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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드모아젤 Dec 24. 2018

하지메 마시떼, 안녕 나의 도쿄

캐리어 하나와 시작된 나의 첫 해외 생활

엄마, 저 1년만 다녀올게요.


그게 시작이었다.

그렇게 한국을 떠나온 지 약 1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일본 도쿄에 도착한 날도, 그로부터 5년 후 프랑스 파리에 도착한 날처럼 추운 겨울의 1월이었다.


일본의 지상을 달리는 흔한 전철 풍경. 노란색 소부선에서 열차를 기다리다.


도쿄의 중심의 신주쿠에서 노란색 소부선, 주황색의 중앙선을 타면 5분 안에 도착했던 '나카노'역의 어느 기숙사에 처음 둥지를 튼 날을 난 아직도 기억한다.


대학생 때, ‘지구별 여행자’ 가 되리라 뉴욕 여행 중  큰 맘먹고 산 샘소나이트 빨간색 캐리어 가방 하나가 이민을 오겠다고 마음을 먹고 가져온 내 짐의 전부였다.


사실 그 가방 안에는 별게 없었을 거다.

가면 당장 한국 음식 생각날 거라고, 일본 김치는 달아서 먹겠냐며 굳이 손수 반찬통에 싸서 넣어주신 몇 끼분의 김치와 몇 가지 반찬들 그리고 고추장이 한켠에 자리 잡았을 거고.

겨울 옷가지와 손때 묻었던 일본 책 그리고 소지품 정도였을 거다.

아 내복도 있었겠다. 추위를 많이 타던 나였으니까 '사람 사는 있을 것 다 있던 일본'이었어도, 바다 건너 떠나는 딸 걱정에 엄마는 나 몰래라도 쟁여 넣으셨을 테니까.

 

그게 다였을 거다.

다른 건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다. 사회 초년생의 월급에서 꼬박꼬박 월세 내고 남은 돈으로 비밀스럽게 적금 통장에 따로 모아둔 유학자금으로 부모님을 설득해 경제적 도움은 필요 없으니, 1년만 살고 오겠노라고 하고 허락을 받은 해외생활이 시작이 되었다는 것, 고민하고 꿈꾸던 결과물을 얻었다는 (사실 시작에 불과했겠지만) 사실에 그저 벅찼을 거다.




처음 자리 잡을 곳으로 기숙사를 선택했던 이유는 사실 일본 집 구하기 시스템에 대하여 잘 모르기 때문이기도 했고, 직접 내 눈으로 보고 결정하고 싶어 선택한 임시방편이기도 했지만, 내심 타지에서 혼자가 된다는 생각을 덜어줄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결국 난 3개월 만에 부동산을 통해 이사를 하는 바람에 그곳에 크게 정을 둘 일이 없었지만 말이다.



나카노는 그래서 나에겐 뭔가 아련한 곳이다.

그곳에서 나를 발견하는 시작을 했고, 그 과정이 새롭고 재미있다는 생각과 동시에 눈물 젖은 빵도 먹었으며 인종차별과 문화 충격이란 걸 처음 겪기도 했고, 해외에서 한국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는 경험도 했던.

그때는 내가 어른인 줄 알았지만 사실 그저 나는 세상의 모든 게 신기하기만 했던, 아직 넘어지는 게 익숙하지 않았던, 그리고 씩씩하게 다시 일어나는 법이 뭔지 몰랐던 20대 소녀였던 거다.




요로시쿠(잘 부탁해) , 나의 일본


드라마에서만 보아 오던, 일본의 콩집으로 이사를 하고 나니 뭔가 진짜 해외생활이 시작되었구나 싶었다.


오사카, 후쿠오카로의 두 번의 여행,  2주일 정도 카고시마 지역에서 홈스테이 겸 연수 이외에는 일본에 대한 경험은 무지했다. 그저 학부 때 책으로 영상으로만 접하던 일본이었지만 무사히 졸업장을 받았고, 무사히 취업했고 무사히 그 언어를 베이스로 먹고사는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지속하는 줄만 알았다.

그렇게 평범하게 때가 되면 결혼을 하고, 대한민국 어디 즈음 내 공간을 갖고 내 가정의 둥지를 틀어 사는 평범한 삶의 흐름을 내가 바꾸기 시작한 시점이 이때로부터 시작되었던 거다.



그 후로도 나는 나카노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곳에 살게 되었다.

