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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nui Apr 23. 2022

실스 마리아의 유령들

『심연호텔의 철학자들』(존 캐그)과 니체 읽기, 자기-버림과 자기-되기

실스 마리아의 유령들


"당신 자신이 되려면, 당신이 무엇이라는 생각을 아주 희미하게라도 갖지 말아야 한다."
(《이 사람을 보라》, 1908)
"내 시계가 어디 갔지?"
(살바도르 달리의 유언)
"중요한 것은 혼란을 퍼뜨리는 것이다. 그것을 제거하는 게 아니라."
(살바도르 달리)


〈기억의 지속〉(살바도르 달리, 1931)


1-1. 지난달에 살바도르 달리 전시회에 다녀왔다. 죽은 예술가를 기리는 회고전은 얼마간 추모의 성격을 띠기 마련이라, 세련되게 꾸며 놓은 화랑을 거닐면서도 나는 무덤가를 부유하는 유령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현실을 비틀고 조소하는 듯한 화가 특유의 살풍경스러운 화풍이 그런 이질감을 더 두드러지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위대한 천재”임을 자부했던 도도한 예술가의 묘지. 그리고 그런 묘지를 맴도는 유령(들). 여기서의 유령은 물론 데리다를 염두에 둔 표현이다. 달리의 대표작인 〈기억의 지속〉에서 나타나는 흐물거리는 시계(들)의 이미지는 “시간의 관절이 어긋나 있다”(Time is out of joint)는 대사에 주목한 데리다의 「햄릿」 독해를 떠오르게 한다.

    데리다는 1993년작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전통적 존재론ontologie과 대별되는 유령론hauntologie을 주창한다.(프랑스어에서 h는 묵음이라 전통적 온톨로지와 데리다의 온톨로지는 발음상 구분되지 않는다.) 데리다의 유령론이 겨냥하는 과녁에는 현전presence에 대한 서구 형이상학의 장구한 믿음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다. 쉽게 말해서 데리다는 지금-이곳에 고정된 의미를 부여하려는 일체의 시도를 편집증적 집착으로 간주한다. 고정된 지금-이곳이라는 것은 엄밀히 말해 포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달리의 회고전을 다녀온 ‘내’가 한 달 전 그대로 고여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글을 쓰며 생각하는 매 순간마다 계속 수정되고 첨삭되듯이 말이다.

    우리는 유령이다. 우리가 매 순간 조우하는 이들도 유령이다. 유령은 우리고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들도 유령이다. 존재는 현전하지 않는다. 존재는 부재하는 것의 흔적으로만 나타난다. 의미는 어떤 절대적 원리가 아니라 콘텍스트 안에서,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만 주어질 따름이다. 이것이 데리다의 유령론이다.




『심연호텔의 철학자들』 표지(좌), 존 캐그(우)


2-1. 『심연호텔의 철학자들』은 젊은 철학 교수가 17년의 간격을 두고 알프스의 실스-마리아를 두 차례 다녀온 뒤에 쓴 에세이다. 춥고 척박한 험산을 오르며,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시험하고, 오랫동안 덮어둔 삶의 문제를 직면한 뒤에야 비로소 자아를 찾는 한 남자의 눈물 나는 여정… 은 기대하지 마라. 이 책은 위안을 발견한 유명한 순례자의 신앙 간증이라기보다는, 실패한 순례자가 집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다음의 인용문을 보라.


“유명한 순례자들은 어떤 먼 성소에서 위안을 구하고 발견한다. ... 그러나 어쩌면 실패한 순례자들도 약간의 구원을 발견할 것이다. 고통은 단지 고통이라는 것, 무덤은 텅 비었다는 것, 단 한 번 발을 씻는 것으로 인간 실존의 때를 벗겨낼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낙담한 일부 순례자들은 그래도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구원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실패한 순례자가 바라는 것은 약간의 다정함, 그리고 세상이 아예 한 톨의 희망도 없는 곳은 아니라는 단순한 직감이 전부일 것이다.”


    저자는 하염없이 걷기도 하고, 한계에 달할 때까지 곡기를 끊기도 하며, 천 길 낭떠러지 위에서 삶의 어려움과 마주하기도 하지만, 그의 자아 찾기 과정은 앞서 요약한 것처럼 상투적이지는 않다. 그의 여행담은 여행의 끝에서 견고해진—그리고 비대해진—자아를 뽐내기 위한 노출증 환자의 셀프 개인전이 아니다. 두 번의 여행과 17년이라는 시차, 나아가 세기를 사이에 둔 한 철학자—프리드리히 니체의 생애를 유령처럼 추체험하는 자기-버림, 또는 자기-되기being의 회고전이다. 다시 말해 『심연호텔의 철학자들』은 젊은 철학자가 비-철학적 에세이 형식으로 쓴 ‘니체의 유령들’인 셈이다. 



