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색』(미시마 유키오)에 관한 픽션 또는 논픽션
금지는 문명의 조건이다. 근친상간의 금기까지 갈 것도 없이, ‘빨간 불에는 길을 건너지 마시오’라는 신호를 아무도 지키지 않는 난장에서 문명이 꽃필 수 있을지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성싶다. 문명은 본능의 억압을 전제로 성립한다. 그래서 인간의 쾌락에 적대적이다. 그러나 문명 없이 인간은 살아남기조차 버겁다. 그러니 문명의 억압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문명은 인간을 만성 욕구 불만에 시달리게 한다.
반(反)문명의 기치를 내건 68혁명의 슬로건이 “(모든) 금지를 금지하라!”였던 것은 그러니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그러나 수사적으로는 썩 매력적인 ‘금지의 금지’라는 구호는 자가당착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한눈에 드러나는 논리적 모순은 못 본 셈 치더라도, 정치적 강령으로서 ‘금지의 금지’가 아무런 실질도 지니지 않는다는 점은 어물쩍 넘어가기 어렵다.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하거나 하다못해 유토피아에 대한 대강의 밑그림이라도 내놓았던 이전까지의 혁명들과 달리, 68혁명은 그 넘치는 에너지의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정치화되지 못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이 요구한 것은 반문명적이라기보단 차라리 비(非)문명적인 억눌린 충동의 분출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정치란 금기의 내용과 범위를 협의하는 것이며, 이미 그 안에 문명의 씨앗을 배태하고 있다.
현실정치의 영역에서는 실속을 챙길 수 없는 공허한 구호에 불과하지만, 예술의 영토에서라면 사정이 다르다. 제재와 방법을 규정하(지 않)는 예술의 본령으로서 비로소 ‘금지의 금지’는 유효성을 획득한다. 칸딘스키는 예술의 자유를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예술에 있어서 '...해야만 한다'로 시작하는 영원한 모든 질문은 영원한 해답을 남기는데, 말하자면 예술은 영원히 자유로운 것이기에 거기에는 '당위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술은 마치 낮이 밤에서 도망하듯이, '당위' 앞에서는 도망하는 것이다.”(「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당위가 존재할 수 없다면 금기도 존재할 수 없다. 예술은 ‘…해야만 한다’와 ‘…하지 말아야 한다’를 초과하는 곳에서 탄생하는 제3의 정언명령이다. 그러나 이때의 정언명령은 당위적∙윤리적 차원이 아닌 현상적 차원에서 작동한다. 오로지 그것의 존재를 바라 마지않는 동경심에 의해서만 예술의 존재는 영원히 정당화된다. 예술의 유일한 당위는 ‘존재해야’만’ 한다’는 데에, 존재의 규범인 현실에 맞서 자기 존재를 스스로 내세운다는 데에 있다. 예술은 자유의 존재 증명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예술 따위로 혁파하기에 현실의 장벽은 너무나 굳건하다.
예술은 현실 앞에 무능하다. 그래서 예술은 전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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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전능. 히노키 슌스케라면 비웃었을 테지. 그는 예술의 권능을 믿지 않는 노작가다. 그렇다면 히노키 슌스케는 무얼 믿는가. “예술로 해결 가능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는 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쓰는가. 여기서는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히노키 슌스케의 마지막 장편소설이자 자전적 소설이기도 한 『금색』은 그의 예술관이 집대성되어 있는 소설이다. 희대의 미청년 유이치의 동성애 성향을 알게 된 음험한 노작가 슌스케가 유이치를 이용해서 자신에게 성적 좌절감을 안겼던 여자들에게 복수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소설은, 그 자극적인 성격으로 인해 오해도 많이 받아왔지만, 작가가 말년에 겪은 일련의 사건들과 이로 인한 관념의 변모를 추체험할 수 있어 연구 가치가 높다. 소설 안에서 슌스케가 계속해서 언급하는 ‘작품’은 바로 이 소설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쓴 마지막 원고이자 삶의 끝자락에 선 한 예술가의 통절한 성찰을 엿볼 수 있는 「히노키 슌스케가 쓴 「히노키 슌스케론」」은 『금색』의 32장에 통째로 수록되어 있다.
