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드모아젤 Jan 07. 2019

서른, 파리를 만나다.

파리의 여행자에서 3개월 만에 시작된 유학생의 삶


2015년 1월, 파리 여행을 끝내고 다시 일본으로 귀국한 지 삼 개월 만에 유학생 신분으로 다시 파리 땅을 밟았다.


파리 샤를 드골 공항은 지난달에 터진 테러의 여파인지 공항 안 밖으로 경찰들이 깔려 있었다.

3개월 전과 다른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긴 비행의 피로감이 남아있었다는 핑계와 함께 이미 어둑해진 밤이라 큰 맘먹고 공항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주소 한 장으로 택시와 함께 찾아온 숙소는 생각보다 깨끗했고 꽤 넓어 마음에 들었다.

낯선 곳에 다시 홀로 된 기분은 일본 이후 오랜만이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6호선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에펠탑을 정면으로 만날 수 있는  Bir-Hakeim 역과 passy 역 구간


살다 보면 파리로 가야 하는 순간이 온다.


파리에 관심도 없던 그 시절 읽었던 손미나 작가의 여행집 속 그 문구는 심심하게 다가왔다.


'마치 주문 같은걸, 근데 왜 하필 파리지?'


그 후로부터 일 년이 안된 어느 날, 읊조린 그 주문이 먹힌 듯 마냥 나는 지인들에게 같은 소리를 하고 있었다.

잊고 사는 동안 우연한 기회에 파리를 여행했고 일본으로 다시 귀국한 날부터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아뿔싸, 생각했다.


'이게 말이 되냐고. 파리로 가야 하는 순간이 진짜 오다니'




그렇게 다시 돌아온 1월의 파리는 10월의 하늘과는 다른 어둑한 모습을 띄고 있었지만 그저 나에겐 모든 것이 새로운 두근거림이었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 상대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사랑을 시작하고, 미처 몰랐던 이면의 다름을 느끼고 서로 맞추어 가는 과정을 밟아가듯, 그렇게 나는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애증의 파리'와 사랑을 시작했다.



6호선이 지나는 듀플렉스 시장.  매주 일요일 14시까지 장이 열린다.


각 동네마다 일주일에 몇 번 장이 선다는 아날로그적인 감성은 다시 돌아와도 여전히 좋았다.


각종 신선한 야채며, 생선이며 이들의 식탁에 빠질 수 없는 치즈를 비롯한 각종 생필품, 자그마한 다발의 꽃들을 파는 작은 상점들이 즐비해 있고, 그 사이사이로 장바구니를 든 파리지앵들의 발길이 분주했다.


한편에서는 흥정을 하기도 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좁은 통로를 지나다 부딪히거나 그 사이를 비집고 먼저 가려는 사람들 사이  "'Pardon(미안해요)" 이 섞여 들려왔다.


파리에 도착하고 처음 나들이를 한 곳이었다.

생기 있는 풍경들 사이로 생활 불어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프랑스인들은 뭘 먹고 사는지 한눈에 알 수 있는 곳.


아, 내가 프랑스에 왔구나.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다 같을 테지만 해외여행을 가면 항상 대형 마트를 들러 그 나라 사람들이 자주 먹는 재료들과 제품들, 가격들을 둘러본다. 짧은 시간 안에 그 나라의 식문화를 시작으로 한 문화를 옅보곤 했었기에 내겐 이 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상점 한 곳 한 곳을 구경하며 일본에서 유학 준비를 하며 몇 개월간 배워온 짧은 불어로 필요한 몇 가지 재료를 구입했다. 당장 먹을 야채와 과일 및 식재료. 그리고 호기심 반으로 산 꽁테치즈는 (Comté) 덤으로.

그리고 아직은 사람 사는 냄새가 덜한 텅 빈 내 방에 꽂을 꽃 한 다발도 샀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에도 내 마음은 왠지 모를 설렘으로 가득 찼다.

