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 초반에 자기소개를 하면 가장 많이 듣던 질문
파리가 꽃이 유명한가 봐요?
어학을 하던 시절, 처음 만나는 유학생들의 자기소개에 빠질 수 없던 질문 중 하나는 무엇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오게 되었냐는 거다.
프랑스라는 나라는 다른 유럽 국가와 다르게 철저하게 불어를 쓰는 나라다.
어릴 때부터 기초 정도는 다져온 영어와 다르게 알파벳과 발음, 기초부터 시간을 투자해 배워야 하는 언어를 쓰는 나라인 것이다.
그런 부담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어떻게 프랑스까지 왔냐'는 궁금증은 '무엇을 공부하기 위해'라는 질문이기도 했다.
프랑스 하면 떠 오르는 전문 분야인 예술과 음악 혹은 정치, 건축, 패션, 헤어 메이크업, 요리를 위해 유학을 선택한 친구들이 있는가 하면 외국에서 만난 프랑스 남자 친구와의 결혼을 위해 온 친구도 있었고, 서른이 되기 전에 워킹으로 와서 한번 살아보고 싶었다는 친구들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그리고 비자가 따로 필요 없었던 유럽권 아이들 중에는 몇 개월씩 시간이 날 때마다 불어를 배우기 위해 다녀가는 이들도 있었다.
그중 꽃을 하기 위해 온 친구는 그 당시 우리 어학원 내에서는 내가 유일했고, 플로리스트라는 직업군에 생소했던 친구들은 '왜'라는 질문을 그래서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왜 하필 파리였냐면'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을 해주면서 스스로 그 해답을 찾아나가던 시절에 가장 많이 듣던 소리는 그랬다.
"파리에서 꽃을 하는 분을 만난 건 마드모아젤 씨가 처음이에요."
"누나가 파리에서 만난 저의 첫 플로리스트예요"
그리고 실상이야 어떻든 '파리의 플로리스트라니 낭만적이다.'는 감탄사 아닌 감탄사는 덤이었다.
파리가 주는 낭만의 이미지에 꽃이라는 매개체가 더해져 친구들의 대답 속 파리의 플로리스트는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한 단어가 되었다.
나는 일본에서 꽃을 시작했고 우연한 기회에 파리를 오게 되었는데, 그즈음 한국에서도 프렌치 플라워 스타일이 유행하기 시작했던 찰나였다.
당시 내가 알고 있던 파리 플라워 유학은 그저 파리의 유명한 플로리스트가 운영하는 아카데미에서 최소 일주일에서 길게는 한두 달 연수 코스를 듣는 게 다였다.
꽃을 기본부터 제대로 배우고 싶어서
플라워 스쿨을 통한 단기 유학은 영어로 진행되기 때문에 불어를 배우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었다.
각 코스에 맞는 디플롬(수료증)이 나오고 단기 유학 후 플로리스트로 활동하다가 샵을 내더라도 어색함이 없을 것 같은 커리큘럼이었다.
본격 유학을 시작하기 전 파리 여행을 왔을 때, 그 커리큘럼을 받아 보기 위해 튀를리 공원 옆에 위치한 유명 플로리스트의 샵을 방문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방문한 샵은 생각보다 아담했고 수업 이외의 샵 운영은 하지 않는다는 게 의외였지만 그럴수록 지하에 위치한 저 공간에서 펼쳐질 수업 내용들이 궁금했다.
수업 스케줄은 이미 년 단위로 다 짜여 있었고 나는 내가 듣고 싶은 수업 내용에 따른 공석을 확인하고 수업료를 납부하면 그걸로 수업과 동시에 짧지만 강렬하고도 낭만스러운 파리 라이프를 즐길 수 있는 셈이었다.
파리지앵처럼 살아보기 프로젝트도 가능하다. 내 인생에서 반짝하고 빛날 영화 같은 한 신을 꽃과 함께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귀국하는 시나리오였다.
파리의 여러 플로리스트들에게 수업을 들은 후 샵을 차려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였지만, 기초가 필요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무너지지 않고 나를 꽤 괜찮은 플로리스트로써 지탱해 줄 기본 말이다.
