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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드모아젤 Feb 14. 2019

알바로 20만 엔을 번다고?  

도쿄 프리타(フリーター)의 삶을 시작하다

프리타(フリーター)


 15-34세의 남녀 중 아르바이트나 파트타임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일본의 신조어로, 프리(Free)와 아르바이트(Arbeiter)의 혼합어 이기도 하다.


즉, 최저 시급이 비싼 일본에서 아르바이트(이하 알바로 칭함)만 해도 충분히 생계가 가능하기에 나온 신조어다.

도쿄 기준으로 곧 시급 1000엔(한화 만원 정도)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자유롭게 원하는 알바로 생활을 이어가는 프리타로의 삶이 더 늘어날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일본의 최저 시급은 매년 오르고 있으니까.


네개의 신호등이 한번에 바뀌는걸로 유명한 시부야의 사거리 @도쿄 2010


그러니까, 일본은 프리타의 삶이 자연스러울만치 알바로 회사원처럼 버는 게 가능한 곳이다.

내가 도쿄 땅을 밟았던 2010년의 최저 시급은 821엔이었고 그 당시 엔화의 환율은 높았으니 지금보다 더 가치가 있었다.


초기 정착에 필요한 비상금은 집을 구해야 하는 비용과 더불어 생활비와 함께 눈 깜짝할 사이에 쑥쑥 빠져나갔고 이래선 금방 바닥이 날 것 같은 잔고에 대한 불안감에 정착한 지 몇 주 뒤, 나는 이력서를 쓰기 시작했다.


기숙사에서 멀지 않은 곳(그래! 나카노(中野)는 아르바이트가 넘쳐나는 번화가다)에서 출퇴근할 수 있는 곳으로 알바를 찾아다녔다.


알바 자리가 참 많은 도쿄에서 내 자리 하나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물론 일본어가 된다는 가정하에)

보통은 가게의 출입문 쪽에 '아르바이트 구함'이라고 적힌 공고를 통해서, 혹은 각종 구인 사이트, 혹은 무료로 배포되는 구인 잡지 등에서 구할 수 있다.


실제로 나는 알바를 하고 있면서도 더 좋은 조건이 없을까 하고 대기업 구인회사 '리쿠르트'의 자회사인 타운 워크 (Town work)에서 발행하는 잡지를 매주 체크하는 일을 즐겨했다.


도쿄. 지상을 달리는 전철.  2010


오전에는 어학교를 가야 했기에 저녁 알바만 찾아다녔고 이자카야와 야키니쿠, 라멘 점이 모여있는 나카노는 저녁 알바의 종합 선물세트 같은 곳이었다.


그리하여 찾은 나의 첫 번째 아르바이트 '한국식 야키니쿠' 식당.

사장님과 메인 셰프는 일본분이셨는데, 고기 종류와 부위는 일본식으로, 반찬과 사이드 메뉴는 한국식의 메뉴로 식당을 운영하고 계셨다.

덕분에 나는 순전히 저녁 서비스 시작 전에 든든하게 한국식 한 그릇을 먹을 수 있는 장점으로 이 알바를 결정한 거였다.


모든 유학생들이 공감하듯 타지에서 먹는 든든한 한식 한 끼가 참 힘이 된다는 걸 그때부터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나카노에 이은 두 번째 나의 동네 코쿠분지 @도쿄 2010


대학 4년 내내 나는 알바를 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았던 피자헛에서 4년 꼬박 알바를 했었고 덕분에 길러진 팔뚝 근육은 현재 플로리스트 일을 하면서 참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그리고 틈틈이 교내 근로 장학생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장학금 명목의 용돈을 벌기도 했다.

그러나 해외에서의 알바라니.

당시 오랜 알바와 직장 생활 2년으로 다져진 짬밥이 있었지만 이력서를 돌리던 때도, 알바 첫 날도 참 떨었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다행히도 사장님과 스텝들은 친절하셨고 많이 도와주셨지만 여전히 내게 고객을 상대하는 경어 쓰임, 그리고 술이 걸쭉하게 취하신 아저씨들의 사투리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아, 또 그곳에서 몇몇 덜 배우신 분들의 '인종차별'도 느꼈다지.


그 당시만 해도 욘사마 정도의 한국 러버가 있었을 뿐이었고 그 팬층은 보통 어머님들 세대가 많았으니 아직은 한국에 대한 인식은 미약했다.


