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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nui Apr 12. 2023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

딱 한 문장에 관한, 즉 한 사람에 관한 코멘트



여러분은 어떨 때 문학을 읽으십니까?


저로 말씀드리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 청춘이라는"(심보선, 「청춘」) 놈을 아무렇게나 흘려보내고 있다고 느낄 때, 달리 말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고 앞으로도 모를 것만 같을 때,


이런 때에는 문학을 읽지 못합니다. 슬퍼하고 괴로워하느라 문장이 눈에 들어오질 않거든요. 그럴 때에는 차라리 얼마 없는 친구를 만나거나 잠을 청합니다. 술도 마시고 담배도 합니다. 생각 없이 볼 수 있는 오락영화를 보기도 하네요. 아무튼 그렇게 적당히 달래야 합니다. 스스로를 얼마간이라도 추스를 수 있을 때까지요. 어쩌면 그냥 시간을 견디고 흘려보내는 것 말곤 달리 할 수 일이 없는지도 모르겠네요.


'막막하고 답답하고 쓸쓸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다잡고 살아봐야겠다고 생각할 때.'―그런 때에야 비로소 문학을 찾아가고 문장을 궁리하게 됩니다. 저에게는 문학 자체가 그런 의미입니다. 의미보단 의지라고 하는 게 더 맞으려나요.


세상엔 수많은 문학작품이 있고, 그중에서 만듦새가 훌륭한 작품들만 꼽더라도 밤하늘의 별만큼 많습니다. 방금 찾아보니 육안으로 관찰 가능한 별의 개수는 3천 개 정도라고 하네요. 아마 인류사의 정전을 낫잡아 헤아려 보면 그 정도 되지 않을는지요. 그렇게 본다면, 우리의 망막에 잠시 비치었다가 영겁의 망각 속으로 스러지는 문장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눈에 보이는 곳 너머 온 우주를 채우고 있는 별의 개수만큼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좋은 문장은 드뭅니다. 그래도 다행히 좋은 문장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서글픈 문장도 있고, 우리들 살아가는 세태를 정확히 담아낸 날카로운 문장도 있습니다. 아름답기 그지없는 묘사도, 폐부를 찌르는 유머도 있습니다.


어떤 문장을 꼽아야 할지 고민했습니다. 만약 내가 좌뇌를 다쳐서 모든 언어를 잃어버린다고 하더라도 끝끝내 남기고 싶은 하나의 문장은 어떤 문장일까, 이어야 할까. 남들에게 소개하는 차원에서 비교적 많이 알려지지 않은 소설이나 작가의 명문장을 꼽아볼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만, 이내 포기했습니다.


아무튼 보편적이고 짧은 문장을 뽑아야겠다. 왜? “정말이지 말은 짧을수록 좋으니까요. 그것만으로 믿음을 줄 수 있다면."(다자이 오사무, 「잎」)


제가 꼽은 하나의 문장은 그런 문장입니다. 끝까지 기억되고 각인되는 문장. 의미가 의지가 되고 의지는 의미가 되는, 생(生)의 버팀목 같은 문장이라고 할까요.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어." 노인은 말했다. "사람은 파괴될 수 있을지언정 패배하지는 않아"



앞뒤 대목을 같이 읽으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더 길게 첨부하진 않겠습니다. 


제가 이 문장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미 그런대로 얘기한 듯하니, 한 가지만 덧붙이겠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헤밍웨이의 노인은 패배하지 않지만 승리하지도 않았다는 것을요. 저렇게 멋들어진 의지의 문장을 내뱉고 나서도, 노인은 바다와 사투하며 끝없이 무너지고 고갈됩니다.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좌절합니다. 잡념에 시달리고 허무를 마주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싸워 나갑니다. "희망을 버리는 건 어리석은 짓"이니까요. 어리석을뿐더러, "죄악"이니까요. 그는 몇 번이고 절망스러운 상황에 맞닥뜨리고 난바다까지 나온 걸 후회하기도 하지만, 어떻게든 스스로를 다잡습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되뇌입니다. "싸우는 거지, 뭐."


모든 문제를 일소해 주는 최종해결책 같은 건, 우리 생엔 없을 것입니다. 오늘 깨달음을 얻어도 내일은 번민할 겁니다. 앞으로도 수없이 힘든 날들이 펼쳐질 거라고 생각해요. 내일은 슬프고 모레는 아플 겁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별거 아닌 날들도 지나갈 테구요. 그러다 가끔씩 좋은 날도 있을 겁니다. 노인이 여든다섯 번째 날에 청새치를 낚아올렸듯이, 두세 달에 하루이틀 쯤은 기쁘고 의미로 충만한 날들도 있지 않을까요. 단지 그날까지 조금의 응원과 진실된 희망이 필요할 뿐입니다. 값싼 위로나 주의를 딴 데로 돌리는 잡기 대신이요.(글쎄, 이런 것들도 가끔씩은 필요하려나요?)



물론 헤밍웨이는 자살했습니다.


그가 파괴된 건지 패배한 건지, 헤밍웨이씨한테 물어본 적도 있는데요, 자기도 잘 모르겠더랍니다. 한때는 그가 패배하는 대신 파괴된 거라고 생각하려고 했는데요, 자살을 파괴라고 할 수 있을진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패배했을지도 모르죠 뭐.


하지만 무슨 상관이랍니까.


삶을 저버릴 것 같은 사람만이 패배하지 않는다는 문장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니 설령 패배했다 한들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헤밍웨이가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했다는 점, 살기 위해 썼다는 점, 그것만이 지금의 제겐 중요합니다.


어느 불란서 시인은 바람이 부니 살아야겠다고 했다죠?


꿋꿋이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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