10년 전, 낯선 땅에서 하나하나씩 내 발자국들을 찍어 왔던 그 설렘이 다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서른에 새로운 시작을 한다는 건 쉬운 결정이 아니었지만, 잘한 결정이길 바라는 나의 염원도 그 설렘 안에 담겨있었다.



엄마, 잠시만 또 다녀올게요.


꽃을 공부할 거라고 일본 생활을 접는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오히려 격려를 해주셨다. 예상 밖이었다.

일본으로 떠날 때 반대를 많이 하셨던 터라, 이 반응에 적지 않게 당황했지만 한편으로 감사했다.


결혼을 해도 모자랄 나이에,  5년 전처럼 멀쩡한 직장을 나와 또다시 학생이 된다고 하는 딸이 걱정이 안 될 리 만무 하지만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한 사실, 그리고 무언가를 다시 채워 넣을 도전을 한다는 딸이 내심 기특하셨던 모양새다.


나 역시 3개월 만에 무슨 대단한 포부라도 가진 것처럼 유학 준비를 마쳤다곤 했지만, 내가 원하는 걸 얻기 위해 포기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여행자와 다른 거주자 신분으로써 감내해야 할 어려움들을 이미 경험한지라 무의식 중에 겁이 났나 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떠나기 일주일 전부터 먹는 것마다 체하기 시작했다. 지인들이 마련해 준 송별회에선 그저 배불리 먹는 대신 울컥하는 기분만 속에 넣었다 감췄다 했다.


'정말로 떠나는구나'라고 생각한 순간부터는 여러모로 무거우면서도 울컥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본인을 혼자 두고 떠나는 여자 친구를 그 누구보다 격려해주던 소울 메이트와의 헤어질 시간이 다가옴을 느낄 때마다 내가 뭐라고 이 사람은 이토록 큰 그릇으로 나를 담아내고 있는가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지고 또 미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떠나야 했다.

지금이 아니면 후회할 거 같은 기분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날 흔들었다.



내가 파리에 있음을 늘 상기시켜주는 센 강


다시 학생이 된 나는


매일 아침 어학원을 가는 일과로 하루를 시작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기엔 족히 굳어 버린 머리에 인생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불어를 주입한다는 건 쉽지 않았다.


이미 오랜 기간 일본식으로 사고(思考)하는 게 익숙해져 버린 머리와 몸뚱이를 정 반대의 문법과 발음으로 다시 바꾸는 작업은 말랑한 뇌의 20대 초반의 친구들과 처절하게 비교되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일본문화, 그리고 겸손을 미덕으로 아는 한국 문화 속에서 성장해온 나는 '나'라는 사람이 주체가 되어 싫고 좋음을 분명히 전달하고 나의 의견을 즉각 어필하는 것부터 다시 배워야 했다.


그래도 나는 그 새로움을 알아가는 시간들이 좋았다. 도전하는 시간들이 즐거웠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도 시간을 쪼개서 늘 끊임없이 배우고 움직이길 좋아했다. 하지만 그건 약간의 혹은 멈추어 있으면 도태될 것 같은, 늘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했던 억지스러운 습관에서 나온 행위의 일부분이기도 했다.


파리에서의 배움은 그게 바로 내가 되는 행위였다.

작게는 아무리 연습해도 쉽지 않던 R(흐) 발음이 자연스럽게 문장 안에서 녹아들어 가고, 크게는 인턴을 시작한 플라워 샵에서 내 머물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들의 성취감은 험난했지만 되려 살아있음을 느꼈다.



파리에서는 차가 필요없을 정도로 전철 시설이 잘 되어 있다.




어쩌면 나는, 나를 다시 깨우는 자극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도전을 좋아했지만 안정된 생활 속에서 할 수 있는 것들만 늘 추구해왔고 그 테두리 안에서 이뤄지는 경쟁의 삶 속에 나름 커리어를 의식하며 건강한 20대를 보냈다.