두 번째 알바를 시작하다.

그리고 3개월간의 어학교가 끝나면서 시간이 많아진 나는 카케 모치(掛け持ち: 두 개 이상의 일이나 역할을 하는 것)를 시작했다.

즉, 두 개의 알바를 뛰기 시작한다.


역시 밥집이다.

친구가 데려가 준 깔끔한 일본 정식집의 가격 대비 가성비에 감탄하며 계산을 하고 나가는 길에 딱 발견한 ‘아르바이트 구함'

며칠 뒤 이력서를 넣었고 다행히 면접에 통과하여 일을 시작했다.

오픈부터 저녁 서비스 전까지, 그리고 주말도 스케줄을 넣겠다는 조건이었다.


'오오토야'라는 일본 가정식 식당은 유명한 전국 체인점이었고 체계가 잘 잡혀 있었기 때문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특히 이곳은 매일 아침마다 조회를 하는데 오픈 조 스탭이 모두 옷매무새를 서로 봐주고 나서 회사에서 발행한 '오늘의 한마디'를 한 줄씩 읽어 내려간다.


처음 몇 주간은 외국인인 나를 배려하여 제외하고 했던 오늘의 한마디는 점점 내 몫을 다 읽어낼 때까지 기다려주는 시간이 되었는데, 그 시간이 참으로 머쓱했다.

보통 책에는 한자 위에 요미가나로 발음 표시가 되어 있는데, 이 책은 그게 없으니 당시 그 시간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리고 회사 규모가 크다 보니 경어는 물론이거니와 서비스를 '제대로' 해야 하는 시스템이었기에 덕분의 고생담이 훗날의 탄탄한 베이스가 되어주었다.


머쓱했던 시간들이 지나고 익숙해진 시간들도 찾아왔지만 눈물 쏙 뺀 날도 적지 않았다.

이 식당 메뉴에는 추가로 주문할 수 있는 재료들이 있고, 때로는 쿠폰을 쓰기도 하는데 그 처리를 주문받는 서버가 기계로 처리해서 주방으로 보내어지는 식이었고 한 번은 바쁜 식사 타임 때 밀려온 주문으로 그 처리를 바로 하지 못했던 날, 설상가상 까탈스러운 중년의 여성분께서 식사를 하시고 정정을 요구하셨는데 해 드리기로 하고 또 다음 손님들을 연이어 받으면서 그 처리가 뒷전으로 밀리게 되었다.


직원 할인으로 나오는 점심 메뉴 '오오토야(大戸屋)' 참 애정했다. @도쿄 2010


어쩌면 여느 식당에서나 있을 법한 상황이다.

나는 당시에 바로는 못 해 드려도 머리 어디 즈음에 기억해놓았다가 양해를 구하고 나가시기 전에 계산대에서 바로 수정 해 드릴 셈이었는데 그게 못 마땅하셨던지 컴플레인을 거셨다.

그것도 점장님께 바로 말이다.


바로 점장에게 불려 간 나는 온갖 훈계를 들었고 '너 이거 어떻게 보면 사기야'라는 말까지 들었다.

응? 이게 왜 사기야?

피자헛 4년과 회사생활 2년을 하면서 서비스 정신은 수도 없이 배웠고 별의별 컴플레인을 겪었던 나지만 이게 왜 사기로 번질 수 있는 '사건'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는 '죄송합니다'라는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그 90도 허리를 꺾어 '모우시와케 고자이마셍' 그러니까, 정말 죄송하게 되었다는 사과를 하고서야 고객은 식당 문을 열고 나가셨더랬다.


고객에게 사과는 얼마든 할 수 있다. 서비스 업이 그러하고 또 일본은 '스미마셍'의 나라 아닌가.

내 실수에 대한 스미마셍을 말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열심히 일한 것보다 이 작은 실수 하나로 점장에게 인종 차별 같은 (뉘앙스의 발언도 있. 었. 다.) 대우를 받아야 하는 건지 어린 마음에 상처 아닌 상처가 되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의 위로가 아니었다면 그때 점장에게 앞치마를 던지고 나왔을지도 몰랐을 일이지만 어쨌거나 나는 취업을 하기 전까지 주문도 받고 정산도 하고 주방에서 나오는 요리를 세팅까지 하는 '시니어'역할까지 담당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많은 힘이 되고 웃음이 되었던 동료들과 이자카야에서 @도쿄 2010




새벽 알바의 삶.


