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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드모아젤 Mar 25. 2019

일본에서 첫 면접을 보던 날

메구미라는 이름이 생겼다.

떨리는 첫 면접을 보러 가는 길이다.


무턱대고 걸어댄 전화의 타이밍이 원래 진행되고 있었던 면접 날짜와 잘 맞았다.

면접자가 정해진 상태에서 추가로 면접 기회를 얻게 되었다지만, 일본어로 된 정식 취업 면접인 셈이다.

즉, 우연이지만 기회가 왔다는 말이다.




면접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했다.

회사 건물을 확인 한 뒤, 근처 카페로 들어가 구석진 조용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일본인 친구들의 조언을 받아 일본식 면접 차림으로 신경을 썼다.

카라가 있는 무늬 없는 흰색 블라우스에 검은색 A라인 스커트, 그리고 (면접이 아니면 신을 일 없을 것 같은) 검은색 구두에 면접용 검정 가방으로 코디한 모습은 누가 봐도 면접생이다.

'일본은 왜 면접 복장부터 신입직원들의 출근복장이 다 매뉴얼처럼 비슷한 걸까'하고 정장 매장을 둘러보다 의문을 가졌던 그 패션을 하고 화장실 거울 앞에 서 있는 모습이 어색하지만 나쁘지 않다.

기념으로 화장실에서 셀카를 하나 찍었다. 면접이 잘 되든 못되든 파이팅 넘치는 오늘을 기억하고자.


만들어 온 기출문제를 펼치고 앉았다.

홈페이지에서 회사에 대한 몇 가지 주요 정보들을 조합해서 일어로 번역을 했다.

그리고 예상 질문에 대한 답을 적어 면접 며칠 전부터 모의 면접도 했지만 떨리는 건 역시 마찬가지다.


몇 잔을 홀짝 마셔댄 커피가 식는지도 모른 채 프린트해온 기출문제만 연신 들여다보다 고개를 들어 카페 내부를 둘러보니 맞은편 테이블에 내 또래의 남자가 앉아있다.

누가 봐도 나와 같은 면접자 복장을 하고 말이다.


데칼코마니처럼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서류를 뒤적거리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설마 같은 회사 면접은 아니겠지? 마주친 눈이 멋쩍어 입꼬리를 살짝 올려 눈인사를 보냈다.

어찌 되었든 우리 오늘을 파이팅해보자고 말이다.



세분의 면접관 앞에 앉은 네 명의 면접자 중에 나 혼자 유일한 여자 지원자임을 알아챈 순간 기죽지 말자는 스스로의 다짐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리고 그 옆 옆 자리에,  카페에서 파이팅을 보낸 그분도 우연처럼 앉아있다.


모두가 탈락할 수도, 그리고 한 명만 올라갈지도 모르니 우리는 파이팅을 보내던 사이에서 경쟁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일주일 뒤, 나는 도쿄의 지옥철에 합류한다.

집에서 회사까지는 두 번의 환승을 포함 한 시간 가량 되는 거리였지만 그 면접에서 뽑혔다는 사실이 콩나물 전철도 탈 만하게 했다.


첫 출근날. 월요일 조례에서 신입 사원으로 소개되었다.

한국에서의 사회 경험이 있다고는 했지만, 일본에서의 첫 회사 생활이라 말 그대로 신입이었다.

간단한 소개와 함께 '요로시쿠 오네가이시마스 (잘 부탁드립니다.)'를 연신 내뱉으며 각 부서를 돌고 나니 정신이 들었다. 진짜 일본에서 취업을 했구나 싶다. 


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으니, 맞은편에 앉은 선배가 눈으로 인사를 보낸다.

그리고 도착한 메시지.

'그때 메구미상 이력서를 받은 K라고 합니다. 그때의 패기에 감동해서 잘 되었으면 좋겠다 했는데 결국 한 솥밥을 먹게 되었네요. 잘 부탁드려요.'


그때, 전화를 끊지 않고 도움을 주셨던 선배다. 

이 분의 배려 덕에 어쩌면 여기까지 올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하니 감사의 말이라도 직접 전해야 할 것 같아 점심시간 때 캔 커피 한잔 조심스레 건네며 답례를 드렸다.

그렇게 떨리는 일본에서의 첫 발을, 누군가의 응원을 받으며 내디뎠다.


어느 날 찍은  출근 풍경


나는 도쿄 호텔을 담당하는 팀에 소속되어, 본사에서 보내오는 리퀘스트에 맞춰 호텔 방을 예약하고 팀장님의 호텔 영업에는 항상 동행하며 현장 일도 배웠고, 월말에는 팀 내 정산에도 참여했다.

그리고 받침이 들어간 어려운 내 이름을 대신할 '메구미'라는 이름도 생겼다.


