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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nui Aug 24. 2022

선택받은 자의 의무 (1)

〈캐빈 인 더 우즈〉와 『월요일은 토요일에 시작된다』의 연구소를 경유하여

선택받은 자의 의무

—〈캐빈 인 더 우즈〉와 『월요일은 토요일에 시작된다』의 '연구소'를 경유하여



“사실들은 언제나 충분하다. 부족한 것은 상상력이다.”
                                                    _드미트리 I. 블로힌체프 (1907~1979), 소련의 이론물리학자


"논리는 당신을 A에서 B까지 데려다 줄 것이다. 상상력은 당신을 어디로든 데려갈 수 있다."
                                                                                                            _알버트 아인슈타인


“어쩌면 행운의 기회가 될지도 모를 그 흥미로운 전망을 최대한 활용하는 대신, 대부분의 사람은 겁을 집어먹고 그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려고 애를 썼다. ...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전혀 예상하지 못하면서도, 나는 이미 기꺼이 열정적으로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_’첫 번째 이야기: 소파를 둘러싼 난리 법석’ 중


아르카디, 보리스 스트루가츠키 형제


1. 이 소설엔 주말이 없다. 평일만 끝없이 이어질 뿐이다. 아니 사실 평일도 없다. 이 소설에서 평일과 주말은 구분되지 않는다. 과학과 기적도 구분되지 않고, 이성과 마법의 경계도 뚜렷하지 않다. 말하는 물고기가 소원을 들어주고 동전은 써도 써도 주머니로 돌아온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책은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다른 책으로 바뀐다. 이상한 일이 자꾸 벌어지는데 인물들은 그걸 별로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타임머신이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고 상상과 현실이 뒤섞인다. 그야말로 문학적 난장(亂場) 이 따로 없다.


책은 책을 덮은 뒤에 시작된다. 훌륭한 책은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다른 책으로 바뀐다.


책을 덮고 나서도 “월요일은 토요일에 시작된다”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를 분명히 알 수 없었다. 작가 후기엔 이렇게 씌어 있었다. 


그것은 정확히 헤밍웨이적인 작품명, 우울하면서도 끔찍하게 절망적인 동시에 서늘하고도 사악한 인간적인 제목이었다…… 월요일은 토요일에 시작된다. 그렇다면 우리 삶에 축일이란 없는 것이며, 평일에서 평일로 이어지고, 흐린 것은 흐린 대로, 암울함은 암울한 대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헤밍웨이의 소설 제목을 인용하였음을 밝히지만 나는 헤밍웨이가 쓴 동명의 소설을 찾지 못했다.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소설의 제목에 대한 부연 설명을 하지 않고 제목 자체의 매혹만을 이야기하고 있다. 제목이 정해진 뒤로도 “이 소설은 오래도록 완성되지 않았고 심지어는 미처 고안되지도 않았으며, 압수된 제목은 메모장에 기록된 채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가 드디어 몇 년 후 비로소 빛을 보게 되었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는데, 애당초 아르카디와 보리스가 지금과 다른 제목들을 고려했다는 사실까지 염두에 둔다면 이 소설의 제목이 소설을 읽는 데에 그다지 유용한 힌트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추측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소설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위해 굳이 제목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꺼낸 것은 형제가 정체를 확인할 수 없는 헤밍웨이 소설의 제목에 깊은 인상을 받았듯이 나 자신이 형제의 소설 제목에 이끌려 책을 펼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오로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 삶에 축일이란 없는 것 (…) 흐린 것은 흐린 대로, 암울함은 암울한 대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라는 저자 후기에 주목하여 겉으로 드러난 소설의 천연덕스러움과 유머의 기저에 깔린 선뜩한 블랙코미디를 조명하기 위함도 아니다. “공산주의의 이상”과 “휴식과 안식이 제거된 소비에트 현실”을 대치시키며 이 소설을 당대 소비에트 사회의 끊임없는 노동과 그로 인한 권태를 표현한 환유적 풍경으로 요약한 역자의 해설에 고개를 끄덕일 생각은 더더욱 없다.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소설에서 제시되는 휴일 없는 노동은 고됨을 동반하는 노동labor, 다시 말해 쿠르베의 사실적인 노동화에 나타나는 것과 같이 신체를 소모하는 그런 재생산활동이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난리 법석’에 가까운 즐거운 소동이며(이 소설은 총 느슨하게 묶인 세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이야기의 제목에는 모두 ‘난리 법석’이 들어간다.), 그러나 신체 없는 (상상의) 소동이고, 상상은 작가의 묘사에 힘입어 비로소 몸피를 얻는 그 자체 실체reality인 것이다.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저자들이 에둘러 암시하듯이, 소설이란 언제나, 설령 그것이 과거를, 또는 이 소설의 장르인 SF소설들이 으레 그러하듯 미래를 묘사할 때조차, “묘사된 현재인 법이다. ("그럼 세들로보이는 묘사된 현재로 여행할 시도는 안 해봤대? 내 생각에 그게 훨씬 더 재미있을 것 같은데......") 서술과 실재, 그리고 감상 사이의 메꿀 수 없는 시차에도 불구하고, 픽션을 읽고 쓰는 행위는 언제나 현재적인 의미를 지니기 마련이다.


