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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도에 읽은 최고의 책 4권 단평

리옴빠 / 데리다와 역사 / 문자 살해 클럽 / 필로우맨

by Ennui Dec 26. 2024


순서는 읽은 순서.


브런치 글 이미지 1


유리 올레샤, 『리옴빠』


가장 가깝게 느껴졌고, 또 가장 멀게 느껴졌다. 작가가 나와 동류의 인간이다 싶다가도, 글을 압도적으로 너무 잘 써서 거리감이 들었다는 얘기다.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게 처음은 아니지만, 어쨌든 유리 올레샤는 좀 더 특별했다.


처절한 절망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끔찍한 황량함과 공허함을 품고서도 희망을 꿈꿀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참하게 부숴져 본 모든 사람들이 올레샤를 읽었으면 좋겠다.


「버찌 씨」와 같은 몇몇 단편에서는 귀여운 키치함이 느껴져서 미셸 공드리 영화 같다는 인상도 받았는데, 공드리의 영화보다 훨씬 훌륭하고 웅숭깊다.


다만 이런 감상은 앞의 절반에만, 그가 1930년대 중반까지 쓴 글들에만 해당하는데, 그건 물론 스탈린 탓이다.


아쉬운 작가다. 그런데도 이미 지나치게 훌륭하다.


인용구를 몇 줄 첨부한다.


나는 삶을 즐길 줄 알았던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서른 살이다.

_「나의 지인」(1929) 중


여자를 인식하면서 사랑으로 보호받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사고하기 시작하면서 스승에게 보호받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
나에게는 스승이 없었습니다.

_「나는 과거를 들여다본다」(1929) 중


나는 모든 사람을 질투하며 이 사실을 인정한다. (…) 질투와 야망은 창작을 가능케 하는 힘의 본질이며 부끄럽게 여길 필요가 전혀 없다.

_「길동무 잔드의 비밀 기록에서」(1932) 중






김민호, 『데리다와 역사』


데리다의 작업이 탈역사적이라는 일반화된 오해를 깨부수는 책. 20세기 후반 대륙철학의 흐름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표지로 거칠게 묶을 수 있다면, 나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기여는 이전까지의 철학이 쌓아 올려 왔던 망상의 모래성들을 철저하게 박살 내고 인류가 그라운드제로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게끔 해주었다는 게 아닌가 싶다. 20세기 프랑스 철학자들의 작업은 확실히 발본적이고, 데리다는 어느 면 관능적이기까지 하다. (일단 존나 간지나게 생겼다.)






시기즈문트 크르지자놉스키, 『문자 살해 클럽』


처음 글을 읽고서 한 번 놀라고, 그다음에 다시 한번 놀랐는데, 작가가 1920년대에 활동했고 소비에트 체제가 몰락한 뒤에야 글이 출간되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보르헤스 전에 보르헤스처럼 쓰는 작가가 있었을 줄은 몰랐다. 보르헤스에게 글쓰기란 무한한 우주를 직시하는 유일한 방식이고, 그가 이러한 현대적이고 근원적인 아이디어를 최초로 보여주었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가 하려던 걸 크르지자놉스키가 앞질러 이룬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두 작가의 배경이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도 흥미로운데, 이런 걸 보면 결국 ‘지극한 도에는 문이 없’는가 보다. 무수하게 뻗은 갈래길만 있을 뿐.


보르헤스만큼 철학적인 방식으로 접근하지는 않지만, 훨씬 더 재미있고 통통 튄다. (올레샤의 글에도,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글에도 이런 희극적인 개성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러시아 문학에 대한 인상과 달라 더욱 흥미로웠다.)


이런 작가의 글을 더 읽을 수 없다는 것은 더없는 비극이다. 유리 올레샤도 그렇고 지가 베르토프 같은 영화인들도 그렇고, 스탈린이 아니었더라면 20세기 러시아 예술은 지금보다도 훨씬 더 빛났을 테다. 새삼 그가 원망스럽다.






마틴 맥도나, 『필로우맨』


아직 마틴 맥도나의 영화를 한 편도 보지 못했다. 그가 문학이나 스토리텔링에 대해 도발적인 이야기를 몇 번 했다는 사실만 어디선가 주워 들었다. 고전문학 같은 건 별로 읽지 않았고, 동시대 영화감독들의 영화를 잔뜩 봤으며, 거기서 배울 건 충분히 배웠다는 둥의 이야기. 주워 들은 이야기인 탓에 어디까지 사실인지, 출처가 명확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흥미로운 작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영화보다 희곡을 먼저 읽게 될 줄은 몰랐다.


〈필로우맨〉은 어느 날 영문도 모르고 ‘전체주의 독재국가 경찰’의 취조실에 끌려간 무명 작가와 그의 모자란 형에 관한 이야기인데, 이야기 안의 이야기들과 이야기 바깥의 이야기가 리드미컬하고 생생하고 원색적인 저자의 입담에 실려 쉴 새 없이 몰아친다. ‘작가와 작가의 형제’, ‘작은 초록 돼지’, 희곡과 동명의 작품인 ‘필로우맨’ 등 하나같이 어둡고 강렬하고 미친 듯이 재미있다.


그럭저럭 요약을 해 보자면, 비유 없이, 문자 그대로, 비참하게 끔찍한, 씨발 좆 같은 세상에서, 그런 비관에 절여진 채로 글을 쓰는 작가(의 형제)와, 우울하고 잔혹하지만 아주 가끔 따스한 그 이야기들에 사로잡혀 있는 작가(의 형제)와, 그리고 그 끔찍함을 싫어하고 증오하는 아주 건강한, 그리고 딱 그만큼 골병이 든 아픈 사람들이 악에 받쳐 떠들어대는 '소리와 분노' 같은 이야기다.


그러면서도, 그런 불행 속에서도, 어떻게든 계속 이야기를 써내는.


글쎄요, 제 생각엔 우리 그냥 이대로 살아야 할 것 같아요. 나는 계속 괴롭힘을 당하고 동생은 그 소리를 듣고 많은 이야기를 쓰는 걸로요. 왜냐하면 난 내 동생의 이야기들을 정말 좋아하게 될 것 같거든요. 난 그 이야기들을 정말 좋아하게 될 것 같아요.


희곡은 거의 읽지 않는 편인데, 대사도 상황도 구성도 기가 막힌다. 희곡이라는 장르 자체를 조금 더 읽어볼까 싶을 정도로. 마치 작가가 “네가 지금 뭘 보고 있는지 두 눈 똑바로 뜨고 정신 똑바로 차려 씨발놈아”라고 윽박지른달까, 박력도 개성도 살아 있는 글이다. 거칠고 세련되고 좆 같으면서도 아름다워서, 작품 속 형사 투폴스키의 대사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필로우맨’에는 뭔가 마음에 남는 게 있었어. 뭔가 다정하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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