히노키 슌스케의 상속자인 미나미 유이치 씨는 슌스케의 사후 소설을 발표하며 원고를 조금도 손보지 않았다고 하는데, 일부 연구자들은 소설의 마지막 장인 33장 ‘대단원’을 유이치 씨가 썼다거나 소설 전반에 그의 손길이 닿아 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한다. 소수 의견이지만, 『금색』이 아예 미나미 유이치 씨의 작품이라는 주장도 있다. (히노키가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믿는다. 그들은 결혼을 세 번이나 했으며 평생 여자와 염문을 뿌렸던 히노키 슌스케가 노년에 미나미 유이치 씨에게 관능적으로 이끌렸다는 데에 의구심을 표하며, 유이치 씨가 배은망덕하게도 히노키 슌스케를 이용∙모욕하고 있다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실제로 미나미 유이치는 이후에 집필 활동을 시작하여 소설을 몇 편 썼으며, 히노키 슌스케와 아주 흡사한 미문을 구사하여 문장가로 명망이 높았다. 안타깝게도 지금으로서는 사실을 확인할 길이 없다. 슌스케로부터 막대한 유산—정신적으로든 물질적으로든—을 물려받은 유이치 씨는 집필 활동을 시작하여 소설을 몇 편 쓰다가, 1970년 11월 25일 이치가야의 육상자위대 총감실에서 평화헌법 개헌을 주장하며 할복 자살했다. (자살의 전모에 관심이 있는 독자에게는 당시의 신문기사와 더불어 유이치 씨의 짧은 소설 「우국」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인터넷 검색을 하면 내장이 쏟아지고 목이 잘린 그의 사진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으나, 굳이 권하지는 않겠다.)
필자가 판단하기로는, 『금색』의 실제 저자가 누구인지를 따지는 것이 별로 중요하진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정황에 비추어보았을 때, 히노키 슌스케가 초고를 쓰고 미나미 유이치가 퇴고를 보았다는 추정이 가장 그럴듯해 보인다. 우선 현실의 안에 있되 현실과 교접하지 않는, ‘차안(此岸)의 아름다움’을 탐닉하는 히노키 슌스케의 독특한 미학을 기존의 어느 비평에서보다도 첨예하게 들춰낸다는 점에서 『금색』을 미나미 유이치의 단독 작업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소설에서 그려지는 미나미 유이치의 연애사와 그의 관념의 변화가 아주 구체적일 뿐만 아니라, 세 번의 전집을 출간하는 동안 슌스케가 경주해온 미학에서 크게 변모했다는 점에서 소설에 끼친 그의 영향력을 간과할 수도 없다. (다수의 평자가 『금색』이 미나미 유이치의 다른 소설들과도 모티프를 공유한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말하자면 슌스케와 유이치는 『금색』의 공저자인 셈인데, 처음부터 공동 작업을 계획했던 것 같지는 않다. 슌스케가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하던 시기만 하더라도 미나미 유이치는 문리에 그다지 밝다고 할 수 없는 미청년에 불과했다. 아쉽게도 자료의 부족으로 인하여 유이치가 『금색』의 집필에 관여한 시기는 분명하게 특정할 수 없다. 다만 소설 속에서 슌스케가 유이치를 어떻게 대우하는지를 통하여 미루어 짐작해 볼 수는 있다. 초기에 슌스케는 유이치를 자신의 ‘작품’, 심지어는 “꼭두각시”로 일컫는데, 적어도 유이치가 “현실의 존재가 되고 싶”다고 선언하는 11장부터는 이 둘의 관계에 근본적인 변화가 생겼다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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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슌스케의 미학에 대한 진전된 논의를 시작할 때가 되었다. 방금 언급한 11장의 같은 대목에서 출발하는 것이 좋겠다. 슌스케는 “자유를 찾고 싶”고 “현실의 존재가 되고 싶”다는 유이치에게 이런 식으로 대꾸한다.