묘사는 대상을 재현하는 기술이다. 어떤 소설은 이러한 규준을 따르지 않는다. 『월요일은 토요일에 시작된다』에서 비밀스러운 연구소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단순히 대상의 재현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다. 플로베르가 『마담 보바리』에서 구사하는 길고 섬세한 묘사가 실제 사건의 단순한 재현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다. 어떤 묘사는 묘사 자체로서 지속한다. 그런 묘사들로 씌어진 소설은 자체적인 중력을 갖는다. 그것은 말하자면 (플로베르가 목표로 하였던) ‘무에 관한 책’일 터이고, 다른 모든 것의 경계를 풀어헤치고 자유롭게 변형시키는 상상의 마중물이며, 우리로 하여금 꿈을 꾸도록 하는 ‘변환기’이기도 하다. (이 소설의 첫 번째 장은 ‘소파를 둘러싼 난리 법석’이다. 소파의 정체는 두 번째 장에서 곧바로 드러난다. 소파는 주변에 M-자기장을 형성함으로써 현실을 동화적 현실로 변형시키는 변환기다. 즉 ‘소파’는 바로 이 소설의 메타포다.)


나는 글을 쓰기 전에 개요를 거의 짜지 않고, 그러다 보니 글을 쓰다 보면 종종 곁가지로 빠지곤 한다. 지금과 같은 경우가 그러한데, 이쯤에서 다시 우리는 소설의 제목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와야 한다.


대체 왜 월요일이 토요일에 시작하는가?

주말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달력엔 어째서 빨간 날이 없는가?

마법사는 언제쯤 쉴 수 있는가. 과학자는 언제 교대할 수 있는가.


방금 전에 나는 노동자라고 쓰는 대신 마법사 그리고 과학자라고 썼다.

이 소설의 제목에 얽힌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서는 마법사와 과학자의 정체를 소명해야 한다.




〈캐빈 인 더 우즈〉(2011, 드류 고다드)


2. 호러 마니아들에게 〈캐빈 인 더 우즈〉는 종합선물세트 같은 영화다. 종합선물세트라는 비유가 너무 진부하게 들려서 스스로도 별로 만족스러운 비유는 아니지만, 〈캐빈 인 더 우즈〉를 설명하기에는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이 없다.


한 무리의 학생들이 오두막으로 여행을 떠난다. 음험한 노인이 학생들에게 경고하지만 학생들은 듣지 않는다. 이들은 우연히 지하실에서 저주받은 책을 찾고, 주문을 외워 좀비를 부활시킨다. 일행은 흩어지고 한 명씩 살해당한다. (물론 가장 먼저 죽는 이는 언제나 문란한 금발 미녀다.)


