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구름이 아니라 소설을 읽는가
당신은 뭣하러 영화를 찍느냐는 누군가의 물음에 차이밍량은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은 하늘을 보지 않고 왜 영화를 봅니까?
바람 소리를 듣지 않고 왜 음악을 듣습니까?”
1. 되묻기는 즉답을 회피하면서 상대에게 책임을 돌리는 꽤 효과적인 수사법이기도 하지만, 물음을 그것이 물어진 토대에서부터 다시 점검하도록 요구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위상 변환의 기술이기도 하다. 선문답이야말로 깨달음에 이르는 첩경이다. 영화감독이 뭣하러 영화를 찍는지 궁금해하던 그 사람은 차이밍량의 대답에서 자기가 바라던 것을 찾았을는지.
2. 차이밍량의 대답을 들은 우리는 영화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영화에 대한 물음은 자연히 예술에 대한 물음으로 귀착된다. 예술이 무엇이길래 우리는 예술에 매료되고 그것에 탐닉하는 것일까. 대체 예술이 뭐길래.
3. 엊그제 카뮈의 『페스트』를 읽었다. 카뮈는 『로빈슨 크루소』의 작가 다니엘 디포를 인용하여 자기 소설의 제사(題詞)로 싣는다.
“한 가지의 감옥살이를 다른 한 가지의 감옥살이에 빗대어 대신 표현해 보는 것은, 어느 것이건 실제로 존재하는 그 무엇을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에 빗대어 표현해 본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합당한 일이다.”
4. 사람은 딱 한 번만 산다. 하나의 가능태가 현실태가 되면, 별처럼 무수한 나머지 가능태들은 모두 빛을 잃고 어둠 속에 스러진다. 헤라클레이토스 말대로, 우리는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 없다.”
4-1. 쿤데라는 그래서 인간의 삶이 홑겹이라고 봤다. 홑겹은 가벼움이다. 존재는 가볍고 가벼움은 무거움만큼, 어쩌면 무거움보다 더 견디기 버겁다. 중력의 붕괴. 그래서 쿤데라는 소설을 쓴다.
3-1. 상징과 알레고리. 상징의 어원(symballein)은 고대 희랍어로 ‘짝 맞추다’라는 뜻이고, 알레고리의 어원(allegoria)은 ‘다르게 말하기’라는 뜻이다. 만약 우리가 두 단어를 그리스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의미로 사용한다면, 상징은 고정된 의미 체계를 만드는 것이고 알레고리는 그러한 체계를 무화시키는, 그리함으로써 새로운 창조를 가능케 하는 것일 테다.
3-2. 로빈슨 크루소는 섬에 살고 카뮈에게 모든 인간은 자기의 섬에 산다. 섬은 감옥이고 감옥은 세계다. (부조리)
3-3. 페스트는 모든 가치 판단을 말소한다. 그리고 페스트는 우리가 깨닫지 못할 뿐 항상 우리의 지척에 도사리고 있다. 가치와 의미는 동의어인지는 몰라도 유의어다. 무의미한 세계.
4-2. 세계는 도도한 강물처럼 흘러간다. 그런데 같은 강물에는 두 번 들어갈 수 없지만 세계는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도 경험할 수 있다. 어떻게? 예술을 통해서. 엘리아데는 종교적 인간은 직선적인 역사 속에서도 태초의 성스러운 시간을 회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담 미학적 인간은? 예술이 성스럽다고 믿는 사람은 예술을 통해서 역사를 성스러움이 현현하는 장으로 만든다.
2-1. 핸드폰 카메라를 켜고 카메라에 비친 세계와 육안으로 바라본 세계를 번갈아 바라볼 것. 뷰파인더 속 세계와 실제 세계는 같은 것이 아니다. 『페스트』라는 소설 속 오랑 시가 아무리 실감 나게 느껴지더라도, 그것은 실제의 오랑 시가 아니다.
2-2. 생 빅트와르 산의 그림만 여러 장을 그린 세잔이 산을 노려보고 세월과 씨름하며 포착하고자 했던 ‘실재’는 둘 중 어느 쪽에 가까울까.
3-4. 『페스트』는 ‘연대기’로 구성된 픽션이다. 연대기는 객관성을 부여하며 지나간 시간을 물화한다. 그러나 실재가 언어가 되는 동시에 객관에는 주관이 섞인다. 픽션은 현실에 상상력을 부여한다. 상상력은 무의미한 세계의 표면에 의미의 지층을 드러낸다.