“아무 책임도 의무도 지지 않는 게 아름다움이 갖는 도덕일세. … 아름다움은 행복 같은 걸 생각할 겨를이 없네. 하물며 남의 행복 따위야. …... 그러나 그러하기에 아름다움은 그걸 위해 괴로워하다 죽는 사람마저도 행복하게 할 힘을 지닌다네.”
“표현이란 행위는 현실에 올라타 현실의 숨통을 끊어 놓고 완전히 짓밟아버리는 일이야.”
요컨대 슌스케는 ‘현실’과의 거리감을 강조하고, 현실과는 관계 맺지 않는 모종의 ‘아름다움’을 추종한다. 그에게 예술 작품이란 “일종의 제련된 죽음”이며, 그는 흠잡을 데 없는 유이치의 신체적 아름다움에서 “자연력과 같은 파괴의 힘, 인간미 없는 무기질의 힘”을 주조하고자 한다. 이러한 슌스케의 미학은 오랜 세월 ‘그로테스크 미학’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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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여 슌스케의 예술은 현실로부터 유리되었는가. 오늘날 청년으로 하여금, 청춘의 단 열매를 향유하는 대신 ‘정신성’의 쓴맛을 맛보게 하는 직접적 계기는, 대개 성적 좌절감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아니나 다를까 슌스케는 초장에서부터 그의 뿌리 깊은 외모 콤플렉스를 고백한다. 그리하여 “슌스케의 청년시절은 청년으로 살고 싶다는 치열한 열망 속에 흘러”가 버리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얼굴을 “정신으로 빚어낸 얼굴이라기보다 정신으로 좀먹은 얼굴”이라고 폄하한다. 그는 호색한이면서도 색욕이 좌절당함으로 인해 여성들에게 아주 강렬한 적의와 분노, 증오를 삭여 왔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런 종류의 증오를 단 한 번도 작품에 드러내지 않았”으며, “세 번 모두 실패로 끝난 결혼은 작품 속에 편린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사실 슌스케의 외모는 그리 흉하지 않았다. 잘생겼다고는 할 수 없어도 평범하게 생긴 남자였다. 슌스케의 추함은 그 자신이 술회하듯 “자신을 추하다고 믿으려 하루하루 애쓰는 인간의 추함”이었다.)
오랫동안 펜을 꺾었던 슌스케가 말년에 『금색』을 쓰게 된 까닭은, 이러한 자기기만에 대한 염증이 세 번째 전집 출간을 맞이하며 극렬해진 탓으로 보인다(“증오에 관여하지 않아? 거짓말이다! 질투에 관여하지 않아? 거짓말이다!”). 슌스케는 2장에서 그간 자신이 써왔던 모든 작품에 객관적 시점을 취하며 이렇게 평가한다. “부끄럽게도 현실에 복수를 꾀하는 책무를 처음부터 방기했다. 따라서 그[슌스케 자신]의 작품은 현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슌스케에게는 일반적으로 “작가의 개인적 발전의 정석인 반항에서 모멸로, 모멸에서 관용으로, 관용에서 긍정으로 나아가는 흔적이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는다.”(32장) 슌스케는 현실과의 관계를 어떤 식으로든 회복하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완전하게 짓뭉개려 한다. 『금색』의 초기 집필 의도는 현실에 현현한 아름다움—유이치의 신체적 아름다움—을 통해 현실을 지배하는 데에 있었다. 이때 ‘지배’는 ‘복수’의 동의어가 아니다. 복수가 복수이고자 한다면, 복수의 주체는 언제나 대상이 될 위험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자신을 괴롭히는 현실에 복수를 하겠다는 것은 적어도 현실과 동등한 관계를 맺겠다는 의지를 함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유이치의 성적 매력을 빌려 세 여인—가부라기 부인, 교코, 야스코—에게 슌스케가 자행한 짓은 복수라고 할 수 없다. 그들은 유이치의 외피로 자신을 숨긴 슌스케에게 복수를 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것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온전히 자신의 통제 아래 두겠다는, 지극히 작가다운 지배욕구의 추악한 산물에 불과하다.
