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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드모아젤 Jan 15. 2019

안녕이라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 어떤 안녕을 전해야 할지 나는 몰랐다.

아무리 바빠도 빠지지 않고 연례행사처럼 일기를 적는 날이 있다.

내가 태어난 날,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그리고 해가 바뀌던 날.


그날도 어김없이 일기장을 펼쳤다.

나의 한 해는 이렇게 지나갔노라고 무사히 한 해를 마칠 수 있음에 감사하며 일기장 한편에 남겨두기 위해서.

작년엔 난 어떤 기분으로 한 해를 마무리했을까.


지난 일기들을 살펴보다 잊고 살았던 너의 편지를 발견했다.

너에게 받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편지 속의 선명한 글씨체는 아직도 그 편지를 전해 주던 날의 너를 떠올리게 했다.


마음은 누구보다 따뜻했고 열정적이었지만 표현에 서툴렀던 사람, 감정을 감추고 평정을 유지하는 게 익숙해서 때론 차갑게 보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누구보다 순수했던 사람.

나를 만나면서 늘 안고 살아야 했던 무게들을 조금씩 나눠 내려놓는 게 익숙해져 갔던 사람.

그 익숙함으로 서서히 감정을 토해냈던 사람.


한 장 가득하게 적어 내려 간 그 편지에는 그런 네가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내가 미처 네 입에서 듣지 못했었던 나라는 존재가 너에게 갖는 의미들까지 고작 한 장의 종이로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도 그 문장들을 읽어 내려가는 내 눈동자는 그 날과 다름없이 여전히 흔들린다.

그리고 그날 네가 어떤 마음으로 이 편지를 써 내려갔는지 기억해낸다.


파리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읽으라고 공항에서 전해준 그 편지가 그동안 우리가 추억을 쌓을 동안에도 미처 전해주지 못했던, 아니 굳이 전달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고 착각했던 너의 진심들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때론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감정이라 할 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잔잔하게 흩어져버리는 탓에, 감정을 표현하는 일에 서툴러도 상관없다고, 나는 너와 어떤 감정이라도 애써 포장할 필요도, 감출 필요도 없이 공유하길 원했다.

감정선이란 때를 놓치면 미묘한 차이로 다른 의미를 수반하기도 하고, 때론 그 본연의 색을 잃고 퇴색하기도 하니까.


마음은 늘 서로를 품고 싶었지만 둘 사이에 놓인 거리의 벽에서, 서로 다르게 흘려보내는 일상 속에서 어느 순간 빈틈이 생겼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보고 싶은데 볼 수 없어서 더 곁에서 아껴주고 싶은데 아껴주지 못해서 안타까운 마음들을 '너를 위한 '배려라는 이름으로 저 깊이 묻어두기 시작하면서 작은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스톡홀름. 감라스탄지구의 어느  골목


그랬다, 그건 '너도 나만큼 힘들겠지'라고 멋대로 한 배려였다.


장거리가 힘이 들었던 건지, 표현을 아끼던 너의 사랑을 알고 싶어 했던 내가 끝내는 지쳐 버렸는지, 사랑의 온도는 같았지만 표현하는 방법이 달랐던 우리 사이에 생긴 균열을 맞추기 위해 너는 너에게로 가는 비행기 표를 보내왔다.

그 표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둘 사이에 한차례 폭풍이 지나갔고 나는 너를 보러 가는 길이 지금의 우리를 위하는 것일까 하고 한참을 망설였다.


너는 결핍 혹은 균열이라 생각했을 테고, 나는 조각이 깨어졌다고 생각했다.

깨진 창문 조각에 틈을 메워 일시적으로 불어오는 바람을 막을 수 있겠지만 겨울의 찬 바람이 불면 그 시린 틈을 보며 이대로는 다음 해를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해버릴까 봐.


너에게로 가는 길. 혹은 떠나오는 그 길목 위에서

오랜만에 만난 너는 그동안 나와 함께 하고 싶었던 것들을, 내게 보여주고 싶었던 네가 사는 나라의 모습들을 가득 준비해주었다.


그리고 파리로 돌아오는 날 쥐어준 편지를 마지막으로 나는 파리로 오는 비행시간 내내 참아왔던 감정을 쏟아냈다.


안녕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너와 함께라서 안녕이라고, 혹은 너와 함께 하지 못해 안녕이라고.

그 어느 안녕도 나는 입에 담지 못한 채 비행기에 올라탔고, 너는 그 편지 속에서 나와의 안녕을 가득 써 내려갔다. 다시 함께 같은 공간에서 미래를 그려갈 때까지 이겨낼 시간들이 훗날 우리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줄 거라고.


우린 미처 알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애써 외면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입에서, 혹은 네 입에서 안녕을 말하는 순간이 오지 않았으면 했으니까.


일기장을 닫고 생각했다.

그때의 우리 관계가 단순한 결핍에서 오는 균열이었다면, 우린 네 말처럼 지금도 안녕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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