어느 하나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 최소 만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고 친다면 그 기초를 다지는 시간을 최소 삼분의 일 정도는 기본기에 투자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사람도 일도, 뭐든 기초가 튼튼해야 시간이 지나고 다양한 변화 속에서도 그 심지가 흔들리지 않는 법이니까.
그리고, 프랑스.
이 도시는 우리나라보다 꽃 역사가 깊다고 생각했던 일본보다도 꽃 역사가 깊은 곳이 아녔던가.
프랑스 왕실에서는 항상 정원을 돌보고 그 시대에 맞는 꽃과 화병을 다른 예술과 같이 하나의 문화로 정의하기도 하고, 유명화가들이 그 풍경들을 스케치로 담아냈듯 꽃은 예나 지금이나 항상 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프랑스 사람들은 플로리스트만큼이나 화단과 정원 가꾸기를 좋아하고, 계절 꽃과 화분 그리고 분갈이에 대한 지식이 넘쳐나듯 이 나라에서 기본을 배운다는 건, 그만큼 내가 단단해질 기회를 얻는 것과 다름없었다.
모든 꽃은 땅에서 뿌리를 내려 올라온 잎에서 수확이 되듯, 꽃과 식물 그리고 그 뿌리와 흙의 관계를 잘 아는 것 또한 플로리스트의 기본 소양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어쩌면 꽃말을 잘 알고 부케만 예쁘게 만들어내는 플로리스트가 아닌, 꽃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더 사랑을 주면 되는지에 대한 방법을 알려줄 수 있는 플로리스트가 되고자 했는지도 모르겠다.
괜찮아, 잘하고 있어.
그러나 그 기본이 되는 길도 어떨 때는 참 멀어 보였다.
플라워 아카데미를 뒤로 하고 전문 플라워 학교를 입학하기 전에, 먼저 불어를 배워야 했고 동시에 좋은 기회로 얻어낸 플라워 샵의 인턴을 잘 해내고 싶어 어학과 일을 병행했다.
매일 아침에는 어학원을, 그리고 불어 수업이 끝난 뒤에는 얼마 되지 않는 달콤한 휴식 겸 점심을 보낸 뒤 바로 샵으로 달려가 매일 7시간씩 주 35시간을 꽃과 함께 마감했다.
더듬더듬 뱉어내는 불어로 고객을 응대하고, 칭찬을 받을 때면 한껏 고생하고 있는 내가 기특해지기도 했다.
그러다 꽃도 불어도 어느 것 하나 프로페셔널하게 담아내지 못하고 고객의 요구에 끌려다니다가 결국 다른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는 한없이 내가 작아지기도 했다.
그것 또한 성장의 과정 중의 하나임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하루가 길고 고단했던 날이면 텅 빈 집에 들어와 애꿎은 일기만 끄적거렸다.
'그래도 파리에서 살아본 게 어디야. 인턴이지만 파리의 플로리스트로 일을 해본 게 어디야.'
힘들면 너무 참지 말자며, 돌아갈 곳이 있다고 스스로 다독이면서.
그 당시 내 주위에는 함께 의견을 나누거나 정보를 주고받으며 서로 격려해줄 꽃을 하는 한국인 플로리스트가 없었기에 어쩌면 조금 더 막막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시간이 지나면서 꽃을 하는 일본인 플로리스트들 지인들이 생겨나면서 파리에는 상당히 많은 일본인 플로리스트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보다 반세기 앞선 일본의 꽃 업계에선 이미 프렌치 플라워 열풍이 불었고 그 여파로 많은 일본인 플로리스트들이 파리로 몰려오게 되었다.
십여 년 넘게 일본과 프랑스를 왕래하며 플라워 에이전시로 활동하고 계시는 잔뼈 굵은 플로리스트들을 시작으로, 프리랜서로 노동비자로 학생비자로 예술비자로. 그렇게 많은 일본인들이 파리에서 꽃을 만지고 있다.
파리는 꽃으로 유명한 도시였구나,
프렌치 플라워는 내게 아시아인의 감성으로 또 다른 색을 입혀낼, 배울만한 가치가 있구나,
여기서 나는 더 힘을 내야 하는구나.
플로리스트라는 이 세계에도 많은 길과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함과 동시에 나는 귀중한 인맥들을 통해서 한국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정보들을 두발로 뛰어가며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내 주위의 유일한 파리의 한국인 플로리스트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