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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드모아젤 Oct 28. 2019

사요나라, 안녕 잠시 다녀올게요.

단 한 번의 파리 여행으로 일본을 정리하다.


2011년 3월 11일 금요일 잔잔했던 오후, 도쿄의 땅이 흔들렸다.

동일본 대지진. 그날의 기억은 8년이 지난 지금도 뇌리에 남아있다.


첫 직장을 잡고 안정된 생활을 이어가던 그 해의 봄을 기다리던 날, 우리들은 도쿄의 흔들림에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계획도 흔들릴 만큼 큰 사건이었다.


한국을 비롯한 수많은 나라들의 주재원들과 유학생들은 일본을 떠났고, 남은 자들도 각자의 방법으로 안전을 기할 방법을 모색했다. 그리고 그중 나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빠져나간 공백을 노려 전직을 준비했다.

재직 중인 여행사는 업계 특성상 자연재해로 매출에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고, 불과 취업 비자를 받은 지 1년도 채 안되어 이대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떠날 수는 없었다. 언젠가는 해야 할 전직을 시기를 조금 앞당겨하게 된 거다.


하라주쿠 타케시 마거리
다시 시작된 면접 전쟁


일본은 대기업 못지않은 탄탄한 중소기업이 많고 고령화 사회라 늘 구인광고가 넘쳤다.

전직 시장은 열려있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처음부터 수월할 리 없었다.


일본에서의 디플롬은 없이 고작 1년이 채 안 되는 경력직이라 결국은 첫 직장을 잡던 때처럼 면접 전쟁을 치러야 했다. 필요하면 퇴근 후 담당 헤드헌터들을 만나 이력서과 직무 경력서를 같이 다듬고 유급을 빼서 면접을 보러 다녔다. 한국의 일본지사를 비롯 일본 회사 그리고 외국계 회사까지 내 역할을 다 할 수 있는 곳, 성장할 수 있는 곳이면 신입의 자리든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힘을 쏟아 면접을 치렀다.


그렇게 몇 개월이 흘렀을까.

몇 번의 좌절로 사기가 떨어질 때 즈음 전직에 성공했다. 일본에 본사를 둔 소프트웨어 개발회사.

한국과 필리핀에 지사를 설립할 예정에 있던 사업 지원부서의 신입이었고 그 회사의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신입이었지만 곧 퇴사를 앞둔 담당 선배의 업무까지 맡아 마케팅과 입찰 미션까지 주어졌다.


배워가는 업무들은 생각보다 재미있었지만 일본 전국구로 입찰을 따러 다니며 한자와 깐깐한 매뉴얼대로 진행해야 하는 일본식 일 문화, 그리고 진짜 일본어의 늪에서 몇 개월을 고생했다.

내가 배우고 써먹어온 일어를 앞으로 평생을 가져간다고 예상했을 때, 진짜 일본으로 들어가서 언어에 담긴 문화와 사고()를 익히고 싶어 택한 일본행이었는데 막상 그 순간이 오니 매일 퇴근하는 시간은 귀가 웅웅 거릴 정도로 매일이 공부의 연속이었다.


온천 투어를 할 수 있는 패 @쿠로가와 온천


그리고 그 기간을 지나 4년을 꼬박 충성했다.

물론 중간에 업무 슬럼프도 왔으며 20대 중후반이면 누구나 그렇듯 30대, 40대 후의 커리어를 생각하면서 업무와 내가 어떤 식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은 수없이 진행되었다. 주말이면 자기 계발이랍시고 자격증과 기술을 배워보기도 했으며 이따금씩 안정된 생활을 뒤로하고 유학을 떠나볼까, 더 조건이 좋은 직장으로의 이직을 고민하기도 했다. 그러던 와중에 회사는 영국 파트너 회사와 합병을 했고, 프랑스인 상사가 주재로 일본에 오게 되면서 업무 범위와 강도는 더 세졌다. 

내 역할은 합병 팀에서 한국과 필리핀 지사의 인사, 마케팅을 총괄하며 프랑스인 상사와(영국팀) 일본팀의 중간에서 정보를 조합하고 서포트하는 게 주 업무였다. 그것도 봉쥬르(프랑스식 인사)를 제외하고는 전부 영어로.


하루가 멀다 하고 연이어진 잔업은 수당으로 통장 잔고를 불려주었고 보너스로 다크서클과 새치를 얹어주었다.

합병 미션은 1년 이상 지속되진 않을 테고 이 미션을 잘 수행하면 회사 내 유일무이한 존재로 자리 잡을게 확실했지만 내 몸과 정신은 이미 '무엇이 날 행복하게 하는지'에 대해서 집중하기 시작했다.




 여행길에서 인생이 바뀌다.


난 그때까지도 몰랐다. 내가 프랑스어를 배우고 프랑스에서 살게 될 줄은.

아니 다시 말해 서른의 나이에 가진걸 다 내려놓고 새로운 인생을 걷게 될 줄은 말이다.


연이은 잔업과 업무 스트레스로 잠시 휴식이 필요했다.

휴가를 얻어 잠시 쉬는 동안 친구가 제안한 유럽 여행길에 올랐다. 그 당시 나는 주말 동안 꽃을 배우고 있었고 

이탈리아를 여행한 후 파리로 넘어가 프렌치 꽃집을 탐방할 계획도 알뜰하게 넣었다.

일본에서 취미반으로 시작해 디플롬 코스로 진지하게 배우던 꽃이 이 여행 하나로 내 인생을 바꿀 거라곤 생각도 못한 채 말이다.


그렇게 대학시절 틈만 나면 함께 여행을 했던 단짝 친구와의 2주간 이태리 남부 곳곳을 그리고 프랑스 파리를 여행하고 각자의 나라로 귀국했다.

그리고 인천 공항을 경유해 일본 나리타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는데 그때부터 가슴이 뛰는 거다.

왠지 이대로 일본의 일상으로 돌아가면 후회할 것 같은 느낌, 뭔가 여행한 그곳에 일부를 놔두고 온 마냥 마치 '먹고 사랑하고 기도하라' 영화의 주인공이 된 마냥 무언가가 나를 자꾸 그곳으로 다시 이끄는 듯했다.


내가 좋아했던 교토


일본으로 귀국해 퇴사를 결심하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내 스토리를 들으신 꽃집의 담당 일본인 선생님은 파리에서 플라워 단기 유학한 제자를 소개해주셨고 그녀의 소개로 단기 인턴을 할 수 있는 플라워 샵에 지원하게 되었다.

도쿄 아자부주방에 위치한 프랑스 대사관에서 어학 비자를 받았고, 인터넷으로 신청한 기숙사는 대기번호를 받고 발을 동동 굴리던 중 운이 좋게 출발 직전에 방이 나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그렇게, 단 6개월만 살아보자고 하고 삼 개월 만에 유학 준비를 마치고 떠나왔다.

잠시만 안녕, 다시 오겠노라 내 짐과 비자는 그대로 살려둔 채.


行ってきます。 다녀올게요.
いってらっしゃい。 잘, 다녀오세요

설령 먼길을 떠난다 할지라도, '안녕히 가세요' 보다는 '다녀오세요'로 마음을 전한다.



그렇게 아끼는 지인들과의 인사는 그리 거창하지도 섭섭하지도 않을 만큼 나는 다시 돌아올 기약으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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