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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nui Feb 04. 2023

기록: 통영, 23년 겨울, 바다, 부코스키

230131~230202 거제-통영


"자기 주변이 온통 바다에 둘러싸인 광경을 보지 못한 사람은 자신과 세상의 관계도 이해할 수 없으리라......인간의 마음이란 드넓고 커서 끝이 없는 것이 필요하다. "
                                                                                    『이탈리아 기행』_요한 볼프강 폰 괴테





통영에 도착했을 때는 점심시간이었다. 바로 밥을 먹으려고 했는데 날씨가 너무 좋았다. 천천히 바다 구경을 했다. 미리 찾아놓았던 횟집은 장사를 쉬었다. 바다와 면한 다른 식당에서 물회를 먹었다. 맥주도 마셨다. 나른하게 너울거리는 바다를 보니 담배 생각이 났다.


전날엔 거제도에 있었는데 다도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 외엔 별로 기억에 남는 게 없다. 유명 관광지를 빙빙 돌기만 하다 하루가 갔다. 나는 여행을 많이 다녀 봐야 시야가 트이고 견문이 넓어진다는 류의 경험팔이를 신뢰하지 않는 편인데, 그날은 나도 모르게 뭔가를 보고 느껴야 한다는 강박이 들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최근에 일을 관둔 탓이다.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는데 오히려 꼬인 기분이었다. 통영에서는 머리를 비우고 쉬기로 했다. 통영 바다는 널찍했고, 아늑했다. 견문은 몰라도 기분 전환엔 도움이 됐다.


벽화마을이 통영에선 가장 유명하다길래 잠깐 들렀다. 천천히 동네 구경을 했다. 눈길을 잡아끄는 볼거리는 딱히 없었고 달리 보고 싶은 관광지도 없었다. 전망대에서 거북선을 내려다보다가 배우 김영호씨가 이순신 장군 역할로 나오는 홍상수 영화가 떠올랐다. 참, 그 영화 배경이 통영이었지: 나폴리모텔, 문소리, 김상경, 하하하.


검색해 보니 삼도수군통제영이 인근에 있었다. 생각난 김에 거기나 가봐야겠다 싶어서 거기나 갔다.


〈하하하〉(홍상수, 2010)

영화에서 문소리씨는 통제영 문화해설사로 나온다. 김상경씨는 일이 안 풀려서 통영에 내려온 무명 영화감독으로 나온다. 김상경은 이순신 장군의 업적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문소리에게 끌려 추파를 던지는데, 문소리에겐 애인이 있다.


낮잠을 자던 김상경의 꿈에 뜬금없이 갑옷 입은 이순신 장군이 나온다. 김영호는 김상경에게 선문답을 던진다: 남의 생각으로 보지 말고 네 눈으로 봐라.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어딨냐? 난 좋은 것만 본다.


의아했다. 뭔가 상징적인 것 같은데 뭐가 상징적인지 모르겠어서.


처음 볼 땐 “좋은 것만 본다”는 게 무슨 뜻인지 고민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거기서부터 헛다리를 짚었지 싶다. 홍상수는 상징을 숨겨 놓는 취미가 없다. 영화에 대한/영화를 통한 메타적 사유는 상징 짜맞추기식의 퍼즐놀이가 아니라 그 씬이 즉물적으로 어떤 감상을 불러일으키는지, 그게 전체 영화에 어떤 방식으로 얽혀드는지를 따져보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좋은 것만 보라”는 얘긴 이순신 장군이 할 법한 얘기라기보단 김상경이 듣고 싶어하는 얘기 같다. 김상경이 듣고 싶어할 얘기라기보단 홍상수가 기입한 ‘대사’ 같다. 이 대사는 홍상수의 본심 같진 않다. 유치하고 과장된 김상경의 연기 톤과 ‘이순신’이라는 기표의 뜬금없는 출현이 이 장면을 우습고 초현실적인 장면으로 만든다. 본심이라기엔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 연출이다.


홍상수는 자위를 하는 건가, 자조를 하는 건가. 진짜 좋은 것만 보려는 건가, 그런 편리주의를 비웃으려는 건가.


잘 모르겠다. 영화를 다시 보는 수밖에. (*다시 보니 홍상수는 둘 다 하는 것 같다.)


-


사족이 길어졌는데, 사실 통영을 돌아다닐 땐 이런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방금 쓴 일종의 짧은 영화 비평은 집에 와서 여행을 되짚어보다 떠오른 단상들을 정리한 것이다.


집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생각을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생각을 하는 건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면서 더 나쁘다. 가끔은 생각을 쉬어야 하고 그럴 땐 바다가 직방이라는 게 이번 여행의 교훈이라면 교훈이겠다.


통제영은 단지 재밌게 봤던 영화의 장소일 뿐이었고 그저껜 그거면 충분했다. 곧은 기둥들 사이를 아무 생각 없이 어정거리다 주저앉아서 시를 읽었다. 나는 생각을 할 때만큼이나 하지 않을 때에도 책이나 영화, 음악을 종종 필요로 하는 사람인데, 여행하는 동안엔 복잡한 걸 읽고 싶지 않아서 부코스키를 한 권 챙겨 갔다. 부코스키는 내가 아는 ‘진짜 작가’들 중에서는 가장 쉽고 직관적인 글을 쓰는 작가고 그런대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다음날에도 가야 할 곳은 미리 정해 놓지 않았다. 바다 근처를 거닐다,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카페 옥상에 자리를 잡고, 바다를 들이쉬고 내쉬면서, 더치커피와 와플을 먹었고, 부코스키를 마저 읽었다.



다섯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올라오는 길은 찌뿌둥했고 돌아올 땐 다시 머리가 지끈거렸다. 타이레놀을 한 알 먹었고 자고 일어나니 괜찮아졌다. 다음번 머리가 아플 땐 여수나 순천에 가야겠다. 


아니다. 이런 것도 미리 계획하지 말아야겠다. 그냥 즉흥적으로 가야지.





덧. 혹시라도 통영에 갈 거라면 꼭 '하하하'를 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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