〈캐빈 인 더 우즈〉는 이처럼 산장 슬래셔의 클리셰를 그대로 따르면서도, 기존 호러 장르의 공식을 완전히 해체하고 풍자한다. 학생들을 산장으로 몰아넣고 이들이 살해당하는 광경을 지켜보는 ‘연구소’라는 장치를 통해서다. ‘처녀’ 주인공의 분전으로 밝혀지는바, 이 지하 연구소는 인류를 멸망시킬 만한 힘을 지닌 고대괴수에게 인신 공양을 하기 위해 설립된 비밀조직이다. 이들은 세계 각지의 온갖 괴물들을 모아 관리하며, 사람들을 죽여 제물로 바친다. 연구소 직원들은 살해현장을 스포츠처럼 관람한다.


연구소는 자극적인 장면을 기다리는 관객과 매너리즘에 빠진 창작자들의 공모 기관이다. 게으른 창작자들은 얼핏 보기엔 관객에게 아첨하는 것 같지만 실은 누구보다도 더 관객들을 깔본다. 인류의 생존이라는 고리타분한 대의명분을 앞세우고, 자신들을 대의의 대리자로 내세우는 연구원들은 그러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 〈캐빈 인 더 우즈〉는 콧대만 높은 게으름뱅이들에게 엿을 먹이고, 시시껄렁한 대의명분을 조롱하며 끝난다.






3. 『월요일은 토요일에 시작된다』에서도 연구소는 서사를 견인하는 핵심 장치다. ‘첫 번째 이야기: 소파를 둘러싼 난리 법석’은 레닌그라드 출신의 프로그래머 알렉산드르 프리발료프 이바노비치가 휴가를 보내기 위해 시골로 여행을 왔다가 두 명의 히치하이커를 만나며 벌어지는 소동극이다. 히치하이커들은 프리발료프에게 자신들이 일하는 연구소에서 같이 일하자는 제안을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찾고 있는 것은 아무 프로그래머가 아니고, 꼭 당신과 같은 프로그래머라고 입에 발린 소리를 한다. 이바노비치는 히치하이커들이 마련해준 소파가 있는 숙소에서 기거하며 갖가지 환상적인 일들을 겪는다. 알고 보니 소파는 히치하이커들의 연구소에서 보관하는 물품이었고, 이바노비치는 이들과 엮이게 된다.


소파가 이 소설 전체를 표상하는 메타포라는 점은 이미 앞서 지적했다. 『월요일』의 첫 번째 장은 사실상 이 책을 짚어든 독자가 소설에 빠져드는 과정을 형상화한 이야기다. 이바노비치는 1장에서 계속 정체 불명의 친구들을 기다려야 한다고 진술하는데, 그가 말하는 친구들은 첫 번째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도 나타나지 않을뿐더러, 다음 장부터는 아예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1장에서 이바노비치가 친구들을 기다린다는 설정은 또 다른 독자를 예비하는 은유인 셈이다.


‘두 번째 이야기: 난리 법석 중의 난리 법석’은 본격적으로 환상의 세계를 다루는 판타지다. 이바노비치는 레닌그라드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연구소의 신입으로 취직한 상태다. 이 연구소의 연구 주제는 다음과 같다: ‘인간의행복’, ‘불행’, ‘삶의의미’, ‘예언과선견’, ‘절대지식’, ‘영원한젊음’, …


연구소의 직원들은 마법사들인데, 우리는 여기서 아서 클라크의 유명한 말, “충분히 발전한 과학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는 SF의 오랜 격언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기관에서 일하는 마법사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평범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 세계를 대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인간의 행복과 인간 삶의 의미에 대한 문제를 탐구하는 연구소에서 일했지만, 그들 중 그 누구도 심지어 행복은 무엇이며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면서 그들은 행복이란 미지의 것에 대한 끊임없는 인식에 있는 것이며, 삶의 의미도 그와 마찬가지라는 학문적 가설을 채택하고 있었다.” 