그러나 타자를 지배하려 하는 그의 미학은 실패가 예정되어 있다. 어느 순간부터 그의 작품인 유이치는 그의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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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금색』은 피그말리온 설화의 변주다. 혹은 해피엔딩 이후의 이야기다.
갈라테아는 어떤 삶을 살았는가?
조지 버나드 쇼는 갈라테아가 피그말리온을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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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슌스케가 유이치에게 매혹된 것은 그가 압도적인 외면의 아름다움을 뽐냈기 때문이다. 슌스케는 유이치의 ‘정신성’의 결여를 찬양한다. 다시 말하지만, 그에게 아름다움이란 인간과 전혀 무관한 ‘자연’의 아름다움이었고, 이는 ‘청춘’을 닮아 있으며, ‘외면’을 통해 나타나고, ‘관능’과 ‘육감’에 의해서만 감지될 수 있는 것이다. 『금색』은 마치 그러한 미학을 체현한 듯한 청년 유이치를 조우함으로써, 이미 젊음을 잃은 자신의 미학을 다시금 극단까지 밀어붙여 보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아름다움과 대별되는 것으로서 작가는 ‘어리석은 짓’을, ‘생활’을, ‘우스꽝스러움’을, ‘현실’을 지목한다. (이 중에서도 ‘현실’은 1)존재의 규범 또는 2)존재의 조건이자 존재를 구성하는 우발적 사건들의 총체라는 두 가지 층위로 해석될 수 있는데, 여기서는 이 사실을 지적만 하고 넘어가는 편이 낫겠다.)
슌스케의 문학은 “실용적인 목적을 엄격하게 배제한 인공낙원과도 같은 소설”이었으며, “죽은 듯한 여자, 화석과 같은 꽃, 금속의 정원, 대리석 침상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32장) 그는 32장에서 자신의 소설 세계에서 중요한 작품, “필력은 소박하고 유치해도 무의식 중에 훗날 그[슌스케]가 표현하고자 했던 주제를 모조리 담아낸” 작품으로 열여섯에 쓴 「신선 수업」을 꼽는다. 이 우의적인 단편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나’는 신선들의 동굴에서 시중을 드는 아이다. 신선들은 안개만 먹고 산다고 알려져 있다. 사람들은 신선의 시중을 드는 아이들—시중을 드는 아이는 ‘나’ 혼자뿐이지만, 사람들은 이를 모른다—을 위해 고기와 채소를 시주한다. 그런데 사실 신선들은 사람들이 시주하는 고기와 채소를 먹고 산다. 안개만 먹고서도 사는 것은 오히려 시중을 드는 아이였다. 어느 날 심술 궂은 한 농부가 일부러 역병에 걸린 고기를 신선들에게 보내고, 고기를 먹은 신선들은 모두 죽는다. 아이만 홀로 살아남고, 사람들은 아이를 신선으로 숭배한다.
슌스케는 이 이야기가 “예술과 생활의 풍자”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가 자신을 시중 드는 아이에 빗대고 있음은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그는 다른 신선(예술가)들에 대해서는 안개만 먹고 살 수 없는 주제에 속임수를 쓴다고 풍자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안개만 먹고서도 살 수 있는 체한다.
