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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nui Feb 11. 2022

집이냐 방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한국 근현대 단편소설들 속 아파트

※일전에 수업 과제로 제출했던 글입니다.






집이냐 방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한국 근현대문학에서 나타나는 아파트의 형상화



김승옥의 「역사」(力士)에서 집은 문제적 공간이다. 신문지로 도배한 벽에 지저분한 낙서가 적힌 창신동의 허름한 하숙집에서 거처하는 젊은이는 “이 넓은 세계 속에서 더럽게 짝이 없는 이 방만을 겨우 차지할 수밖에 없느냐는 자기 혐오”에 젖어 무질서한 생활을 이어간다. 친구의 권유로 양옥집으로 하숙을 옮긴 그는 그러나 그곳에서도 숨이 막힐 듯한 이질감을 느낀다. 하얀 회로 벽을 칠한 양옥집에서의 생활은 청결하고 규칙적이지만 매일의 일과가 판에 박힌 듯 똑같다. 오후 네 시마다 “엘리제를 위하여”가 울려퍼지는 양옥은 불협화음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안식처가 집이라면 젊은이에게는 집이 없다. 이곳에서나 저곳에서나 간신히 한 몸 뉘울 ‘방’만 주어질 뿐이다. 얘기를 마친 젊은이는 화자에게 “어느 쪽이 틀린” 듯하냐고 묻는다.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한 화자는 하는 수 없이 “글쎄요”만 뇌까린다.

퇴폐가 만연한 창신동과 무질서를 허용하지 않는 양옥집의 강렬한 콘트라스트는 그러나 단지 소설적 허구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버스 하나”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창신동과 양옥집은 당대 서울의 이중적인 면모를 폭로한다. 소설의 화자가 서사의 가운데 있는 젊은이가 아닌 소설의 처음과 끝에서 말을 옮기고 논평하는 아무개여야 하는 까닭은 그래서이다. 화자의 말마따나 젊은이의 이야기는 “그런 대로 뭐랄까 상징적인 데”가 있고, 김승옥은 독자가 창신동과도 양옥집과도 적당히 거리를 두고 아무개의 눈으로 서울의 상징적 구조를 바라보기를 원한다. 





김승옥의 60년대를 지나 70년대로 접어들면서 「역사」의 문제 의식은 박완서에게로 계승된다. 창신동과 같은 판자촌을 밀어버리고 그 위에 들어선 아파트는 이 땅에서 퇴폐를 척결하고 무질서를 몰아낼 근대화의 첨병이요, 선망의 대상이었다. 60년대 양옥이 아직 삼대가 거주하는 구시대 질서의 산물이었다면, 6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건설된 아파트는 비로소 타인에게서 벗어난 독립적∙현대적 개인의 거주지로 각광받았다.

그러나 박완서의 소설에서 아파트는 아직도 문제적 공간일 따름이다. 아파트는 여전히 집이 되지 못하고 ‘방’으로 그치는 불안의 산실이다. 1974년 발표한 소설 「닮은 방들」의 제목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 소설에서 아파트는 그로테스크한 공간으로 그려진다. 결혼을 하고서도 7년이나 친정에 얹혀 산 소설의 화자는 마침내 남편과 아이들을 데리고 아파트에 입주한다. ‘나’는 독립적이고 현대적인 생활을 꿈꾸지만 콘크리트로 지어진 18평 아파트에 개인은 없다. 이웃들은 서로의 레시피와 인테리어 노하우를 공유하지만 건전한 의미에서의 나눔이라기보다는 경쟁적으로 서로를 따라 할 뿐이다. 심지어 ‘나’는 더 나은 생활을 꿈꾸며 즐거워하는 옆집 철이 엄마를 견딜 수 없어서 복권을 따라 사고, 철이 엄마는 ‘내’가 복권을 사자 활력을 잃기도 한다.

집을 가지고도 자기 자신을 소유할 수 없는 아파트 주민들은 방 한 칸 빌려 몸만 누이는 하숙생과 다를 바 없다. 그들 각각은 독립적 개인이 되지 못하고 균일한 하숙생으로 전락한다. 쌍둥이 아이들조차 구분할 수 없게 된 ‘나’는 철이 엄마가 집을 비운 틈에 철이 아빠와 섹스를 하지만 “죄의식도 쾌감도” 느끼지 못한다. 철이 아빠는 자신의 남편과 다른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방금 간음을 저질렀음에도 스스로를 처녀 같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 무구(無垢)함은 자연스러움이 아닌 비인간성에 기인한다. 그녀는 거울 앞에서 “생전 아무하고도 얘기해본 적도 관계를 맺어본 적도 없는 것같이 절망적인 무구를 풍기는 여자”를 발견하고 만다.

