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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nui Dec 31. 2022

트뤼포 서평

#영화감독 #누벨바그 #도서협찬


이번에 개정된 을유문화사의 『트뤼포: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 말미에는 정성일의 추천사가 담겨 있다. 책을 처음 받았던 월초에 나는 트뤼포—라고 쓰고 정성일이라고 읽는—의 시네필3원칙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혹시라도 정성일이니 트뤼포니 하는 이름이 익숙지 않은 분들을 위해 복습해 본다.

 

*영화를 사랑하는 데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다.

1. 같은 영화를 두 번 봐라.

2. 영화에 대한 글을 써라.

3. 직접 영화를 찍어라.


정성일은 트뤼포가 이런 얘기를 했다고 했지만 트뤼포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트뤼포는 그저 자기가 아는 건 영화와 가까워지고 싶었다는 것뿐이라고 했고, 그래서 셀 수 없이 많은 영화를 봤다고 했고, 영화관에서 나오면 감독의 이름을 적어 두었다고 했다. 그리고 같은 영화를 몇 번이고 다시 보면서 본인이 감독이라면 어떻게 찍을 것인가 고민했다고.


책에 대한 기대평을 쓰면서 정성일의 시네필 테제를 언급할 때 나는 정성일이 이 책에 추천사를 남겼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추천사에 바로 그 논란의 시네필 테제에 관한 본인의 코멘트가 있을 거라고도.


솔직히 말하면 정성일의 이 추천사를 그대로 옮겨 적는 것보다 『트뤼포: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에 관한 더 나은 서평을 적기는 어렵겠다. 추천사 전문을 통째로 옮기고 싶지만 핵심만 간추려 적으면 다음과 같다.


“내가 오랫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트뤼포의 조언이 있었다. 나는 그걸 시네필의 테제라고 믿었다. (…) 생각해 보니 내가 원문을 읽은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 의심을 하기에는 이 문장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 솔직히 말하면 이 근사한 말을 내가 만들어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이 말이 좋다. 아쉽게도 이 테제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그렇긴 하지만 트뤼포의 세 단계를 비틀어서 다시 정식화시킨 두 번째 저자에게 나는 진심으로 감사한다. 당신의 말이 지구상에서 나만 혼자서 같은 영화를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여러 번 보는 것이 아니었으며, 그래서 외롭지 않았으며, 방금 보고 온 영화에 대해서 아무도 읽지 않을 글을 밤새도록 쓰고 있었으며, 그래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으며, 직업 영화 평론가가 된 다음에도 감독을 반드시 해야 한다, 라는 명령을 스스로에게 내리면서 해야 하니까 할 수 있다, 라는 준칙을 세울 수 있었으며, 그래서 영화를 찍었다. 그게 전부다. 이 말이 누군가를 망쳤다면 진심으로 사과한다. 하지만 누군가 이 말의 힘으로 감독이 되었다면 이 말을 전해 준 내게 감사해야 한다. 이 말을 당신의 말로 믿고 지구 반대편에서, 당신에게 미치지는 못하지만, 정말 열심히 영화를 사랑하고, 영화에 관한 글을 쓰고, 영화를 찍은 내 이야기를, 프랑수아 트뤼포, 당신께 할 수만 있다면 들려드리고 싶다. 하지만 이제는 기회가 없다. 〈녹색 방〉의 한 장면을 떠올리면서 당신께 이 말을 고백하고 싶다. 당신은 내게 영화를 향한 사랑의 서약을 가르쳐 준 사람입니다.”

(중간에 비문이 있는 것 같지만 짚고 넘어가지 않기로 하자. 비문이어도 감동적이니까.)


코끝이 시큰하리만치 수줍은 고백을 옮겨다 놓고 곧바로 초를 치려니 민망하지만, 감히 평가컨대, 나는 정성일이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감식안을 지닌 영화 비평가인지는 잘 모르겠다. 글솜씨도 마찬가지. 가끔 이렇게 감동적인 글을 쓰기는 하지만 내가 접해본 정성일의 글은 대개 필요 이상으로 현학적이었다. 지금에 와서는 어떤 글을 읽었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지만, 평론가 정성일에 대한 내 인상은 대체로 이러하다.


하지만 질문을 바꿔서, 한국에서 영화에 가장 진심인 평론가가 누구인지를 묻는다면, 역시 정성일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영화인’으로 범주를 확대하더라도 선택지가 그다지 넓어질 것 같지는 않다.


이동진, 김혜리, 허문영과의 영화 별점에 관한 논담에서 정성일은 평론가로서 별점을 매기는 순간 비평적으로 할복 자살 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가 묻고 싶다고 말했다. 나도 어지간히 예술지상주의자이고 낭만주의자에 가까운 사람이지만, 해당 발언에서 드러나는 정성일의 태도는 지나치게 진지하고 완고하고 신비주의적이라 조금 웃기다. 여기서 이동진은 “인생이란 성냥갑 같아서 너무 가볍게 다루면 위험해지고, 너무 무겁게 다루면 우스워진다”는 아쿠타카와 류노스케의 말을 비틀어 인용하며 맞받아친다. 이동진의 한판승.


어쩌다 보니 트뤼포 전기에 관한 서평에서 정성일 이야기만 늘어놓게 됐는데, 다 이유가 있다. 다시 책을 처음 펼치던 시점에서의 질문으로 돌아가면, 나는 정성일이 왜 트뤼포의 이름을 빌리게 됐던가를 물었었다. 추천사에서 정성일은 답한다. “프랑수아 트뤼포가 영화사상 최고의 감독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영화사상 가장 영화를 사랑한 감독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정성일이 한국 영화사상 최고의 비평가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한국 영화사상 가장 영화를 사랑한 비평가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물론 사랑을 정량화할 수 없는 바에야, 이러한 얘기들은 모두 하나 마나 한 말에 불과하겠지만, 그들이 걸어온 태도가 이러한 내용의 실속을 얼마간 보증한다고는 할 수 있겠다.


히치콕은 트뤼포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트뤼포는 히치콕에 관한 중요한 책을 남겼고, 정성일을 비롯한 트뤼포 이후의 세대들에게도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그 계보는 정성일에서 다시 그 후세대의 누군가에게로 이어진다. 트뤼포의 전기를 읽는 것은 그러한 계보를 이으려는 시도다.


그러므로 영화를 사랑한다고 자부한다면, 『트뤼포』를 읽지 않을 수는 없다.



P.S. 혹시라도 이 책을 읽고자 하는 독자는 추천사를 먼저 읽고 본문을 읽길 바란다. 정성일은 또한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는 꼭 먼저 책을 읽기 전에 보라고 강조하는데, 이는 나도 동의하는 바다. 트뤼포의 전기를 읽으려면 앙투안 드와넬을 먼저 보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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