이 소설이 읽기 어렵다면 그것은 낭만주의를 배척하면서 낭만주의에 잠식되어 있는 슌스케의 독특한 미학 때문이다. 대개 플라톤적인 미학이 (보편적) 정신의 가치를 숭배하는 것과 달리, 슌스케는 이를 배격한다. 슌스케의 미학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육체와 관능이다. 낭만주의 미학에서 높게 평가하는 ‘개성’ 또한 슌스케에게는 혐오의 대상이다. 슌스케에게 아름다움은 “본래 독창성과 가장 거리가 먼”(22장) 것이었다.
그가 낭만주의를 배척하면서 낭만주의에 잠식되어 있다는 필자의 진술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를 분명히 하려면 낭만주의가 무엇인가부터 짚고 넘어가야 한다. 미리 지적해야 할 것은, 인간성을 폄하하면서 ‘자연의 미’를 추켜올리는 슌스케의 태도는 결코 낭만주의의 유산이 아니라는 것이다. 흔히 낭만주의의 태동에 크나큰 영향을 끼쳤다고 오해되는 장 자크 루소는, 이사야 벌린의 지적에 따르면 (낭만주의에 반하는 개념인) 계몽주의자에 가깝다. 단지 루소는 여타 계몽주의자들과 달리 문명이 아닌 자연을 찬미했을 뿐이다.
낭만주의의 진정한 유산은 그때까지 드러나지 않은 ‘개인’의 ‘내면’에 조명을 비추고, 거기에 지고의 가치를 부여했다는 데에 있다. 요컨대 슌스케와 낭만주의의 연관성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내면의 가치를 대하는 그의 히스테릭한 태도에 주목해야 한다. 슌스케는 자신의 마지막 원고인 ‘슌스케론’에서야 드디어 객관적으로 자기 미학을 검토한다.
“취약한 자, 감상적인 자, (…) 미숙한 자아의식, 몽상, 독선, 극도의 자만과 자기비하의 혼합, 순교자 행세, 넋두리, 때로는 ‘생’ 그 자체, (…) 이 모든 것에서 그는 낭만주의의 그늘을 느꼈다. 그에게 낭만주의는 ‘악’의 동의어다. 히노키 슌스케는 자기 청춘이 위기에 닥친 요인을 죄다 낭만주의라는 병균 탓으로 돌렸다.”(32장)
슌스케의 자기비하는 어디에서 오는가. 개성과 자의식을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숭상한 낭만주의 미학에서 온다. 그럼 그의 자기비하는 어디를 향하는가. 성적인 좌절과 그것을 유발한 (추악한) 외모를 향한다.
그는 낭만주의를 숭상한다. 낭만주의는 개인의 내면에서 미적 가치를 찾는다. 그러나 현대의 여성들은 그의 정신성을 충분히 들여다봐주지 않는다(물론 이것은 남성도 마찬가지이고, 남성은 태초부터 그랬으며 태생적으로 그러할 수밖에 없고, 낭만주의 시대에 여성이 남성의 정신성을 유달리 중요시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남성적 사랑이 그러했듯, 인류사에서 극히 예외적인 경우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욕망은 좌초된다.
(낭만주의 미학과 사실상 미학 자체가 무의미해진 현대라는 우엘벡적인 주제는 다분히 문제적이지만, 이는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므로 지금은 이쯤에서 매듭짓는 게 좋겠다.)
그는 낭만주의를 ‘악’으로 여긴다. 그러나 그는 이미 극단적 낭만주의—반(反)낭만주의야말로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낭만주의와 통하는 것이다—에 잡아먹힌 상태다.
그런즉슨 슌스케는 악마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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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슌스케의 반낭만주의적 성향은 어디를 향하는가. 예술에 ‘금기’를 도입하려 하는 완고함을 향한다. 그의 미학에는 ‘어리석은 짓’이, ‘생활’이, ‘우스꽝스러움’이, ‘1)존재의 규범으로서의 현실’이 배제되어 있다. ‘정신’과 ‘사상’도 도무지 끼어들 틈이 없다. ‘내면’이나 ‘개성’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물론 ‘2)존재의 조건이자 존재를 구성하는 우발적 사건들의 총체로서의 현실’도 그러하다.