2-2. 실스-마리아는 니체가 오랜 세월을 보낸 장소다. 니체는 정신적∙육체적 역경을 겪을 때마다 이곳을 찾았다. 지금도 그곳엔 니체가 생활했던 니체하우스가 있고, 니체의 자취를 따라 알프스를 찾은 지식인들—아도르노, 마르쿠제, 헤세 같은 사람들—이 머물렀던 ‘심연호텔’이 있다. 저자 존 캐그는 열아홉 살 무렵 지도교수의 조언에 따라 스위스로 향했고, 자신의 철학적 우상인 니체의 흔적을 따라가 보기로 결심한다. 부왕의 유령이 햄릿을 인도하듯이, 니체는 캐그의 걸음을 이끄는 유령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유령의 부름에 귀 기울이는 영매의 일지다. 캐그는 니체의 생애와 철학을 자신의 삶과 교차시키며, 두 번의 여행길에 찍힌 발자국을 돌아본다. 카타콤을 찾아가던 순례자, 또는 화가의 무덤가를 부유하는 관람객의 심정으로.




3-1. 니체는 오늘날 가장 많이 인용되는 인문학계의 록스타이기도 하지만, 그에 비례해서 가장 많이 오해받는 철학자이기도 하다. 그 자신이 글을 함축적으로 쓰기도 했거니와 그의 사상 자체가 일관된 해석과 안정된 체계를 거부하는 탓이다.

    니체에 대한 오해는 니체의 경구를 그의 사상이나 생애와 떼어놓고 단편적으로 소비하는 작태만큼이나 니체의 철학을 고정된 체계로 간주하려는 엄밀하게 아카데믹한 접근에서도 기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대상, 특히 사람에 대한 종합적 판단을 내릴 때 우리는 흔히 일관된 상을 그리려고 한다. 그러나 때로 그 자신에게서조차 벗어나려 하는 니체의 사상을 정합성을 갖춘 이론으로 파악하려고 하면 오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니체의 철학은 전문 연구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니체를 읽는다는 것은 철학의 체계를 공부하는 것을 넘어 배후의 개인을 읽는 것이기도 하다. 철학자이기 이전에 니체를 흠모하고 동경하는 팬보이인 캐그는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캐그는 말한다.


“특정한 철학자를 오랫동안 읽으면, 그리고 사랑하면, 객관적 사실의 세계와 이상과 믿음으로 이루어진 상상의 세계를 차츰 혼동하게 된다. 이것은 철학 읽기의 진정한 즐거움 중 하나이며, 위험하지만 구원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2-3.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주로 열아홉 살 캐그의 첫 여행과 니체의 초년기를 다룬다. 2부는 정신적 아버지였던 바그너를 떠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 니체의 삶과 어느새 가정을 꾸린 캐그가 가족들과 함께 다시 실스-마리아를 찾는 여정이 교차된다. 

    ‘힘에의 의지’를 강조하고 대중을 경멸하며 “너 자신이 되라”고 요구하는 니체의 철학은 자기중심적인 사상으로 읽히기 쉽다. 『심연호텔의 철학자들』을 읽는 한 가지 방법은 니체 철학의 에고이즘적 성격을 대하는 캐그의 태도 변화에 주목하는 것이다. 캐그는 철학이 니체—그리고 니체의 선배인 쇼펜하우어—가 “삶을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었지만”, 동시에 “타인들과 함께 사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혼자 살 수 없다. 사랑하는 아내의 남편이자 딸아이의 아버지가 된 삼십 대의 캐그는 이를 본능적으로 이해한다.

    니체는 여러 의미로 위험한 철학자다. 저자도 서두에 언급하듯이 많은 이들이 니체를 청소년기에나 빠질 법한 철학자로 취급하기도 한다. 거리낌 없는 촌철살인의 언어가 치기 어린 감수성을 자극한다는 점에서는 맞는 얘기기도 하다. 그러나 니체의 진정한 위험성은 그가 판에 박힌 우리의 일상을 뿌리치고 우리 자신의 파멸을 종용한다는 데에 있다. (“너 자신을 위한 목표들, 고귀한 목표들을 세워라. 그리고 그것들을 추구하며 파멸하라!”) 그리고 그것이 니체 철학의 정수다. 니체는 우리가 자유로워지기를 바랐고, 그러기 위해선 자신을 매 순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니체가 요구하는 극기는 필연적으로 타자, 개중에서도 친밀한 주위 사람들과의 긴장을 유발한다. 이러한 긴장 속에서 캐그는 니체를 다시 읽는 법을 배운다. 아내와 딸을 건사해야 하는 캐그의 두 번째 여행은 내키는 대로 능선을 돌아다니며 극단적 단식과 야외 취침도 마다하지 않았던 첫 여행과 같을 수 없다. 캐그는 니체의 유령을 조우하지만, 니체의 유령도 또한 캐그(의 유령)을 조우한다. 선배와 후배의 상호작용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다. 니체가 캐그에게 영향을 주는 만큼 캐그도 니체를 새롭게 한다. 

