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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드모아젤 Jan 17. 2019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눈으로 덮인 스톡홀름 도시를 걷다 멈춰진 발걸음

짧은 북유럽 여행을 끝내고 파리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

늘 그랬듯 이륙을 시작하면 노래가 흘러나오는 헤드폰을 끼고 눈을 살며시 감는다.


1월의 핀란드 헬싱키. 그리고 일본의 에도 덴을 닮은 트램

어릴 적 중이염을 크게 앓은 뒤 모든 탈것에 대해서 그렇게 멀미를 했던 나였는데 이렇게 잘도 혼자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는 걸 보면 엄마는 항상 신기해한다.


그런 내가 한때는 하늘에서 일하는 직업에 도전도 했으니까 사실 비행기를 탈 때마다 정말 내가 지상이 아닌 이 곳에 일터를 두고 일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엄마 말처럼 난 괜한 멀미 탓을 하며 오래 버티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여행의 플레이 리스트엔 죄다 한국 노래를 집어넣었다.

노래든, 음식이든 하나에 꽂히면 지겨울 때까지 하는 건 가끔 나 답지 않다는 생각이지만 그럴 때 보면 난 반복의 일상에 나름 익숙한 사람인가 싶기도 하다.

아니, 다른 의미로 좋아하는 게 생기면 온 힘을 다해 그것을 사랑해야 사람이거나.


아이유의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의 멜로디가 귀를 간지럽힌다.

첫 소절의 멜로디와 함께 멀미를 머리 저 뒤편으로 넘기듯 익숙한 습관처럼 의식을 희미하게 두고 잠을 청했다.


카메라에 동화 같은 풍경이 담겼다. @스톡홀름

고작 며칠의 휴무에 낀 하루를 연차를 내, 사일 정도 다녀온 짧디 짧은 여행이었지만 혼자 하는 겨울 여행으로 적당했다.

추운 겨울이라, 어두운 겨울이라 더 밝고 따뜻한 곳으로 갔으면 했지만 파리보다 더 어둡고 더 추운 겨울의 북유럽행을 택했다.


겨울 냄새를 한껏 풍기는 그곳은 어떤 모습으로 나를 반길지 기대하지 않은 상태에서 만나고 싶어

비행기와 숙소 이외에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았다.

노트북과 읽을거리, 가득 충전된 오래된 카메라 두대만 준비했을 뿐이었다.


스웨덴의 스톡홀름도, 핀란드의 헬싱키도 눈이 내려 하얀 눈바람으로 맞이해줬다.

첫날, 이미 캄캄해진 눈 오는 스톡홀름을 거리를 걷다 소복이 쌓인 눈 속에 발을 디뎠다.


스웨덴 스톡홀름 첫날. 저녁 내내 살포시 부담스럽지 않은 눈발들이 날렸다.


그리고 새하얗게 쌓인 눈을 보면 늘 그랬듯 내 이름을 쓱 장갑 밖으로 나온 손가락을 휘저어 적어봤다.

동시에 머릿속에 떠 오르는 그 이름을 옆에 적어볼까 하다가 이내 손을 떼었다.

적어 놓고 떠난다 한들, 그 이름 석자. 알아보는 이도 없을 텐데 말이다.


발길 닿는 대로 걷다 멈춰 쓰인 글씨들은 가로등 불 빛 아래에서 하늘거리면서 내려오는 눈송이에 금방 쌓여버렸다,

뒤를 돌아 그곳에 머문 내 발자국이 눈 아래에 덮인걸 다시 확인하고 걸음을 계속 이어갔다.


내가 머물렀던 그곳에 또 다른 발자국이 새겨질 테고 또 다른 이름이 새겨지겠지.

그 이름 지워질까 애타서 또 써보기도 할 테고, 오래도록 그 자리의, 그 느낌을 기억하고 싶어 사진으로 남기기도 할 테지.


새겨지고 지워진다는 것.

누구의 마음에 살다가 덮어졌던 나도, 내 마음에 살다가 지워졌던 그 사람처럼.

우린 그렇게 어떤 이의 마음속에서 새겨지고 지워지곤 한다.

그게 연하든 진하든.


그 농도를 짙게 하고 싶은 사람 앞에선 내 이름 석자 지워질까 또 들여다보고 쉽게 지워지지 않게 몇 번이고 덧칠하듯 새겨봤을 테지만 결국은 눈 속에 하얗게 쌓여버린 글씨들처럼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어느새 자취를 감추어 버린 그의 이름, 그 언젠가 내 맘에 다시 와서 새겨주길 바랬지만 이날처럼 너무 깨끗하게 덮여버린 눈처럼 새하얘서 그러지 못했을까.


봄이 와서 그럴 필요가 없어질 때까지 혹시나 하고 기다렸던 날들이 떠 올랐다.


아름답던 눈 오던 겨울의 스톡홀름. 그리고 야경


그랬겠다.

그 나날들 속의 나는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내심 기다렸겠다.

오지 않으면 그 실망감과 동시에 기다린 시간들이 미워질까 봐,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그러나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마음속 한구석엔 인정하기 싫을 네가 올 수 있는 공간을 비워두었다.


잊는 일이라는 게 머리가 시키는 대로 마음도 따라주면 좋을 일이지만,

잊어야 한다는 ‘마음’은 내가 시키는 대로 듣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 다시 차디찬 온도가 되어 흰 눈이 쌓일 때까진 그 이름 석자. 옅게 남아 있을 테니까.


다시 다른 이름이 새겨질 때까지. 희미해질 대로 이미 희미해져 버린 그 이름이지만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가 보다.


새하얀 눈으로 덮인 헬싱키


무사히 파리행 비행기가 상공에 올랐다.

이십여분쯤 지났을까. 북유럽을 빠져나가는 비행기는 언제 눈 내리던 곳에 있었냐는 듯 햇살을 머금은 구름 위에 있었고, 아이유의 잔잔한 목소리는 여행의 여운과 함께 사라진 지 오래였다.


스튜어디스가 건네준 커피 한잔을 받고, 여행의 여운이 깊게 남겨진 카메라를 켰다.

한 장 한 장, 백장은 훨씬 넘는 사진들을 보고 있자니 추운 와중에 언제 이렇게 행복한 순간들을 다  담아냈나 싶다.

사진을 정리하기 위해 마음에 덜 드는 사진들을 하나씩 삭제키를 누르며 지워가다 보니, 고민하다 적어버린 네 이름 석자가 새겨진 사진이 삭제된 사진들 뒤로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다.


잊어야 한다는 마음으로 찍어낸 사진.

‘삭제하시겠습니까?'


몇 초간의 고민 뒤 나는 삭제 버튼을 누른다.


파리로 돌아가는 비행기 창 밖으로는 여전히 눈부신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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