슌스케의 이중적 낭만주의 수용은, ‘내면을 통한 자아실현’이라는 낭만주의의 이상에서 ‘내면’을 ‘외면’으로 갈음한다. 그러나 내면과 외면을 따지는 것은 사실상 무의미하다. 낭만주의의 모든 부작용은 자아의 비대함에서 말미암는 까닭이다. ‘바보야, 문제는 자아야.’ 우연을 엄격히 통제하는 당위와 금지의 미학에 자유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그는 “스스로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을 예술로, 좋지 않다고 여기는 것을 생활로 구분시켰다.” 그의 소설은 “좋게 말하면 유미적인, 나쁘게 말하면 윤리적인 기묘한 예술”이다. 요컨대, 소설가가 지녀야 할 필수적인 능력, 다시 말해 “자신과 타인을 향한 편견 없는 객관적 태도가, 현실에서는 오히려 현실을 자유롭게 변화시킬 정열로 되살아나는 저 신비로운 능력”(32장)이 결여되어 있었다.
“그의 작품에 객관성이 결여된 원인은 이런 창작 태도가 지나치게 완강하고 주관적이며 고집스럽다는 데 있었다. 생의 진실을 증오한 나머지 그것과 완전히 대척점에 놓인, 말하자면 살아있는 인간의 나체로 거푸집을 뜬 듯한 조각상이 바로 그의 작품이었다.”(1장)
온갖 것들을 깎아내리고, 자연과 청춘과 외면만 남긴 아름다움은 기형적 아름다움이다. 슌스케는 묻는다. “’아름다움이 인간을 고매하게 만든다는 건 미신이었나?’”
‘그런’ 아름다움이 인간을 고매하게 만든다는 건 미신이 맞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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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던 슌스케가, 비로소 소설가로서의 ‘객관적 열정’을, 다시 말해 현실과 상호작용할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계기가 바로 유이치였던 것이다. 유이치는 그의 ‘2)존재의 조건이자 존재를 구성하는 우발적 사건들의 총체로서의 현실’이었던 셈이다.
(소설 속) 유이치는 본디 정신성이 없는 ‘자연’self-so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체현한 (슌스케의) ‘작품’이었다. 그는 슌스케의 사주를 받아 사랑하지도 않는 야스코와 결혼했다. 교코와 가부라기 부인을 유혹했다. 그리고 금지된 섹스—동성애—를 즐기며 그들 모두를 기만했다. 그러나 아무리 성적 욕망에 충실한다 한들, 그는 자유롭지 않다. 그는 저자가 아닌 현실과 소통하기를 원한다.
그의 의지는 아내 야스코의 출산에 이르러 결실을 맺는다. 출산의 고통으로 몸부림 치는 아내의 “훤히 벌어진 붉은 살”은 “유이치의 내부에도 확실히 존재하는 붉은 살”로 이어진다. 가장 단독적인 감각인 고통조차 유이치에게는 더 이상 고독한 것이 아니다. 이제껏 “남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데 있었”던 유이치의 존재 의식은, 타인의 시선과 무관하게 스스로 존재한다는 고양감으로 대체된다.
그는 야스코를 사랑한다.
여성을 결단코 ‘정신적으로’ 사랑할 수 없다고 믿었던 유이치는 또한 그는 가부라기 부인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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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어쩌면 공고하지 않다. 현실은 금기에 둘러쌓여 있지만, 동시에 금기를 초과함으로써 존재한다. 현실은 나에게서 벗어나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의식적 주체에게서 비껴 서 있다.
현실은 달아나고, 다른 현실이 다시 태어난다. 우연은 굳어진 현실에 생기를 부여한다.