나이가 제일 어린 막내이기도 했지만, 뭐든 열심히 해보겠노라고 눈에서 반짝반짝거리는 그 에너지가 기특해 보였는지 회사 동료들과 상사분들, 그리고 거래처까지 부서의 마스코트라고 불러주시며 토닥토닥해주신 덕에 매일이 새롭고 즐거운 나날들이었다.



지인의 집에서 바라본 도쿄 롯폰기


굳이 이 회사가 아니었더라도 취업 활동은 계속 이어졌을 테고, 어딘가에 소속이 되어 취업 비자를 갱신했을 거라는 스토리라고 하더라도 이 회사를 시작으로 나의 진짜 일본 생활이 시작된 건 돌아보니 행운이었다.


이 회사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러니까, 나의 일본 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인연들의 절반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어떻게 이렇게 잘 모아놨을까 싶을 정도로 너무나 죽이 잘 맞았던 사람들. 특히 비슷한 나이 때의 우리들은 일본 생활의 희로애락을 늘 함께 나누었다. 그들이 있었기에 외로운 순간들도 외롭지 않게 좋은 추억으로 흘려보낼 수 있었노라.


그런데 참 인연이라는 게 우스운 게, 그때 내 옆에서 면접을 같이 봤던 남자는 훗날 자회사에 지원해 합격을 했고 우리 멤버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는 그때 나의 면접 인상을 너무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꼭 일본에서 뼈를 묻을 사람처럼 면접을 또박또박 잘 보던 내가 뽑혔을 것 같은데 탈락 연락도 없었으니 그때의 결과가 참 궁금했다 전했다. 지금은 지인과 함께 도쿄에서 회사를 설립해 자리를 잡았으니 그 면접에서 내가 뽑힌건 서로 잘된 일이었다고.


많은 시간들을 함께 했던 멤버 중 귀국한 사람들도 있고, 도쿄에서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린 사람들도 있지만 아직까지 단체 대화방에서 늘 함께 안부를 전하고 서로를 격려한다.

파리에 있는 나를 포함해서.


여느 샐러리맨들처럼 우리는 업무가 끝나면 어김없이 바에서 이렇게 우리들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직장에서는 선후배, 그리고 일이 끝나면 같은 배를 탄 도쿄의 외국인 노동자.

남녀 비율이 적당히 섞인 열명이나 되는 우리들은 그렇게 매일을 직장에서 그리고 밖에서. 도쿄와 일본 곳곳을 함께 하며 서로를 위로하는 존재로 가족을 대신하는 우정을 만들었다.


여행사에서 만난 사람들 답게, 사람들을 좋아했고 여행을 좋아했으며 늘 오늘의 우리가 가장 멋짐을 공유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오늘의 씁쓸함도 퇴근 후 맥주 한잔으로 쓸어버리고 다시 웃는 얼굴로 회사에서 아침을 맞이하는 일상이 즐거울 수 있었던 이유들로 도쿄 생활은 또 다른 고향 같은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한국이 그립지 않을 만큼 도쿄의 일 년은 행복했다


그렇게 워킹비자가 끝나가던 즈음 비자를 갱신했다.

3년짜리 취업 비자를 받았다.


여느 외국인 노동자가 그렇지만 출입국 사무소에서의 비자 갱신을 받는 날은 내가 외국인임을 실감하게 한다.

그리고 비자 이게 뭐라고. 비자를 무사히 예상했던 년수만큼 받으면 기쁠지 않을 수가 없다.

회사의 규모와 일의 종류에 따라 비자가 거절되기도 하고, 비자 허가의 기준이 어려운 해도 있었으니 말이다.

내가 받은 비자의 종류는 '인문지식 비자' 였는데, 보통 한국인이 일본 기업에서 일을 할 경우 받는 비자 종류 중 가장 큰 범위를 차지하는 비자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2010년 일 년을 보내고, 일본에서의 새해를 맞이 한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넘어올 때 계획했던 1년의 기간이 지났고 당당히 취업 비자로 내 몫을 다 하는 해로 마무리할 수 있게 되어 감회가 새로웠다.


취업한 그 첫 해, 엄마를 모시고 다녀온 모녀의 첫 하코네 온천 여행
그렇게 일 년이 훌쩍 지났다.



2011년, 새해가 밝고 처음 뽑은 한해의 운세(おみくじ)에는 大吉(다이키치 : 운세의 대, 중. 소 중 최고로 친다)가 나왔다.


일본에서 보낸 일년. 혼자 긴 여행을 시작했고, 마음을 터 놓고 지낼 사람들도 만났으며 직장을 얻었다.

그렇게 시작한 긴 여행의 초반전,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예감은 계속되었다.


적어도 그 해 봄, 대지진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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