나카노를 중심으로 한 이유도 있었겠지만, 나는 주황 색선 (일본에선 츄우오센이라고 불린다) 라인에 위치한 동네들을 유난히 좋아했다.


일본은 보통 2년 주기로 집 계약을 하는데, 참 신기한 게 2년 후 재계약 그러니까 갱신을 하고 싶으면 한 달치 월세에 달하는 금액을 집주인에게 갱신비로 주어야 한다.


보통 월세는 있을게 다 있는 콩집의 원룸이 평균 5만 엔에서 6만 엔대 (한화로 50-60만 원 정도) 정도라고 보면 이건 여간 아까운 게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이사를 또 가자니 일본은 '힛코시 빈보 (引越し貧乏:이사를 다니면서 가난해진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사하는데 드는 초기 비용이 월세의 약 2-3배는 기본으로 들기 때문에 항상 갱신 시기가 다가오면 고민을 했었다.


그때마다 '혹시나 이러다 언제 귀국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인데, 새로운 동네와 새로운 집에서 새 기운을 받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라는 결론으로 5년 동안 3번의 이사를 다녔다.


집 찾기와 부동산 교섭의 달인이 되어, 마지막 집은 공영주택의 깐깐한 심사를 통해 입주하여 주변 일반 주택 시세보다 좋은 조건으로 입주하는 행운도 누렸다.


일본 생활 내내 타고 다니던 나의 핑크 자전거


그렇게, 공원이 많고 조용해서 산책하기 참 좋은 코쿠분지(国分寺)

도쿄에서 살고 싶은 동네 1위에 매번 뽑히는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카페와 벚꽃놀이하기 좋은 이노카시라 공원이 자리 잡은 키치죠지(吉祥寺),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세계관을 엿볼수 있는 지브리 미술관의 동네이자 여러 노선들이 다녔던 미타카(三鷹).


이렇게 정말 중앙선 위주로만 자리를 잡았었다.


가까운 거리들을 늘 자전거를 따릉 따릉 거리며 다니다 보면, 뭔가 어린 시절의 아날로그적 감성이 살아나는 듯했다.

아침저녁으로 항상 저 자전거 바구니에 출근 가방을 넣고 정장 치마를 입고도 잘도 씽씽 달리기도 하고, 주말에는 한가득 장을 본 것으로 채우기도 했고, 햇살 좋은 날에는 책과 먹을거리를 한가득 실어 근처 공원에서 피크닉을 하기도 했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대로,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다들 수준급 실력을 뽐내며 자전거와 함께 하는 삶을 공유했다.

그렇게 조용하면서도 소소하게, 때론 느리게 사는 법을 몸으로 익혀갔다.



나의 20대 중후반은 일본으로 가득 채워졌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중간세대에서 성장해온 나는 어쩌면 일본의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동경했었는지도 모른다.


어딘가 여백이 있는 대화의 공기. 디렉트로 표현하지 않아 상대에게 해석을 맡기는 듯한 화법.

동네마다 보이는 작은 구멍가게들, 아직도 오래된 간판을 유지하면서 몇 대째 내려오는 식당, 동네 동네마다 마을을 지켜주는 작은 신사(神社)들, 우편과 등기를 즐겨 이용하고, 모든 것을 서류화하여 보관하는 때론 답답했던 그 문화들마저. 난 그 여백과 느림의 미학을 꽤나 맘에 들어했었나 보다.


때론 매뉴얼을 너무 강조하기도 하고, 쓸데없이 진지한 사항들을 맞딱들일때마다 '이런 건 그냥 해 주면 안 되나?' 하고 맘속으로 되뇌인 적도 있었지만 살다 보니 그런 부분들은 오히려 내게 신뢰감을 주기도 했다.

그렇게 매뉴얼대로 꼼꼼하게 만들었을 테니까 믿고 사게 되고, 그런 안전한 과정으로 처리했을 테니까 괜찮을 거야 하고 자연스럽게 믿게 되는 일상이 되었다.





물론 1년 뒤 나는 귀국하지 않았다.


워킹홀리데이로 도착한 그 나카노의 삶으로부터 반년이 흐른 뒤, 취업을 했고 취업비자를 받았다.

그리고 회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외국인들이 어려워하는 받침이 들어간 내 이름 대신 난  '메구미(めぐみ)' 그리고 '애니(Enny)'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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