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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nui Aug 24. 2022

선택받은 자의 의무 (2)

〈캐빈 인 더 우즈〉와 『월요일은 토요일에 시작된다』의 연구소를 경유하여


선택받은 자의 의무—〈캐빈 인 더 우즈〉와 『월요일은 토요일에 시작된다』의 연구소를 경유하여



(앞의 글에 이어...)



4. 작년 말에 단편소설 한 편을 가까스로 퇴고했다. 그뒤로 오랫동안 소설을 쓰지 못하고 있다. 이런저런 글을 끼적이고는 있지만 소설다운 소설로, 그러니까 또다시 플로베르의 말대로라면 “어떤 버팀대도 없이 공중에 떠있는 지구” 같은 소설로 엮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술을 마시고 취했거나 취하지 않았어도 취한 것 같은 어떤 새벽엔 간간이 흡족한 글이 나오기도 한다. 열심히 백업해 두고는 있지만, 과연 그 글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을는지는 확신이 없다.


확신이 없을 때에는 재능에 대한 생각을 한다. 마루야마 겐지가 그랬다. 재능이란 남들보다 뭔가를 더 가진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은 모두 갖고 있는 능력이 한두 가지 결여된 상태를 뜻한다고. 평범한 사람들은 겐지의 이 문장을 재능의 결여를 채우려고 하는 열등감이야말로 그 격차를 메꾸는 재능이라고 해석할 것이고, 그러한 해석이 전혀 틀리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그들이 겐지의 문장을 읽고 자기 분야에서 더욱 활기를 찾기를 바라지만, 내 생각에 겐지가 말하는 재능은 특히 예술가, 개중에서도 소설가에게 요구되는 특정한 재능을 말하는 것에 가깝다. 열등감은 소설가의 자질이다. 소설가의 재능은 필력이 아니라 결핍이다. 나는 기초적인 생활감각도 모자란 불완전한 사람이고, 오한기에 따르면 사람이라는 존재는 완벽할 수 없으니까 나는 역설적으로 완벽한 사람이며, 그런 의미에서 내게는 분명히 소설가로서의 재능이 있다.


재능에 대한 생각은 자주 이쯤에서 멈춘다. 요즘엔 그래도 몇 줄 더 추가되었다


: 그리고 나는 인간으로서의 재능도 포기할 생각이 없다. 나는 위대한 소설가가 되는 동시에 좋은 사람이나 능숙한 인간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나는 둘 중 하나만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아무것도 되지 못할 수도 있고. 블랑쇼의 말마따나 재능이란 외부에서 우연한 계기를 통해 와서 그 사람을 상상조차 못했던 곳으로 데려가는 것이기도 하니까. 『월요일』의 이바노비치는 휴가차 우연히 들른 마을에서 히치하이커들을 만나 마법사가 되지만, 내게는 그러한 우연한 계기가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불운이지만 불행은 아니다.


그리고 스트루가츠키 형제는 재능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고 말한다. 그건 노력이기도 하지만 노력만은 아니다. 재능이나 노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에 대한 태도다. 형제는 단언한다.


“모든 사람은 영혼 속에서는 마법사다. 그러나 그가 진정한 마법사가 되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적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할 때이며, 낡은 의미에서의 오락을 즐기는 것보다 일하는 것이 더 즐거울 때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평범한 사람들과 같은 태도로 세계를 대하고 싶지는 않다.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섹스와 맛집 탐방과 번잡스러운 수다와 술자리로 일생을 낭비할 생각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선택받은 사람이다. 선민의식과 자의식 과잉에 취한 얼치기라고 불러도 좋다. 당신들을 훈계할 마음은 없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삶을 사는 것이고 나는 거기에 대해선 가능한 한 불만을 품지 않으려고 한다. 가끔씩 불만스럽기는 하지만 누구나 타인에 대해 그 정도의 짜증은 부릴 수 있는 법이다. 나는 오로지 당신들에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나는 다만 게으른 나 자신에게 책임을 지우려는 것이다. 예술가로서의, 작가로서의 책임을. 나는 생각한다. 생각해야 한다. 나는 본다. 봐야 한다. 나는 쓴다. 써야 한다. 나는 살아야 한다. 나는 산다. 인간답게 살아야 하고 작가답게 써야 한다. 나는 모든 걸 책임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선택받은 사람이다.


장 뤽 고다르가 그랬다지. 작가에게는 권리가 없다. 다만 의무만 있을 뿐.

그러니까 월요일이 토요일에 시작된다는 제목은 대충 이런 뜻이다: 스테이 험블, 스테이 헝그리, 킵 하드, 킵 고잉.

나는 소설을 선택하지 않았다. 소설이 나를 선택했다.

카프카, 목 닦고 기다려라. 당신 모가지를 따러 갈 테니.

나는 선택받은 사람이다.






5. ‘나’라는 주어를 너무 많이 쓰는 것은 좋지 않다. 자아는 나르시시스트의 환상이다.(현대인들은 나르시시즘에 중독되어 있다.) ‘나’에서 의무를 채우고 권리를 비운 다음엔 조금의 여유와 게으름도 허용해야 한다. 여유와 게으름이야말로 우리를 내부에 가두는 대신 외부로 열리도록 하는 것이니까. 그렇다고 해서 “영원함에 대한 인식은 영원한 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일하든 일하지 않든 매한가지”라는 절대지식부서의 슬로건을 따를 필요는 없다. 단지 블랑쇼의 말을 다시 상기하도록 하자. 재능은 바깥을 향해 열려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우연한 기회라는 점을.


그리고 우리는 『월요일은 토요일에 시작된다』의 결말에서도 비슷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매일 시간을 역행하는, 미래가 아닌 과거로 돌아가는 야누스는 프리발료프에게 말한다.


“"좋은 책을 끝에서부터 읽는 것은 좋지 않아요, 그렇지 않습니까?" 야누스 폴루엑토비치는 노골적으로 나를 관찰하면서 말했다. "그리고 질문에 대해서는 말이죠,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그것은...... 이해해 주세요, 모두에게 단일한 미래라는 것은 없답니다. 미래는 다양해요. 또한 당신의 행동 하나하나가 미래 속에 다른 무언가를 만들게 되지요. 그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모두에게 단일한 미래라는 것은 없다. 미래는 다양하고,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미래 속에 다른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월요일』과 같은 픽션은 우리를 지겹고 뻔한 일상에서 구출해 낸다. 그러나 찾는 자가 찾을 것이고 구하는 자가 구할 것이니, 나보코프의 말대로 “예술가의 열정”과 “과학자의 인내심”을 지닌 사람만이 현실에 틈을 내는 픽션의 역능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월요일』은 선택받은 이들을 위한 소설이다. 현대인들은 신비주의자를 경계하지만, 모든 걸 기계적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속류적 유물론자는 부두 주술사보다 더 위험하다. 문학은 신비를 가능하게 하는 합리다. 관건은 합리적인 신비주의자가 되는 데 있다.


“단지 이 동화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하긴 동화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이 동화를 할 일이 없어서 쓴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동화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허구이지만, 분명히 시사하는 바가 있다.)” _젊은 과학자들에게 저자들이 부치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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