3-5. (3번으로.) 이쯤 읽었으면 다니엘 디포의 인용구를 다시 읽어볼 것.
4-3. 오직 예술로서만 벌거벗은 삶은 외피를 되찾는다. 그러나 예술은 그 가능태에 과도한 무게를 싣지는 않는다. 의미의 지평은 열렸으나 거기엔 어떠한 필연도, 운명도 없다. 따라서 질량도 없거나, 여전히 가볍다. 고로 예술은 값비싼 겨울 외투와도 같다.
1-1. 차이밍량 영화를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안녕 용문객잔〉은 80분이 조금 넘는 짧은 영화임에도 두세 번 시도한 끝에 간신히 보았고, 〈떠돌이 개〉는 좀 더 볼만은 했지만 역시 한 번은 끊어 봐야만 했다. 극장에서 보았다면 달랐을까? 잘 모르겠다. 솔직히 크게 다르진 않았을 거다. 그래도 지금은 차이밍량이 뭘 하고 싶었던 건지, 무슨 말을 하려 했던 건지는 어렴풋이나마 알겠다.
5. 대만 뉴웨이브 영화에는 차이밍량, 허우 샤오시엔 말고 에드워드 양도 있다. 사실 내가 볼 땐 에드워드 양이 제일 낫다. 에드워드 양의 최고작은, 이견이 있을 수도 있지만, 나는 〈하나 그리고 둘〉(Yi Yi, 2000)을 꼽고 싶은데, 거기서 양양이라는 꼬마는, 필름 카메라를 들고 열심히 사람들의 뒤통수를 찍는다. 같은 시간에 딱 한 번만 발을 담글 줄 아는 삼촌은 의아해하며 양양에게 묻는다. 왜 사람들의 뒷모습만 찍는 것이냐고. 양양은 대답한다. 못 보니까 보여주려고요.
5-1. 다소간 유치한 상징적인 대사일지는 몰라도, 영화의 진실이 완전무결한 진실이 될 수는 없더라도, 영화를 찍는—예술을 하는—사람의 마음가짐은 적어도 이래야 하는 게 아닐까. 설령 ‘필름’이라는 왜곡을 거친 세계일지라도, 당신에게 바로 그 세계를 보여주겠다는. 구로사와 기요시는 “비치고 있는 것은 과거의 세계”라고 말했고, 또 “영화 만들기란 ‘존재하고 있는 것’과 ‘보는 것’ 사이의 아슬아슬한 싸움”이라고 말했다.
5-2. 그러니까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 아니,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계속 시작한다.
3-6. 위대한 작가란 어떤 작가인가? 위대한 예술가는 누구인가? 카뮈랑 쿤데라가 그런 작가다. 에드워드 양이 그런 예술가다.
4-4. 예술가는 무심하게 흘러가는 세상을 붙잡는 미련한 연인이다. 죽어버린 시간과 공간, 이미 묻힌 가능태를 다시 되살리기. 스스로 볼 수 없는 뒤통수에 거울을 비춰주는 미용사. 위대한 작가는 자기 시대와 자기 장소 너머의, 모든 시대 모든 곳에서 가능한 세계상을 제시하는 사람이며, 상상할 수 있는 — 즉 실현될 수 있는 — 세계, 사건, 생각들을, 거기서 움트는 모든 모순과 갈등과 충동을 통째로 홀로 감각하고 종합하는 사람이다.
4-5. 어떤 작가들은 자기는 상상력이 비루해서 자기가 겪은 것만을 쓸 수 있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인 동시에 거짓이다.
2-3. 예술가들은 지나간 세계에 대한 미련이 많다. 회한도 많고 후회도 많다. 그들이 겨우 붙잡아 놓은 세계는 기회비용이나 매몰비용 따위를 추산하여 ‘올바른 선택’을 내리도록 도와주는 합리적/경제적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로 완결성을 띠는 하나의 세계다.
4-6. 『롤리타』의 험버트 험버트는 그가 나중에 알게 된 것을 아는 채로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다시 롤리타를 범하고, 기망할 것이다. 어쩌면 더 노련하게. 그리고 그 『롤리타』의 세계는 실제 하나의 세계다. 그러니까 예술은 윤리나 도덕 따위의 시녀일 수는 없다.
2-4. 예술은 허구이지만 현실보다 진실한 허구다.
1-2. 당신은 하늘을 보지 않고 왜 소설을 읽습니까? 이 글은 왜 여기까지 읽은 겁니까? (나는 왜 이런 글을 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