눈치 빠른 독자는 이미 여기서 알아챘겠지만,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월요일』이 “평범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 세계를 대하”는 사람들에 관한 소설임을 이미 여기서 밝히고 있다. 이를테면 『월요일』은 선택받은 사람들에 관한 소설이다(히치하이커들이 처음 만난 이바노비치에게 꼭 당신 같은 프로그래머여야만 한다고 했던 것을 떠올리자). 그러나 『월요일』이 함축하고 있는 모종의 선민의식은, 〈캐빈 인 더 우즈〉가 신랄하게 비판한 게으른 연구원(창작자)들의 우월 의식과는 다르다.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모든 사람은 영혼 속에서는 마법사”라고 천명한다. 마법사가 되고 말고는 선험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마법사가 될 자질을 갖고 있다. 문제는 자질을 어떻게 계발하느냐에 달려 있다. 마법사를 마법사이게끔 하는 조건은 다음과 같다: 진정한 마법사가 되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적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할 때이며, 낡은 의미에서의 오락을 즐기는 것보다 일하는 것이 더 즐거울 때다.”


소설 제목의 미스터리도 이 지점에서 풀리게 된다. 연구소 직원들은 연말에도 쉬는 대신 빠짐없이 일터에 나온다. 그러나 이들은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를 하는 것이며, 직원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마법사다.(그리고 물론 그들은 과학자다.) 그들은 선택받은 사람들인데, 선택은 권리가 아니라 의무를 부여한다. 그들은 휴일조차 반납하고 인류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 누가 그렇게 시켜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그러고 싶기 때문이다. 마법사의 지위는 영구적인 것이 아니며, 게으르거나 냉소주의에 빠진 사람은 자리를 보전하기 어렵다. 냉소주의자는 “네안데르탈인에서 마법사로 넘어가는 전환기적 단계에 있는 사람”이라고 저자들은 쓴다. 냉소적인 생각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동해야 한다고도.


그리고 실제로 그들 자신의 말마따나 그들은 소설로서 행동한다. 형제에게 주말은 없다. 예술은 현실의 타락에 끊임없이 대응하기 위해 존재하며, 예술이 그러하다면 예술가의 의무는 끝없이 생각하고 고민하며 예술을 통해 현실과 상호 작용하는 것이다.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인류의 현실을 좀먹는 거짓을 신랄하게 풍자한다. 인간의 행복이 오로지 욕구의 충족에서 비롯한다고 믿는 연구원 비베갈로는 증기압력기를 개발한다. 증기압력기는 “이상의 모델”이며,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요구”가 담긴 “종합적 수요자”다. 그는 자신의 발명품이 인류의 영원한 행복에 기여하리라고 믿는다. 물론 로만의 말처럼 그것은 “전형적인 슈퍼이기주의자”일 뿐이며, 성공할 수 없는 기획이다. 욕구는 결코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비베갈로는 그 말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거야. 진정한 영혼의 만족은 소비하는 것만이 아니라, 생각하고 느끼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말이야.”


“어쨌든 연구소가 퇴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는 이제 어렵지만, 연구소는 사람이 마법사로 변신하는 모든 가능성을 무제한 제공하고 있다”는 구절에서 우리는 상상력이 말살된 엄혹한 현실—단지 소련 치하의 정치적 억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에 대한 저자들의 우울한 전망과 함께 대책 없는 희망을 읽는다. 『월요일』은 조금도 우울하지 않은 우스꽝스러운 소설이다.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미래를 낙관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가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관습적인 세계 외에도 현실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특성을 가진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안나 카레니나, 돈키호테, 셜록 홈스, 네모 선장이 살고 활동하는 세계”의 실재를 믿는다. 그리고 예술이 인류와 세계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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