이사를 가면서 새벽이 다 되어서야 마치는 야키니쿠 알바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심야 타임 시급이 나름 매혹적이었지만 택시비로 다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기존의 정식집을 오후부터 마감까지 바꾸고 오전 알바를 찾았다.

친구가 즐겨가던 빵집에서 새벽 알바를 구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운이 좋아 바로 시작하게 되었다.


주 3일 정도의 새벽 오픈 조, 일명 샌드위치 팀에 합류하게 된다.

여느 빵집이 다 그러할 테지만 오픈 전 빵을 만들기 시작하기에 늘 새벽 타임 일손이 모자라다.


제빵 기술이 없었던 나는 샌드위치 팀에서 베테랑 이모와 내 나이 또래의 '사야카'라는 친구와 3인 1조가 되어 그날 팔려나갈 샌드위치를 약 4-5시간 동안 만들어 낸다.


그 러닝 타임 중 소독과 준비, 포장이 차지하는 시간이 무려 한 시간 정도이니, 그렇게 몇 개의 아르바이트를 통하여 일본은 '매뉴얼을 중시' 하는 나라 라는걸 간접 체험하게 되었다.


평화로운 코쿠분지, 우리 집 베란다 넘어의 풍경 @도쿄 2010


새벽 5시 30분, 여느 때처럼 알람이 울린다.

잘 보일 곳도 없으니 반쯤 감긴 눈으로 옷장에 보이는 옷을 주섬 주섬 입고 선크림만 바른 얼굴로 전철을 타고 새벽 알바로 향한다.


자전거로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새벽 출근이라 전철을 이용하기로 했다.

(교통비가 비싼 일본은 알바도 통근 비용이 지급된다.)


다행히 봄과 여름 사이의 날씨는 항상 맑았고 새벽 공기는 하루의 시작에 힘을 실어 주었다.

동네는 늘 한적했고 평화로웠다.


매일 '이랏샤이마세'를 연발하며 웃음을 장착한 채 바쁘게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서비스업과 다르게 빵집 알바는 마스크를 낀 채, 동료들끼리 시답잖은 잡답만 조금 주고받을 뿐, 흘러나오는 라디오를 들으며 묵묵히 잘 다듬어진 샌드위치를 만드는 일이 메인이었다.


그리고 늘 샌드위치 알바를 끝내고 귀가하는 길에는 양 손에 당일 구워진 빵과 샌드위치가 들려져 있었다.


나와의 싸움, 늘 '한자(漢字)'가 어려웠다  @도쿄 2010


버리는 시간 없이 알바 시간을 꽉꽉 일상으로 채워 넣었지만 새벽 알바가 있는 전날 저녁은 마감을 하지 않았고, 일주일 중 하루는 꼬박 쉬는 날을 넣었다.

온전히 재충전할 시간들을 제외하고는 반년 간 부지런히 알바를 했다.


워킹 1년간 알바만 부지런히 해도 돈을 벌어간다고 했던 일본 아닌가.

그러나 나의 계획은 딱 반년 치만 일을 하여 어느 정도의 생활비를 벌어 놓은 다음 일본에서 실행하는 일본어 능력 시험 1급을 치면서 취업 활동을 하는 거였다.


최저 임금은 800엔대 였지만, 두 개의 일터에서는 900엔대로 시급을 쳐 주었고 주 5-6일가량 하루 8-10시간 정도 근무로 매달 신입 사원만큼의 월급(18만 엔-22만 엔) 이 손에 들어왔다.

그러나 반년이 다 되어 갈 무렵, 새벽 알바와 오후 알바, 그리고 공부까지 하다 보니 체력적으로 지쳐갔다.


돈을 벌고 경험을 하고 돌아갈 목적이었으면 시급이 더 좋은 알바를 구해서 일하고 여행을 다니면 될 노릇이었지만 내게는 목표가 있었고, 그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나름의 안정된 구도의 이 생활이 딱 좋았다. 그러나 반복되는 생활과 제대로 된 소속이 없는 채 목표를 크게 잡았으니 마음에 의지 할 곳이 필요했었는지도 모른다.



오케이, 프리타의 삶은 여기까지다.

이 땅에 혼자 왔지만 하나씩 내 것으로 만들면 된다.



그렇게 온전한 여름이 오기 전, 나는 정들었던 빵집 알바를 정리하고 본격적인 취업 활동에 돌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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