그리고 지금과는 다르게, 1년 5년 그리고 10년 단위로 인생을 그려가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문득 그 계획이라는 것을 매년 세우다 보니, 반복되는 리스트는 계속해서 상위권에서 맴돌고 있었다.

결혼, 육아, 내 집 마련, 그리고 워킹맘으로서 커리어 쌓아가기 등등.

여자 나이 서른에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리스트였다. 비혼 주의자는 아니었으니 그 언젠가는 이루어 질 일들이었지만 문득, ‘ 이게 내 계획으로 되는 건 맞을까? ‘라는 생각이 스쳤다.


모든 건 때가 있기 마련인데, 난 항상 같은 리스트를 써 내려가며 '그 언젠가' 올 타이밍 속에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는 건 아닐까.

어쩜 나는 '나'에 집중하기보다 '내가 해야 할 일'에 더 집중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김치가 비싼 유럽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본 김장


도쿄에서 처럼 회사 점심을 위한 도시락을 싸는 일은 없어졌지만 나의 주방은 여전히 매주 새로 들여온 재료들로 쉴 새 없이 돌아갔다.


일주일에 한 번 큰 마트를 들리는 날이면 한 시간 이상을 머물러 있기 일쑤였다.

보안요원에게 가방 검사를 하고 들어간 마트 입구에서 큰 카트를 집어 들고는 당장에 필요하지도 않은 가전 코너를 시작으로 도서 코너, 정원 관리 코너를 구경하고 나서야 식품 코너로 겨우 진입.

또 거기서는 휴대폰을 꺼내 들고 고기는 어느 부위며 어떻게 요리해 먹으면 맛있는 건지, 이 와인은 어디 지방에서 유명한데 어느 음식이랑 잘 어울리는지, 대체 이 많은 치즈들은 어떻게 구분하라는 건가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다. 때론 정체불명의 제품과 재료를 발견하면 이름을 사전으로 찾아가며 혼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면서 말이다.

 

이방인의 삶은 외롭고 아프기 시작하면서 무너짐을 진작에 경험했던 터라, 파리에서도 도쿄에서부터 이어오던 내 방식의 룰을 적용했다.

가장 심플하지만 가장 중요한. 잘 먹고 잘 뛰고 잘 일하고 잘 쉬기.


요리를 하면서 잡념과 스트레스를 날렸다.

기분이 좋은 날도 꿀꿀한 날도 동네 곳곳에 위치한 공원을 찾아 뛰었다. 때로는 그냥 마음에 드는 동네까지 전철을 타고 가서 뛰기도 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에너지가 부족한 날이면 그날은 종일 집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보고 듣고 쓰면서 스스로 지친 나를 위로해줬다.






서른의 유학은 '나를 잘 아는 유학' 이었다.


여전히 나를 찾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20대의 나보다 나를 더 잘 알았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누구와 어디에서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어떤 것을 물고 늘어져야 하며 어디까지 인내할 수 있고 어떤 것을 빨리 포기해야 하는지.


몸에서 혹은 마음에서 아플 것 같다는 신호를 보내기 전에 먼저 알아차리는 요령을 가지게 되었다.

조금 더 나를 돌볼 수 있는 경험치로 흡수해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들을 내 나름의 방식대로 풀어나가고 있었다.


20대 유학생 동생들에게는 심심한 위로라도 건네는 경험 많은 언니, 누나여서 내 나이가 나쁘지 않았고

나이에 관계없이 친구로 동료로 '어떤 생각을 갖고 사는 사람' 인지에 집중해주는 곳이어서, 많은 도전 속에서 지혜를 배워온 나이라서 좋았다.


비록 험난할지언정, 이 곳에서 나의 삼십 대 언저리를 만들어 갈 수 있음에 오히려 감사했다.

시간이 지나면 이 시간들이 얼마나 빛날지 우리는 그 당시에는 모르는 법이니까.

그게 쌓이고 쌓여 온전한 '내'가 되어가는 과정,


서른의 유학은 내게 그런 의미였다.










이전 05화 사요나라, 안녕 잠시 다녀올게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