면, 엘리엇의 시구와 함께 누군가를 가끔 떠올린다.
커트 코베인. 커트 코베인은 사월의 다섯 번째 날에 죽었다. 악에 받친 목소리와 우수에 찬 눈빛, 반쯤 날아가 버린 그의 피투성이 얼굴을 생각하다 보면 초봄의 따스함은 사뭇 아릿하게 느껴지고, 시린 마음을 한층 시리게 만드는 솜사탕 같은 풍경의 무신경함에까지 생각이 미치면 나는 금방 우울해진다.
중학생 때 처음 너바나를 알게 된 이후로 커트 코베인은 내 머릿속에서 늘 혼자였다. 가끔씩 다른 이름들이 내 세계를 뒤흔들어 놓기도 했지만, 커트 코베인은 항상 맨 앞자리에 있었고 그의 옆자리는 항상 비어 있었다. 생이 약동하는 계절에도 맥박을 멎게 하는 지독한 우울. 그토록 사무치는 우울은 언제나 커트 코베인의 것이었다.
2. 만우절. 만우절에도 사람은 죽는다. 모두가 거짓말을 하는 날에도 부고장은 진실을 말한다. 장국영, 2003년 4월 1일, 홍콩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24층에서 투신, 본인상.
3. 최근에 장국영의 영화를 몇 편 몰아 보았다. 사실 나는 이번에 장국영을 거의 처음 본다. “거의 처음 본다”라는 말이 대체 무슨 소리냐면, 장국영이 출연하는 영화를 본 적은 있다는 말이다. 본 적은 있는데, 그 영화에서 장국영의 모습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달러에 불을 붙여 담뱃불을 붙이는, 선글라스를 끼고 성냥개비를 잘근잘근 씹는 주윤발은 또렷이 기억이 나는데, 젊은 장국영은 흐릿하기만 하다. 그러니까 이번에 장국영을 거의 처음 본다는 것이 전혀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장국영의 다른 영화를 이제야 보게 된 까닭은 아마 내가 왕가위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중경삼림〉과 〈화양연화〉를 보고 왕가위에게 약간 실망을 했었더랬다. 왜, 누구나 왠지 안 끌리는 감독이나 작품이 있지 않나. 나에겐 왕가위가 그랬다. 왕가위의 과잉된 스타일이 나는 조금 부담스러웠다. 기대치가 너무 커서 그랬는지도 모르겠고. 하여튼 왕가위를 안 보다 보니 왕가위의 페르소나인 장국영을 볼 기회도 없었다.
그렇게 한참 왕가위를 멀리하다가,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몇 주 전에 〈아비정전〉을 보게 되었다. 이전의 두 영화를 볼 때와는 달리 별 기대를 하지 않고 보았는데,
웬걸. 너무 좋았다. 앞서 말한 두 작품에 비해 비교적 투박하게 느껴지는 왕가위의 스타일이나 그가 고독을 다루는 방식도 물론 좋았지만, 결국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게 된 것은 순전히 장국영 때문이다.
4. 스포츠계에는 유명한 격언이 있다.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 이를 영화에 적용하자면, 영화보다 위대한 배우는 없다,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한데 가끔씩은 자명한 듯 보이는 이 격언으로는 당최 설명할 수 없는, 정말로 위대한 선수나 배우들이 우리 앞에 나타나곤 한다.
예를 들면, 〈아비정전〉의 장국영. ‘발이 없어 죽을 때까지 날아다녀야만 하는 새’가 사람이 된다면 그 새는 아마 장국영일 것이다. 다른 예를 들자면, 〈해피투게더〉의 장국영. 감히 말하건대 여기서 장국영은 배우가 아니라 보영(극중 장국영이 연기한 인물의 이름)이다. 양조위도 물론 훌륭하지만, 아무래도 장국영만큼은 아니다. 이래도 예가 부족하다면, 〈패왕별희〉의 장국영. 여기서 장국영은 정말 장국영이다. 가짜가 아닌 진짜 우희고, 진짜 예술가고, 이동진 평론가의 말마따나 그저 슬픔을 타고난 사람이다. 세 편을 거의 연달아 보고 난 뒤에 나는 계속 장국영의 표정을 생각했고, 눈빛을 생각했으며, 그의 죽음을 생각했다. 그런데 목소리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장국영은 죽기 전에 무슨 말이 하고 싶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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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어떤 사람은 도무지 세상을 사랑할 수 없어서 저절로 죽기 전에 스스로를 죽여야만 한다. 장국영과 커트 코베인처럼. 그리고 우리는 모두 잠깐씩이나마 그들만큼 외롭다. 살다 보면, 살다 보면 다 그렇지 않나. 적어도 나는 그렇더라. 감히 그들만큼 외롭다고 할 수 있을까 싶긴 하지만, 아무튼 그들처럼 외롭다. 매년 커트 코베인이 죽은 계절에 커트 코베인을 생각하고, 장국영이 죽은 날짜에 장국영을 기억하리라 다짐하는 것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나만의 추도식을 매년 열어야 하는 것은, 나도 가끔씩 그들처럼 고독한 까닭이다. 조금이라도 그들을 이해하고 싶다. 그건 나를 이해하는 길이기도 하다. 사람은 왜 외로운가? 왜 우리는 전적으로 혼자인가. 그리고 왜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죽여야만 하나.
어제 극장에서 〈패왕별희〉를 봤다. 슬펐다. 그리고 외로웠다. 사람이 가득 찬 만원 극장이었다면 좀 달랐을까. 아니면 그만큼 더 슬펐을까? 지금도 슬프다. 그리고 외롭다. 아무리 더 쥐어짜더라도 초등학생 수준의 감상밖에 더 덧붙일 말이 없다. 그래서 오늘은 엘리엇의 시구를 떠올렸으며, 커트 코베인의 노래를 들었고, 장국영에 대한 글을 어떻게든 써야만 했다. 여전히 슬프다. 그리고 외롭다. 그래도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아직은 죽지 않아서. 글을 쓸 수 있어서.
6. 종종 우울감이 밀려오는 날에는 쉰을 넘기지 못하고 죽을 것만 같다. 증세가 조금 더 심각한 날에는 불혹을 넘기지 못할 거 같고, 더 더 심한 날에는 서른도 넘기지 못할 것 같다. 더 더 더 심한 날에는 아예 죽어 버리고 싶다. 백세시대? 그딴 시대는 제발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럴 땐 충분히 우울해하는 것도 좋지만, 적당히 우울해한 뒤에는 삶을 살고 싶게 만드는 무언가를 다시 꼭꼭 붙잡아야 한다. 지금껏 살면서 내가 익힌 유용한 삶의 지침은 그것뿐이다. 시도 좋고, 소설도 좋고, 지나간 추억도, 미래에 대한 기대도, 뭐든 좋다. 그래서 살기 위해 한 줄만 남긴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