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건, 결국 너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풍경
일주일간의 포르투갈 여행이 끝나고 사진을 정리하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쩜, 그 사진들은 널 만나지 않았었더라면 다르게 담겼을지도 모를 풍경이라고.
그곳은, 꼭 너와 함께 가고 싶었던 여행지는 아니었다.
동행이 없더라도, 혼자서라도 꼭 가리라 다짐했던 여행지였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늘 그렇듯 물었던 그들만의 '소울 여행지'중 단연 베스트에 올랐던 포르투갈이어서, 나의 소울 여행지가 될지 어떨지에 대한 기대감으로 매년 여행하고 싶은 리스트에 올려두곤 했으니까.
그리고 드디어 대서양을 끼고 길게 자리 잡은 포르투갈이라는 나라에 도착하였던 날은 생각보다 내 마음이 고요했음을 기억한다.
내리쬐는 8월의 햇살에 내 마음의 응어리도 녹여냈으면 했지만 생각보다 햇살은 그리 뜨겁지 않은 따스함을 유지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거칠어 보였지만 대화 속에서 건네 오던 눈웃음 속에서 따스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널 만나지 않았더라면 지금 포르투갈을 마주한 내 기분은 지금과 같았을까, 어땠을까 하고 말이다.
매년 여행했던 사진들을 정리하면서 다시 보다 보면, 내 표정과 시선은 항상 다름을 느낀다.
입고 찍은 옷 스타일과 포즈마저도 해가 바뀜에 따라 그리고 여행지와 동행이 다를 때마다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도 있었겠지만 해를 거듭하면서 여러 가지 감성으로 여행을 담아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리스본의 구시가지의 정돈되지 않은 돌 오르막길을 오르면서 발견하는 작은 골목골목들, 오픈된 레스토랑 테라스석 사이로 흘러나오던 포르투갈의 희로애락을 노래하는 '파두(Fado)'의 선율이 끊이지 않는 여름밤.
달달하면서도 잔을 마지막까지 들이켰을 때 올라오는 약간의 알코올 맛으로 내가 여행을 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 줬던 1유로의 행복 '체리주 Jinja'.
와인 부심의 프랑스에서 몇 년 동안 마셔오던 포도주의 향과 다른 빛깔과 무게를 담아내던 포르투갈의 와인, 그리고 매일 아침 집을 나서 들렀던 카페에서 익숙하게 주문했던 에그타르트.
미비한 내 카메라로는 다 담지 못했던 비 오던 포르투의 눈부셨던 야경,
약간은 투박하면서도 그건 그래서 그대로 멋스럽게 포트투갈스러웠던 방치된 폐허들 사이의 서늘함.
이 모든 풍경들을 흡수하는 내 머리와 오감은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에서 나오는 흥분지수만큼 이면에서 고요한 감정을 뿜어냈다.
그리고 금세 알았다. 그건 낯선 곳에서, 얼마 되지 않은 실연의 상처를 덜어내기 위한 나의 본능이었음을.
기나긴 시간 동안 스스로 꾸준히 나름 발라온 연고는 쓰라린 사랑의 상처를 완벽하게 아물게 하지 못했고, 겨우내 생긴 딱지는 끝내 떨어졌어도 이전과 같은 색으로 돌아갈 때까지의 상처만 들여다보면서 살 수 없는 노릇이었다.
딱 맞는 처방전을 찾는 일은 우선순위에서 밀렸고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만큼 바쁜 일상을 보냈다.
그리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일상의 쉼 속에서 너를 만났다. 아니 네가 들어왔다. 예고 없이.
너는 마치 찾고 찾던 명약이 ‘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사랑은 다시 온다'는 노랫말 가사는 나랑 상관없던 시절에도 그 노랫말로 실연당한 지인들을 위로하곤 했더랬다. 그러면서도 그게 언제 즈음이라고 기약할 순 없어서, 기약해 줄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우리가 아는 사랑이라는 건 우리가 모르는 사이 기약 없이 방심한 틈에 훅 하고 스며드는 거니까.