자유는 바로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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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유이치는 ‘완벽한’ 작품이 되는 데 실패한다. 그는 미완으로 남는다. 일찍이 “미완성이라는 병”을 극복하고 그 대신 상처도 환부도 병균도 열도 없는 “완벽함”이라는 고질병에 시달리던 슌스케는, 도무지 완벽하게 포착할 수 없는 유이치의 ‘존재’를 실감하며 “청춘의 기이한 병”을 다시 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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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색』은 좌절된 욕망에 관한 소설이다. 좌절된 욕망은 범죄, 혹은 예술로 분출된다.(히노키 슌스케의 경우는 두 가지 모두에 관계한다.) 범죄를 처벌해야 하는 까닭은 우리가 생존하기 위함이다. 문명은 문명을 위해 존재할 뿐 아니라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도 존재한다. 생존의 삶의 조건인 바, 우리는 문명을 포기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술은, 그것이 누군가의 진정한 욕망의 소산일 경우에, 결코 규정되거나 금지될 수 없다. 예술은 그러므로 반문명적인 것이며, 예술의 본령을 정의할 수 있다면—정의definition은 문명의 무기다—그것은 ‘금지의 금지’라는 표어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이 숨 막히는 현실 속에서, 우리가 자유를 지닌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는 데에 예술의 유일한 존재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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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정신의 운동인 동시에 관능의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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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 히노키 슌스케는 일평생 죽어있다가, 말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숨통을 틔웠다. 『금색』은 그가 남긴 사실상 유일의 예술작품인 것이다. 그의 콤플렉스와 병든 자의식은 그를 완고하디완고한 작가로 만들었다. 그의 미학을 체현한 듯한, 그러면서도 그의 미학을 부정하고 탈주하려 하는 유이치라는 존재가 그의 말년에 나타났고, 그는 그러한 존재를 통해 자신의 실패를 깨닫는다.
슌스케가 유이치라는 이름의 상징화된 우연을 마주쳤다면, 유이치의 이야기는 삶이라는 우연의 성격을 좀 더 포괄적으로 드러낸다.
그가 슌스케의 작품으로 존재하기를 그쳤을 때, 유이치에게는 가능성이 있었다. 『금색』은 유이치가 슌스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지점에서 끝난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 이후는 슌스케가 아닌 유이치에게 달린 것이었다.
그러나 유이치 씨가 지녔던 가능성은 다시 완고함으로 축소되고 만다.
유이치는 이후 아내 야스코와 이혼했고, 가부라기 부인과 짧은 동거를 거쳐 이후 죽을 때까지 두 번째 부인 레이코의 돌봄을 받으며 지낸다. 작가로서 그의 관심사는 슌스케와는 전혀 달랐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소설은 역시나 슌스케가 좇았던 ‘죽음의 미학’을 극복하지 못했다.
그는 인식과 행위를 혼동했다. 예술이 정신의 운동이자 관능의 언어라고 말할 때, 그것은 현실과 유관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더라도 일단은 인식에 관한 것이며, 행위는 ‘예술 이후’에 올 수밖에 없다. 행위는 추잡한 것이고, 현실이란 감옥에서 몸서리치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인식과 행위를 동일시하려는 욕망은 죽음에 대한 선망으로 귀결될 뿐이다. 어떤 뇌내 망상에 의해 이를 정당화하고자 할지라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무의미하다.
샐린저는 썼다: 미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어떤 이유를 위해 고귀하게 죽기를 바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성숙한 인간의 특징은 동일한 상황에서 묵묵히 살아가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유이치는 이를 구분하지 못했다.
결국 유이치는 일본 정신이라는, 삶과 무관한 추상에 매달리다 자살한다. 예술은 애당초 무언가를 해결하기 위한 최종해결책(Endlösung)이 아님을 깨닫지 못한 작가의 안타까운 최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