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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nui May 03. 2021

현대의 이카루스

파쿠르 또는 야마카시에 대하여



https://www.youtube.com/watch?v=xqbXtntrWC0


파쿠르 팀 STORROR



미술 교양 수업 도중에 파쿠르 영상을 봤다. 사람으로 하여금 목숨을 담보로 삼아서까지 고층 빌딩 사이를 뛰어다니도록 만드는 힘, 그 무시무시한 매력이 과연 뭘까.


먼저 행위 자체가 주는 신체의 역동적인 감각과 스릴을 떼어 놓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말, 강남대로가 까마득하게 보이는 초고층 빌딩의 옥상 난간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기분은 감히 말로 다할 수 없을 테지. 단 한 번이라도 그런 기분을 맛본 사람은 쉽게 끊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파쿠르에서는 원초적인 에너지가 철철 넘쳐흐른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파쿠르의 매력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 원초적인 에너지를 들끓게 만드는 종류의 중독은 파쿠르가 아니라도 많이 있으니까. 커피라든지, 담배라든지, 도박이라든지.


하여튼 파쿠르에는 이러한 에너지의 폭주뿐만 아니라 이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세련미가 있다. 한마디로 ‘멋’이 있다고나 할까. 시쳇말로 하면 ‘스웨그’라는 거. 결국 파쿠르를 하는 사람들은 신체의 감각을 넘어 멋에 중독이 된 게다. 자, 그러면 다음 문제는 그 멋의 정체를 소명하는 일이다.






아니, 90년대 아이돌 그룹도 아니고, 폼에 죽고 폼에 사는 사람이 어디 제정신 박힌 사람인가? 머리가 회까닥 돌아버리지 않고서야 어떻게 멋을 위해 목숨을 내걸겠느냐, 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테지만, 기실 따지고 보면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미학을 지니고 이를 바탕으로 삶을 주조해 나간다.


되게 간단한 얘기다. 누군가의 미학이란 무엇이 아름다우며 무엇이 추한가에 관한 즉각적이고 개인적이면서도 총체적인 가치 판단이다. 누구나 살면서 다양한 문제를 마주치고, 문제에 대한 미적인 판단을 내리고, 그 판단에 따라 삶을 어떻게 꾸려 나갈 것인지 매 순간 결정을 내린다. 단지 얼마나 충실히 자신의 미학을 경주해 나가느냐, 혹은 현실과 타협하느냐에 있어서만 차이가 있을 뿐.


파쿠르는 인간존재가 지닌 보편적인 미적인 테마와 표상을 공유한다. 한계와 한계의 극복이라는 테마, 그리고 중력이라는 표상을.


떨어지는 사과에서 만유인력이라는 개념을 떠올린 뉴턴으로부터 시작한 현대 물리학은, 우주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근원적인 네 가지 종류의 힘을 발견해 내는 데까지 이르렀다. 개중에서 중력은 우리가 실제로 감각할 수 있고 우리의 존재 자체를 한정 짓는 거의 유일한 힘이다. 나머지 힘들은 초미시 영역에서 비가시적으로 작용하는 반면, 중력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고 우리를 영영 속박하는 존재의 근본 조건, 당연하고 직관적인 존재의 토대로 여겨진다. 당장 시간과 공간만 하더라도 중력의 한 양상인 데다가, 무엇보다 우리는 중력으로 인해 땅에 발을 딛고 설 수 있으니까.


그리고 아마도 그런 이유로, 인류는 중력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꿈을 아주 오래전부터 꾸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언젠가는 부모의 품을 떠나려 하듯이. 그러므로 중력을 문학적으로 해석한다면 어렵지 않게 현실과 현실의 초월, 다른 세계로의 이행이라는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 있다. 즉, 파쿠르는 인간이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어 다른 세계로 가고자 하는 미적인 욕망의 가장 원초적인 표출이다.





앙리 마티스가 그린 이카로스


펑크록 밴드 체리필터는 ‘오리 날다’라는 곡에서 저 달까지 날아오르고자 하는 오리의 욕망을 노래한다. 어릴 때 참 많이도 들었더랬다. 지금도 좋아하는 노래이고...


'오리 날다'는 이카루스 신화의 펑크적 변주이다. 이카루스 신화에서 우리는 현실과 이상의 충돌, 그리고 여지없는 이상의 패배를 읽는다. 중력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의 근본 조건으로서의 중력은, 지긋지긋한 현실의 삶을 표상한다. 현실에 불만족하도록 만들어진 저주받은 짐승인 까닭에, 인간은 항상 발디딘 곳에 서서 다른 곳을 바라본다. 닿을 수 없는 이상향을.


더군다나 나는 이상주의자이다. 현실을 충만하게 채우기보다 공상에 잠기는 시간이 더, 훨씬 더 많다.






〈그래비티〉의 마지막 씬


종종 작가나 영화감독이 되는 꿈을 꾼다. 중력의 세계를 박차고 예술의 세계로 떠올라 초월의 세계로 가는 꿈(니르바나!). 하나 잠시 잠깐의 몽상 뒤에는 역시 몸을 옥죄는 중력을 느낀다. 아마 내게는 천재적인 작가나 감독들 만큼의 예술적 재능이 없을 것이고, 나는 기껏해야 딜레탕트로 살 수밖에 없을 테니까. 가뜩이나 요즘에는 나이가 차면서 인간의 가장 중차대한 문제, 먹고사는 문제라는 중력을 항상 느끼고 있다. 역시나 중력은 아주 피곤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람은 그 중력장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때로는 존재를 떠받쳐 주는 중력의 편안함으로부터 더할 나위 없는 위안을 얻기도 한다. 영화 ‘그래비티’는 우주의 황홀함을 보여주지만 결국 영화의 주인공 산드라 블록은 지구라는 어머니-노스탤지어의 품에서만 쉴 수 있지 않던가?


중력을 미워하기는 참 쉽다. 몽상에 빠져 살기도 쉽다. 하지만 몽상에 가닿기는 어렵고, 현실을 사랑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요즘에는 나의 존재를 제한하는 중력과 그 중력 속에 뿌리를 내리고 사람으로 살아가는 방법, 균형감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그러니까 문제는 이게 전부다. 현실을 꿈꾸기. 또는 꿈을 딛고 서기.






P.S.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 〈소나티네〉의 "죽는 걸 너무 두려워하면 죽고 싶어진다"는 대사가 떠오른다. 아마 죽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은 파쿠르를 할 수 없겠지. 파쿠르를 하는 사람들은 죽는 걸 안 무서워하니까 역설적으로 살아있는 거다.


사실 〈소나티네〉의 저 명대사의 원형은 한국의 위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그러고 보면 이순신 장군의 드라마틱한 연설은 단순히 병사들을 독려하기 위한 사기 진작 차원의 세뇌는 아니었던 셈이다. 요즘 사람들은 너무 죽는 것만 두려워한다. 그게 문제야... 

(그렇다고 생각 없이 무모하게 살란 말은 아니니까 오해하진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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