그를 만났던 날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아직 여름이 채 다가오기 전의 봄의 끝자락, 파리의 어느 파티에서 백 명이 넘는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왜 나는 그를 한눈에 발견했는지, 그리고 그게 파티가 시작하고 언제 즈음이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한다.
많은 인파 속에서 내 시선을 자꾸 뺏어갔던 그와는 여섯 시간이 넘는 파티의 러닝 타임 중 겨우 두세 마디 정도 나눴을 뿐이었다. 그것도 파티에서 마련한 게임을 위한 해답을 찾기 위한 질의응답으로.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은 고작 파티가 끝날 무렵 그가 나의 이름을 물어 왔을 때가 전부이자 그게 시작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도 나처럼 내가 그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마다 사람들의 빈틈 사이로 그의 시선을 돌려 나를 찾았다고 했다.
어릴 때나 하는 줄만 알았던 첫눈에 반한다는 걸 알았던 그 순간에도 나는 스스로를 부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또 사라질 한여름밤의 꿈같을까 봐.
또 내가 미워지는 이별의 후유증을 겪을까 봐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내 상처를 시간이라는 약으로 그냥 방치해두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조심스러운 내 마음을 열어 시작해본 사람이었다.
물론 한여름밤의 꿈처럼 펑하고 사라질 줄 미리 알았다면 파티 내내 그에게 돌렸던 내 시선들은 우리가 처음 만났던 그 자리에 고이 묻어 두고 왔을지도 모른다.
겨우 딱지가 떨어져 나간 그 자리에 또 한 번의 상처가 자리 잡히는 게 싫었으니까.
포르투갈의 가꾸어지지 않은 풍경들을 마주칠 때마다 네가 생각났다.
너도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고 했던 이 곳을 너도 나처럼 좋아했을까.
너라면 어떤 풍경을 더 담아내고 싶어 했을까.
나와 했던 첫 여행지에서 너의 발 닿는 대로 다니다가 내가 멈추고 싶어 했던 그곳에서 같은 곳을 보고 말없이 쉬었던 그 리듬을 난 이곳에서도 느낄 수 있는데.
그래서 내 마음대로 너도 이곳을 참 좋아했을 거라고 단정 짓듯, 마치 카메라에 담아내던 풍경은 다 너에게 보여주고 싶은 풍경 같았다.
따스한 햇살이 뜨거워질 때 즈음이면 적당히 쉬어갈 수 있는 그늘.
적절하게 불어주는 바람.
빛이 내리쬔 끝에서 스멀스멀 피어나던 꽃들과 잡초들마저 평화롭고
저녁이 되면 즐비한 레스토랑들 사이로 코를 자극하던 해산물 요리들.
관광객들이 북적이는 곳들을 피해 들어간 골목에서 발견하는 로컬 와인바와 자그마한 카페들.
셀 수 없이 많은 이유들로 나는 포르투갈을 만끽했다.
비록 너에게 내가 보던 풍경들을 이제는 전해 줄 수 없게 되었더라도 나는 그 순간에 마주친 포르투갈의 모든 것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내가 닿는 시선의 끝에서 네가 떠오를 때마다 그곳에 너를 하나씩 묻어두려 했다.
비우고 돌아오고 싶었다.
너와 함께가 아닌, 너의 것으로 가 아닌 다시 새로운 것들을 채워 넣어야 할 공간이 필요했으므로 나는 열심히 낯선 공간에서 만나는 나와 너를 비워냈다.
여행에서 늘 그랬듯 때론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때론 적막조차 어색하지 않은 고요함의 시선으로.
그래서 한컷 한컷 누르는 셔터에 담긴 사진들은 어딘가 비워져 보이기도 하고 어딘가 꽉 차 보이기도 했다.
너와 함께 했던 여행이 아니였음에도 그 사진들에서 문득, 네가 느껴지는 건 참 묘한 일이다.
다음 여행지에서도 아직도 내 시선의 끝에는 내가 모르는 네가 있을지.
네가 좋아했던 풍경을 따라서 내 시선이 흐를지. 어떤 풍경에서 나는 또 셔터를 누를지,
문득, 궁금해진다.