    니체는 언제까지고 다시 읽혀야 하는 텍스트다. 그 자신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니체는 언젠가 등장할 “미래의 철학자”가 독단론자이기를 바라지 않았다. 설령 그 자가 자신의 추종자라 할지라도.

   

“그들[미래의 철학자들]은 독단론자가 아닐 것이다. 그들의 진실이 모두의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은 그들의 자부심에 반하고 또한 그들의 취향에 반할 것이 틀림없다. 그런 미래의 철학자는 어쩌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의 견해는 나의 견해다. 다른 사람은 나의 견해에 대한 권리를 쉽게 가지지 못한다.'”
(프리드리히 니체)



3-2. 알려져 있다시피 니체의 철학은 사후 그의 여동생 엘리자베스와 히틀러에 의해 나치즘의 기반을 다지는 데에 동원된다. 심지어 엘리자베스는 히틀러를 니체가 말한 ‘초인’으로 일컫기도 한다. 니체의 비판자들은 니체가 단순히 파시스트들에게 사상을 도둑맞은 피해자가 아니라고 본다. 니체 철학의 근저에 흐르는 힘에의 의지와 강한 에고이즘이 파시즘과 본질적으로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니체를 비판하는 대표적인 학자로는 버트런드 러셀 같은 이들이 있다. 러셀은 니체를 “학구적인 철학자라기보단 글쟁이”라고 비난한다. 니체의 초인은 “동정심도 없이 무자비하고 잔인하며, 오직 자신의 권력에만 관심이 있”다고 깎아내린다. 심지어 러셀은 “니체의 사상에는 과대망상 환자의 말이라고 간단히 치부해도 될 만한 부분이 많다”고까지 말하기도 한다.

    니체 사상과 파시즘의 친연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애써 반박할 마음은 없다. 이러한 해석을 니체에 대한 오독이라며 발끈하는 사람도 있지만, 어지간한 사상가들과 니체의 사상을 동렬에 놓고 보면 후자가 훨씬 과격하고 혼란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니체의 철학에는 파시스트들을 열광시키는 무언가가 있다. 니체를 “과대망상 환자”에 빗댄 러셀의 말도 사실 단순한 비난적 수사가 아니라 뼈가 있는 비유다. 니체는 오랫동안 정신적 고통을 겪었던 환자였다. 그 스스로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니체는 말한다. “나는 퇴폐인 동시에 퇴폐의 반대자다.”

    그러나 그것이 니체와 그의 사상을 폄훼할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니체의 병증은 시대의 타락에 대한 반응이었다. 니체는 완전무결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완전무결함이 철학과 철학자를 평가하는 기준일 수 없음은 당연하다. 평생 철두철미하게 확실성을 추구했던 칸트보다 시종 아프고 흔들렸던 니체에게 믿음이 가는 것이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니체의 철학은 위험하지만, 그 이상의 가능성에 닿아 있다. 니체의 사상이 강자와 귀족만을 위한 철학이라는 세간의 인식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채찍을 맞는 말을 끌어안고 눈물을 쏟았던 니체가 동정심 없고 잔인한 사람이라는 평가에도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니체가 동정심을 악덕으로 취급한 것은 그 자신의 예민한 기질에 대한 반감이었거나, 약자를 약자인 채로 두는 감상적 연민에 대한 경계였을 것이다. 니체는 우리가 모두 강자가 되기를 바랐다.


“내가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인간들에게 나는 고통, 황폐, 병, 혹사, 모욕을 기원한다. 그들이 근본적 자기 경멸, 고통스러운 자기 불신, 패배자의 참담함을 모르는 채로 머물지 않기를 기원한다. 나는 그들을 연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에게, 오늘날 한 개인이 가치가 있는지 아닌지를 증명해 줄 수 있는 단 하나의 것, 즉 그들 각자가 버텨내는 것을 기원하기 때문이다." (《힘에의 의지》, 1888)


    니체 철학의 잘잘못을 가리는 것은 따라서 무의미하다. 우리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니체는 성인이 될 수도, 적그리스도가 될 수도 있다.