아파트의 비인간성에 대한 박완서의 비판적 시선은 「낙토의 아이들」(1978)과 같은 작품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낙토의 아이들」은 개발이 한창이던 강남을 떠올리게 하는 가상의 동네 ‘무릉동’을 배경으로 한다. 대학 강사인 ‘나’의 아내는 부동산 투기로 떼돈을 벌어들인 소위 복부인이다. ‘답사’를 순수한 학술 활동으로 여기는 ‘나’는 아내가 땅을 보러 갈 때마다 답사를 간다고 하는 것이 못마땅하지만, 아내의 경제력에 주눅 들어 차마 내색하지 못한다. 아들딸이 다니는 무릉국민학교는 ‘완벽한 질서’를 학생들에게 주입한다. “왜”라는 질문은 허용되지 않는다. ‘나’의 눈에 비친 이러한 학교는 “정서의 불모지대”이고, 아내 덕에 살게 된 고급 아파트는 “티끌만 한 불편도 허용 안 하는” 도리어 불편한 곳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이러한 생활을 박차고 나가지 못한다.



마포아파트



이처럼 박완서의 소설들에서 아파트는 질서와 위생을 강조하다 못해 사람다움을 지워내는 이상야릇한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인물들은 거미줄에 걸린 날벌레처럼 도무지 아파트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는 실제 현대 한국인의 삶을 반영한 것이리라. 콘크리트 괴물의 끔찍함을 신랄하게 포착한 작가 본인도 결국 아파트에서 살지 않았던가. 아파트는 문제적 공간인 동시에 가장 일상적인 공간이며 오늘날 한국에서 분리할 수 없는 조건이다. 어느 외국 학자의 말마따나 한국은 “아파트 공화국”이다.

따라서 박완서의 아파트 소설을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해선 ‘한국의 아파트’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박정희가 아파트를 “혁명 한국의 상징”으로 일컬었을 때, 서울은 급격한 도시화와 인구 과밀로 인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택의 표준화와 대량 공급, 부지의 효율적 사용을 가능케 하는 아파트의 공급이 도시 빈민들의 무질서한 생활과 열악한 위생 환경, 부족한 땅 문제를 일거에 해결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안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 시대에 씌어진 「닮은 방들」과 「낙토의 아이들」 같은 소설 속 주인공들은 아파트를 선망하면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이질감을 느끼면서도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닮은 방들」의 ‘나’와 남편이 친정에서부터 삶의 활기를 모두 잃어버린 것은, 아파트 바깥에서도 결코 ‘낙토’를 찾을 수 없었던 당대의 암울함을 시사한다. 






혹자는 박완서 소설들에서 나타나는 아파트에 대한 문제 의식이 지금도 유효한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아파트는 정말 박완서의 서늘한 필치가 묘사하는 것만큼 끔찍한 공간인가? 태어날 때부터 아파트에서 살았을 작금의 젊은 세대에게 아파트라는 공간에 대한 감각은 이전 세대와 다를 수밖에 없다. ‘판교 리얼리즘’으로 이름을 알린 장류진의 단편 「도움의 손길」을 살펴보자. 아이를 있으면 그것대로 좋겠지만 굳이 장만하기엔 거추장스러운 “그랜드 피아노”쯤으로 여기는 화자는 남편과 합의하에 딩크족으로 살기로 한다. 28평짜리 아파트에 입주하게 된 화자는 수준 높고 디테일한 취향을 새집에 덧입하며 집을 자신만의 공간으로 만들려 한다. 스스로 고른 가구와 화장실 타일, 침실 조명으로 아파트를 꾸밀 줄 아는 화자는, 철이 엄마의—실은 철의 엄마의 것도 아닌—취향을 따라 할 수밖에 없었던 「닮은 방들」의 화자를 촌스러워 보이게끔 하는 전형적 신세대 여성이다.

그러나 가구나 타일 따위를 자기 눈에 흡족한 것으로 채운다 한들 그것이 아파트를 온전한 나의 ‘집’으로 만들어주는가? 구태여 아도르노의 사이비개성화 같은 개념을 들이밀지 않더라도, 장류진 소설 속 아파트는 여전히 집이라기보단 ‘방’에 가까워 보인다. 장류진의 글에서는 박완서가 앞질러 포착한 아파트의 섬칫함은 찾아볼 수 없다. 대신 「도움의 손길」의 화자는 지나칠 정도로 위생과 청결에 집착하는 강박에 시달릴 뿐이다. 화자는, 그리고 장류진은 이를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말이다.

결국 낙토로 포장된 각방에 유폐된 현대인들은 개성의 대용물인 상품을 구매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취향을 과시적으로 가장하거나, 최인호의 「식인종」(1972)에서처럼 원초적 욕구와 호기심을 자극하는 헛소문을 강박적으로 지어내고 퍼뜨리며 간신히 지리멸렬한 생활을 이어갈 따름이다. 루쉰이 「광인일기」(1918)에서 ‘식인’으로 표상된 악습을 성토한 지 채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도리어 식인종을 요구하고 소비하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박완서의 아파트 소설이 오늘날에도 시의적절하다면 그것은 그녀의 소설이 공통적으로 포착하고 있는 이질적인 감각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상품에 대한 키치적 취향이나 씹고 뜯을 가십거리로는 해소할 수 없는 현대인의 본질적 불안과 맞닿아 있다. 소통은 없다. 개인은 이웃의 방을 똑 닮은 자기 방에 갇혀 자기에게 매몰된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단절된 채로 “절망적인 무구를 풍기는” 여자는 박완서의 소설 속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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