1-2. 유령은 가능성 그 자체인 동시에 가능성의 조건이다. 유령은 다른 모든 것에 대해 열려 있다. 우리는 어떤 유령은 “푸닥거리”를 해서 내쫓기도 하고, 다른 유령은 상을 차려 놓고 맞이하기도 한다.



헤르만 헤세


2-4. 이윽고 여행의 막바지에 이른 캐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니체의 흔적을 좇아 알프스를 찾았던 헤르만 헤세를 떠올린다. 헤세는 성서에는 오류가 없다고 믿는 기독교 원리주의자들처럼 니체의 텍스트를 씌어진 대로 읽고 추종해야 한다고 믿는 수동적 독자가 아니다. 헤세는 니체가 옹호한 주인 도덕이 “지나치게 단순하고 비생산적”이라고 생각한다. 대신 그는 차라투스트라, 나아가 니체라는 인물 자체의 복잡성에 주목한다. “헤세가 보기에 그런 분열성은 광기의 증거가 아니라 그저 살아있음의 증거였다.”

    먼 길을 돌아 종착지, 아니 기착지에 들른 캐그는 “너 자신이 되라”는 니체의 언명을 다시 생각한다. 캐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 삶이 대부분 동안 나는 나의 진정한 자아는 "저 바깥"의 무언가라고 생각했다. 일상 너머의 무언가, 알프스의 높은 봉우리 위의 무언가라고 말이다. 
   ... "너 자신이 되기"의 핵심은 자신이 늘 탐색해온 "누군가"가 되기가 아니다. "너"를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떼어놓기가 아니다. ... 자아는 어딘가에 놓여 있는 채로 우리에게 발견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자아는 능동적이며 진행 중인 과정 안에서, "되다"를 뜻하는 독일어 동사 "werden" 안에서 만들어진다. �인간의 영속적 본성은 다른 무언가로 되기다.”
“어쩌면 니체가 말하고자 하는 자기-되기의 과정은 자신이 이미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기-지식을 무효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되어감'이란 끊임없이 자신을 상실하고 발견하는 과정이다.”



1-3. 자기-되기란 곧 유령-되기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올리비에 아사야스, 2014)


4. 몇 년 전에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라는 영화를 보았다. 솔직히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영화는 더 이상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없는 중년의 여배우 마리아의 삶을 다룬다. 

    아마 감독은 마리아가 늙어가는 것을 배우고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랐던 것 같다. ‘마리아’라는 작명은 물론 실스 마리아라는 영화의 장소와 겹쳐진다. 마리아로 분한 줄리엣 비노쉬의 걸출한 연기가 실스 마리아의 장엄한 풍광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면서도 묘하게 긴장을 유발한다. 

    골짜기를 감싸며 흐르는 “뱀을 닮은 구름”이 영화에서 자주 언급되는데, 당시에는 이 구름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잘 알지 못했다. 캐그의 책을 읽고 나서 문득 이 영화가 떠올랐다. 뱀은 때가 되면 변태하고 탈피한다. 뱀은 항상 똑같이 생겼지만 사실은 매번 쇄신을 거듭하는 동물이다. 뱀을 닮은 구름도 그렇다. 항상 같은 자리에서 한결같이 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몇 년 전에 보았던 구름은, 아니 어제의 구름조차 오늘의 구름과 다르다. 인간의 삶도, 배우의 삶도 그런 것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항상 흔들리는 것이다. 구름처럼. 또는 유령처럼.



https://youtu.be/mJDnkuwmhtU



5. "나는 삶의 고통들을 다시 한 번 맛보고 삶의 무의미함에 다시 몸서리 칠 것이다. 나는 한 번이 아니라 숱하게 다시 내 내면의 지옥을 가로지를 것이다. 언젠가 나는 삶이라는 게임을 더 잘하게 될 것이다. 언젠가 나는 웃는 법을 배울 것이다." (《황야의 늑대》, 헤르만 헤세)



번외. “니체는 민감한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날씨와 상관없이 빨간 우산을 가지고 다녔다. 차운은 마을의 다른 아이들과 함께 몰래 그 우산 속에 돌멩이들을 집어넣곤 했다. 니체가 우산을 펼치면, 그 돌멩이들이 비처럼 쏟아지곤 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성실한 노력이 놀랄 만큼 빈번히 역효과를 낸 사람, 그것이 니체였다.”


〈밀레의 만종을 고고학적으로 회상하기〉(살바도르 달리,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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